'창의'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4.12 나에게 딴짓을 허하라.
  2. 2013.02.13 쉬운 길 옳은 길
  3. 2013.01.11 천재와 교육
  4. 2010.05.02 이런거? Like This. No, Something E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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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업무시간에 딴짓을 많이 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새글도 확인하고,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떨어지는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 블로그에 올릴 글도 적고 (보통은 저녁시간에 적지만 급하게 떠오른 생각이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충만할 때는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글을 적을 때도 백그라운드에서 분석프로그램이 실행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가끔 불필요하게 돌리는 경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퍼즐게임도 즐겨한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은 내게 업무시간에 딴짓 좀 그만하라는 소리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정해진 업무 시간에 딴짓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나를 변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가 딴짓하는 것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보통 직장인들은 하루 8시간의 업무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서 맡은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나는 업무시간이 8시간보다는 긴 10~12시간정도다. 외부에서 강제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활해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일을 느슨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하루 2시간 정도의 딴짓을 하면서도 맡은 일은 충실히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오전 10시 출근이지만 가급적 9시에 출근하려는 것도, 오후 7시 정시퇴근이 아닌 8시나 9시가 되어서 퇴근하는 것도 그만큼의 딴짓을 하면서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퇴근 후에도 침대에 누워서 업무와 관련된 많은 생각을 하고, 책도 본다. 급한 일이 있으면 더 늦게 야근하거나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기도 한다. 8시간을 사는 사람과 10시간을 사는 사람의 생활패턴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야근이나 주말 등의 초과 근무에 대해서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서 업무 시간에 잠깐의 딴짓을 무조건 불허하는 것도 형평성에 맞지 않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하기 위해서 쉬엄쉬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베스트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일하는 것뿐이다.)

단순히 남들이 활동하는 시간에 내가 딴짓을 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딴짓을 했으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업무에 투자하고 있다. 나에게 딴짓하지 말라는 그들의 생활을 관찰해보면 하루에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카페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다. 대부분의 대화가 업무 외적인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은 직장 내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이고, 내가 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퍼즐을 하거나 글을 적고 있는 것은 딴짓이 된다.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면서 하루 1~2시간을 커피나 수다에 보내는 사람들이 내가 자리에서 잠시 딴짓하는 것을 나무라면 어쩌자는 건지... 물론 업무 분위기가 나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즐겁게 딴짓하는 그네들의 승리다.

업무의 특성상, 데이터분석을 돌려놓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려야할 때가 많다. 그 시간을 멍시간으로 만들 이유는 없다. 그러니 인터넷 서핑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퍼즐도 하고 또 글을 적기도 한다. 특히 주변에서는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은 별로 딴짓이란 인상을 갖지 않는 것같다. 그런데 그 시간에 글을 적는 것은 딴짓이 된다. 보통 인터넷 서핑을 하면 트렌드와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그렇듯이 글을 적는 시간은 내게 트렌드를 분석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인터넷 서핑 이상의 창의적인 시간이고 향후의 업무 수행을 위한 기초 작업이다. 그러나 남들에게 그 시간동안 나는 딴짓을 한 사람이 된다.

유정식님의 글 중에 '사무실에서 딴짓할 시간을 허하라'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무실 또는 업무 시간에 딴짓을 불허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생산성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그리고 외부 인터넷을 막아놨다하더라도 요즘은 그냥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마음대로할 수 있으니 강제로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도 없다.) 나는 저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딴짓할 시간 time to이 아니라 딴짓할 용기 dare to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또는 업무 시간에 방종을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된 딴짓은 필요하다.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듯이 자유로울 때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특히 지식노동자들에게 딴짓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의 시대, 융합의 시대에 딴짓은 창의와 창발성의 일으키는 한 가지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무분별한 딴짓을 허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딴짓의 정의가 뭘까? 그냥 업무가 아닌 모든 일이 딴짓일까? 인생은 정해진 트랙을 도는 육상경기가 아니다. 그냥 시작과 끝만 있을 뿐이다. 직진한다고 해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장 빨리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삶의 트랙에는 매 순간 다른 목적과 이유가 있다. 딴짓을 그저 업무의 방해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딴짓을 통해서 더 창의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그런 문화와 지원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

(2013.04.03 작성 / 2013.04.12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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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길 옳은 길

