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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어리석은 자들이 오용하지만 민주화의 숭고함은 절대 훼손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현재 민주주의가 완벽하다는 의미도, 더 나은 체제가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민주화는 그 자체로 숭고하다는 뜻이다.

민주화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정치사회사적인 의미는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나올 것이다. 나의 옅은 지식으로 민주화는 접근권의 개방이라 생각한다. 정치에서 민주화는 일부 특권층이 아닌 모든 자격을 갖춘 시민들이 정치/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얻은 것이고, 지난 대선에서 국민을 현혹시킨 경제민주화는 모든 대중들의 음식(부)에의 접근권, 즉 기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같은 식으로 기술의 민주화는 기술, 이 글에서는 PC/모바일 또는 인터넷의 접속권을 뜻한다. 누구나 불평등없이 그리고 제한없이 인터넷에 접속해서 정보를 찾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것이 이 글에서 말하는 기술의 민주화다.

일전에 ‘해커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해커스는 디지털 컴퓨터 (메인프레임 등)이 처음 학계를 중심으로 전파되던 시절부터 PC가 번창했던 1970년대부터 8~90년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한 것은 1970년대 MIT (맞을 거다)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초기에 컴퓨터가 대학교에 설치됐을 때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다. 전담 직원들만 겨우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컴퓨터를 만지는 것은 상상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초기 해커/긱들은 직원들이 퇴근한 밤 시간을 이용해서 컴퓨터에 접근해서 초기 운영체계, 컴파일러, 응요프로그램 등을 만들었다. 요즘도 여전히 사용하는 많은 개념들이 그 천재 해커들의 열정의 산물이다.

1970년대 컴퓨터는 비싼 장비였고 희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는 이는 소수의 특권층만이 가능했다. 정치에서 일부 귀족만이 참정권을 독식하거나, 경제에서 부자들만이 빵/땅을 모두 소유해버리는 것과 같이, 기술/컴퓨터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특권층이 존재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당시에 컴퓨터라는 존재 자체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그런 특권층 또는 엘리트들에 의해서 컴퓨터 산업이 태동했고, 현재 컴퓨터 체계가 완성됐다.

그러나 오늘날은 최소 전기가 통하는 전세계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PC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게임 콘솔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스마트워치나 웨어러블기기까지 포함한다면 더 넓은 사용자들이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다. 기술의 민주화를 이룬 셈이다.

물론 기술의 민주화 또는 대중 접근성을 이룩했다고 해서 모든 대중들이 기술에 골고루 접근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편적으로 웹의 컨텐츠를 만드는 것을 예로 들자면, 100명의 사용자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실제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10%정도에 불과할 것이고 그리고 대부분의 컨텐츠는 단 1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나머지 90명은 그저 그렇게 만들어진 컨텐츠를 소비하는 층이다. 그러나 대중화를 통해서 90명 중에 누구나 10명 또는 1명이 되는 통로는 마련됐다는 점에서 기술이 민주화됐다고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90명이 만들어내는 like, 더 수동적으로 PV가 10명 그리고 1명이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낸 원동력되 되기도 한다. 지금 적고 있는 글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내가 굳이 이 글을 적어서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공유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기술의 발전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민주화된 대중에 의해서인가?라는 의문이다. 초기의 천재 엘리트들이 이룩한 성과와 오늘날 대중이 이룩한 성과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향후 이 분야의 발전은 누구에 의해서 이뤄질까?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초기 엘리트들은 어쩌면 우리와 너무 동떨어진 존재인 듯하니, 요즘 인물로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나 구글의 페이지나 브린 같은 인물들이 현재 기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수많은 창의적인 컨텐츠를 만들어서 버즈시키는 대중들이 기술을 주도하는 것일까? 이 시대의 이 기술의 동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엘리트들에게 있다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대중에게 있다라고 말하기도 참 어렵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엘리트가 필요하고, 엘리트도 대중이 없이는 엘리트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이 글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며칠 전에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터넷에 접근하는 기술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고, 전에 읽었던 해커스의 천재들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래서 엘리트와 대중의 역할에 대해서 궁금했고, 이 궁금증에 대한 오픈 퀘스천을 던지려고 글을 적었을 뿐이다.

기술의 엘리트와 민주화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것이 좋은 생각거리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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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개인들에게도 큰 상처를 줬지만 대한민국 전체에도 또 큰 상처를 남겼다. 사고 당사자의 트라우마, 가족친지들의 슬픔, 그리고 국민 전체의 불안감... 지금은 모든 살아남은 자들의 무덤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글을 적어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있지만 기록은 남겨야겠기에 생각을 정리한다.

사건이 경과하면서 계속 눈에 띄는 것은 언론들의 바보짓이다. 대형 오보가 하루를 멀다하거 터져나온다. 기본적인 사실확인이나 의견에 대한 비판/의심이 없이 그저 누군가 불러주는대로 적어나가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냥 속도 경쟁에서 이기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치킨런을 보는 듯하다. 그 끝은 낭떠러지일 뿐이다. (굳이 따로 오보를 정리하지는 않겠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각종 소셜미디어가 생겨나면서 언론에 위기가 닥쳤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래도 10년 20년을 지내면서 언론들은 그들 나름의 생존 전략을 세워서 어쨌든 연명은 하고 있는 상황이다. 생존 전략이라는 것이 한심하