Gos&Op 2013.02.13 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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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시청을 최대한 자제하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게 됩니다. 요즘 그런 경우가 바로 마의입니다. 이병훈PD님의 스타일이 뻔해서 비판도 많이 듣지만 고대 이후로 서사구조에 큰 변화가 없으니 뻔해도 그냥 계속 보게됩니다. 지금 마의는 파상풍과 주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백광현의 사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자의 목숨이 경각에 있어 극의 긴장을 돋웁니다. 스스로 마루타를 자처하면서 치료법을 찾아가는 주인공과 치종지남이라는 의서로 무장한 떠돌이 광인의 대결이 다음주에 전개될 예정입니다. 오늘 (2/12 화) 마지막 장면에서 백광현이 독이 강한 약재대신 재를 사용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극의 전개를 봐서는 이제까지의 치료법이 모두 치종지남에 적힌대로인 듯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의 치료법도 치종지남에 적혀있는 것인지는 다음주를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치종지남에는 독성이 강한 약재를 사용할 것이 적혀있어서 허약한 세자가 제대로 견뎌내지 못해서 떠돌이는 큰 화를 당하고, 주인공이 찾아낸 시료법은 싸고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는 새로운 처방전이 될 것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치종지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랬다면 주인공은 별로 고민도 해보지않고 그냥 서적에 나온 대로 처방을 내리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봅니다. 스승의 침술로 지혈을 하고 염탕수를 찾아내는 과정도 없이 쉽게쉽게 치료를 했을 법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치료는 무사히 마쳤지만 의학/과학에 새로운 발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책에 적힌대로 또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행동한다면 쉬운 길을 가는 것이지만 더 큰 발전과 전진을 가로막는 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쉽고 안전한 길이 정답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런 것에 메이면 새로운 곳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매일 다니던 큰 길에서 잠시 벗어나 샛길에서 만나는 우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봐야 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큰 길로 가면 가장 빠르고 쉽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 길로만 가다보면 새로운 곳을 만날 수가 없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지 못합니다. 만약 큰 길로만 다니던 사람이 큰 길에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혀버리면 사고가 수습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샛길도 이용해봤던 사람이면 그런 유사시에 새로운 해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샛길이 지름길인 경우도 있습니다. 모르는 곳을 방문했을 때는 네비나 지도를 보면서 따라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친근한 주변에서는 다양한 루트를 개발해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지식의 축적의 축적이 지혜의 내면화를 방해하면 안 됩니다.

오늘 마의 마지막 장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주인공이 치종지남을 가졌다면 치종지남을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청출어람청아람 (靑出於籃靑於籃)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스승의 지식을 흡수하는 것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극에서 대척점에 있는 이명환이 기존의 사고와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처음부터 치종지남이 존재했다면 주인공은 그저 치종지남의 한계를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예측이 맞다면 치종지남의 시료법은 어린 세자에게는 맞지 않은 방법일 듯합니다. 그저 어른들을 임상대상으로 해서 만들어진 방법일 듯합니다. 떠돌이는 그저 책에 나온 것대로 자신의 능력만 과신하다가 결국 화를 당할 것이다는 너무 뻔한 전개입니다. 예측은 여기까지...

좋음은 위대함의 적이다라는 말은 늘 명심해야 합니다. 검증된 방법은 검증된 문제에만 적합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많은 것들은 그렇게 딱 정형화된 경우가 적습니다. 정형화된 프로세스가 그래서 좋은 것이지만 그래서 또 화를 끼치는 것입니다. 프로세스에 너무 의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 프로세스가 만들어진 이유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프로세스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다면 변형된 문제에서는 오히려 잘못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늘 새로운 문제를 만납니다. 레퍼런스는 레퍼런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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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교육

Gos&Op 2013.01.11 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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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지휘자 헤르베르트 본 카라얀.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카라얀이 만약 음악/지휘를 하지 않았다면 그가 천재로 인정받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에 기계 메카닉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어쩌면 엔지니어로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엔지니어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만약 물리학이나 수학 또는 경제학 등의 전혀 다른 분야로 진출했다면 그는 그 분야의 천재가 됐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카라얀은 운좋게도 지휘/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현재까지 음악에 문외한 나조차도 알고 있는 지휘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참고. 카라얀 평전 1, 카라얀 평전 2)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적합한 분야를 선택해서 공부하고 노력한다면 천재적 기질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분야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재능을 썪히면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짧게 "모든 사람은 천재다. 만약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최적의 분야를 찾는다면… 그래서 대부분은 바보다."라는 글을 남겼다.

카라얀 평전 초반부에 마리아 칼라스의 명언이 한 줄 나온다. "좋은 교사와 위대한 교사의 차이: 좋은 교사는 제자의 자질을 최고로 끌어올릴 줄 알고, 위대한 교사는 제자의 장래를 내다볼 줄 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재능을 발견해주고 그 재능을 극대화시켜주고 또 그걸 통해서 미래를 개척/변화시키는 것을 도와주는 그런 부모/스승/멘토/지도자를 만난다면 우리 모두가 천재가 되지 않을까? 적어도 현재처럼 자신의 소질과 흥미와는 무관하게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책에만 파묻혀서 지내지는 않아도 되고, 그래서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어릴 때 한 작은 행동이나 말을 보면서 '천재가 아닐까?'라는 착각에 쉽게 빠지고, 자식들이 진짜 흥미를 느끼고 또 재능을 보이는 것이 아닌 (부모의) 착각 속의 분야로 자식들을 내모는 경우를 자주 본다. 대부분은 안 좋게 끝난다. 자식들의 실제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모두 해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무진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람이 천재가 되는 길은 참 험하고 멀다.

흔히들 우리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적어도 3가지 기준으로 그 일을 평가해본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인가? 내가 진짜로 잘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진짜로 해야만 하는 일인가? 즉, 흥미와 관심 Love to, 재능과 소질 Able to, 그리고 당위 Have to에 대한 자문이다. 당연히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하는 일을 해야만 할 때, 가장 퍼포먼스도 잘 나고 어쩌면 그 일에 천재적 재능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평범하게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의 관심과 재능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더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도 종종 본다.

어릴 적에는 부모나 주변의 강요에 의해서 싫든 좋든 많은 것을 해본다. 운좋으면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린이에게 시대적 소명이나 당위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 경우라면 그것을 즐기며 갈고 닦으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콤 그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말한 1만시간의 법칙을 지킨다면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전문가로는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운좋게 발견한 그 분야가 진짜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고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괜히 적당히 좋은 분야에 올인하느라 진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조금 다른 뉘앙스지만 자신의 재능과 흥미를 발견할 때도 -- 짐 콜린스가 말한 --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참고,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 꿈을 꾸게 된다. 보통 그 꿈이란 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은 제대로 된 꿈을 꿀 기회조차도 박탈당하는 것같다. 나만 하더라도 어릴 적에는 막연한 장래희망이 있었지만,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내면서 특별한 목적의식은 없었던 것같다. 짜여진 획일적인 커리큘럼에 따라서 교육받아지는 우민 백성들이 만들어지는 사이에, 진짜 소중한 우리의 꿈과 개성과 재능은 늘 뒷전으로 밀리기만 한다. 최근에는 그런 몰개성 교육의 무용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고, 미래를 위해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단순히 새로운 커리큘럼을 준비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바보만 양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육 자체가 없어져야할지도 모르겠다. 2차산업의 역군을 키우기 위해서 갖춰졌던 현대 교육과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놀거리와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서, 스스로 자신의 꿈과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줘야 한다. 이 대목에서 앨빈 토플러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그는 한국의 학생들은 10년 후에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한다고 지적했다. 기성세대가 만든 과거가 아닌 자신이 설계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다행히도 소위 말하는 머리에 피가 마르는 시기가 되면 성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자신의 흥미와 소질을 재평가해서 미래의 직업을 선택한다. 우민화로 인해서 그 시기가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여기서 좋아하는 것은 유희적/소비적 취미를 뜻하지는 않는다. 생산적 취미와는 어느 정도 맞다.

개인의 개성 (흥미와 재능)에 더해서, 당위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무조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법과 문화, 규범의 테두리 내에서 불가능한 것들도 많다. 그런 하드한 제약조건이 아니더라도, 특정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 또는 소명이 있다. 그런 시대정신과 소명에 맞는 일이 무엇인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다 같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유아독존이 될 수가 없다.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모두 그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되갚아줘야 한다. 즉, 사회기여 contribution가 필요하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이 사회는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또는 역으로 어떤 해를 입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면서 일을 선택해야 한다. 우려되는 점은 이 사회의 저소득, 하층민, 소외계층의 경우 사회로부터 받는 것이 전혀 없다는 그런 좌절감을 느낀다. 최근 대한민국의 양극화/불평등/불확실성 상황을 보면 그 심각성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런 인식을 갖는 사람이라면 역사회기여의 행위를 자행할 수도 있다. 실제 최근 자주 발생하는 묻지마 사건들이 그런 부작용의 일종이다. 개인이 사회에 느끼는 당위성은 사회가 그 개인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기회를 줄 때만이 생겨난다. 개인의 사회 당위성은 사회 (국가)의 개인에 대한 공정성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카라얀 평전에 나오는 글귀 (챕터제목) 하나로 글을 마친다.

천재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노력이다.

[업데이트 20130114] 주말에 안타까운 뉴스가 있어서 업데이트 합니다. 13세의 나이로 RSS (Rich Site Summary, formerly Really Simple Syndication)의 표준화에 참여했고 Creative Commons에도 참여했고 Reddit도 공동창업했던 Aaron Swartz의 자살소식입니다.  (참고. Prosecutor as bully, by L. Ressig) 그냥 유명 연예인의 죽음은 별로 충격적이지 않은데, 이런 기술분야의 천재들의 뉴스에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평소에 이런 천재들이 더 많이/오래 사회에 공헌/기여하는 것을 원했던 사람으로써 그의 요절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안타깝습니다. 앞서 천재는 적성과 재능과 당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와 함께 '인성'에 대한 부분도 필요합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듣은 이들은 자신만의 인성을 갖기도 전에 주변의 주목부터 받기 때문에 제대로된 인성을 기를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본 윤석찬님의 아론에 관한 글의 말미에 나오는 대한민국의 김웅용씨가 말한 'NASA에서는 계산과 예측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그의 재능만 필요로했다'는 말에서 이들에게 자존감과 사회공동체의식과 같은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오직 그들의 재능만을 빨아먹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성은 당위성과 함께 제대로 가르쳐줘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어릴 적부터 천재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그런 재능을 소진한 이후에 당위성과 인성을 자각하게 되면 너무 늦습니다. 검찰과 MIT에서 과도하게 그를 옥죄었다는 것이 그의 자살/우울증의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가 제대로된 인성교육을 받았다면 이번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MIT JSTOR의 해킹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신념 때문에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를 위해서 JSTOR를 해킹했을 개연성은 높았지만, 그래도 당위성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무모하게 행동에 나서지도 않았을테고 제대로된 인성이 갖춰졌다면 그 이후의 사회적 압박/괴로움 그리고 삶을 포기하는 것을 그렇게 쉽게 자행하지는 않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분야에 적성과 재능을 가졌다지만 천재도 또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천부적인 재능을 강요하는 것에 앞서서, 사람으로써의 자존감을 갖도록 인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의 청소년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도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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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마이뉴스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강인규님이 적은 <우리는 '이런 거' 왜 못드냐고?>라는 칼럼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읽어보셨겠지만, 간단하게 요약하면
  1. 제대로된 문제의식의 미비
  2. 위계구조와 그에 바탕을 둔 질책성 위압
  3. 인문학을 무시하는 분위기
특히, 세번째 이유에 대해서 장황하게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문제는 비단 인문학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빙산의 일각이고, 기본적으로 '기초를 무시한 응용 위주'의 분위기가 문제입니다. 여기서 기초학문이라 하면 수학, 물리/화학 등의 기초과학, 철학, 역사, 에술 등의 인문학 등을 통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리고 대학 (물론 하급 학교들도)은 기초과학이나 철학보다는 바로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응용공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공대를 나왔지만) 철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지도 않고 또 그런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도 한번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이 필요로하고 원하는 제품을 찾아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공학에서도 비슷하게 수학적/물리적 원리도 모르면서 겉보기 뻔지르한 제품만 만들려고 그리고 돈만 벌어보겠다고 강의실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이 없이 강의실만 계속 채워주고 있느니 대학들도 학생들을 봉으로 알고 사구려 강의를 제공하면서 수업료만 인상하려고 드는 것인지도... 그리고 단지 수업료 인상만 투쟁을 하지, 정작 사구려 강의에 대해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대학생들이 안스럽기도 합니다. (저도 고백하자면, 적어도 박사 3년차 정도가 되기 전에는 아무런 생각/고민이 없이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기술 자체에 대한 천시도 문제가 있지만, 원천기술 연구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단순히 물건을 찍어내는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것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아침에 위의 칼럼을 RT한 글 중에서 "이런거가 아니라 새로운거라고 질문해쟈요" 라는 @gunshik님의 트윗을 보았습니다. 이 트윗을 보고 바로 떠오른 생각이 '컬럼버스의 달걀 Columbus' Egg'이었습니다. 컬럼버스의 달걀이란 컬럼버스가 그의 서인도제도 발견을 시기하는 이들에게 계란을 주면서 세로로 세워보라고 주문했지만, 아무도 계란을 세로로 세우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컬럼버스에게 게란을 세울 수 있는냐고 반문하자, 컬럼버스는 계란의 끝을 따내고 바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거면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또 다시 힐난하자, 컬럼버스는 "물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네들은 누구하나 이런 방법을 해보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해봤다."라고 말하며, 신세계를 찾는 것도 배를 타고 서쪽으로 줄곳 갔으면 누구나 찾을 수 있었겠지만, 자신은 직접 찾아나섰다라고 대답한데서 유래된 것이 '컬럼버스의 달걀'입니다. 즉, 컬러버스의 달걀은 한번 보고 나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지만, 그 첫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행력에 대한 얘기도 되겠지만...)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는 컬럼버스의 달걀과 같이 '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invisible 것을 볼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즉, 상상력의 부재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상상력이 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린이날을 앞둔 현 시점에서 더욱 반성을 해야합니다. (다시 교육 문제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 요리비법이나 무술고수를 찾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자신의 수준은 전혀 모른체 무슨 '비법'만 찾으면 바로 레벨업이 되는 것만 같은 그런 엉뚱한 상상력만 키우고 있습니다. 옆에 보이는 모든 평범한 것들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비법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한 비법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것을 깊이 관찰할 수 있고 그 내면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비법을 찾는 것보다 더 빠른 길입니다. 말콜 그래드웨의 <아웃라이어>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영역에서 10000시간이라는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도 않고, 그저 비법만 얻어면 뭔가 만들어낼 수 있고, 뭔가 이룰 수 있을 것만같은 그런 어리석은 분위기를 버리는 것도 현재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벌써 쓸모없이 허비한 시간을 아쉬워하면서 똑같은 시간을 같은 식으로 허비하고 계실 건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전략이나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올바른 철학과 문화가 필요합니다. 원천기술도 부족한 것이 맞지만, 이것은 또 어떻게 하다보면 얻을 수가 있지만, (에전처럼 국가 5개년계획이나 BK21처럼 밑빠진 독에 돈을 부어넣다보면 어쩌다 얻어 걸릴 수도 있는 거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바로 정립된 철학과 문화가 없이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개발한다고 해서 세계를 선도할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또, 남이 만들어놓은 길만 따라갈 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도전정신이 부족한 것도 안타깝습니다. 이도 컬럼버스의 달걀이 주는 교훈입니다. 컬럼버스가 계란의 끝부분을 깨고 세우니 우리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라고 아우성을 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컬럼버스에 앞서서 대담하게 계란을 깨뜨릴 그런 용기를 가지지 못했는데 어떻게 계란을 세울 수 있을지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토마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것도 현재 갖혀진 틀 속에서 안일하게 개선하고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깨어부수고 또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병아리가 알을 스스로 깨지 못하면 태어날 수 없듯이, 현재 우리를 보호해주는 그런 틀을 깰 용기와 도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특히, 젋음과 패기를 가진 자들에게... (물론, 그런 젊은이들이 굶지는 않도록 보호해줄 수 있는 지원도 필요하지만...) 저도 이제 30대 중반이지만, 더 어릴 적에 용기와 도전이 없었고 지금도 도전과 용기가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저보다 조금이라도 더 용기가 있는 분들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침묵의 교실 또는 사육... 이라는 것도 떠오른 생각이지만... 패스

 이공계를 다닌 사람이라면, 수학에서 말하는 선형, 연속, 스무드/스, 미분가능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모두가 알고 동경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움은 비선형에서, 불연속에서, 꺽인 지점에서, 그리고 미분불가능한 지점에서 태어납니다. 여러 괘변을 늘어놓았지만,... 본 것에 만족하지 말고 (물론 그런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꿈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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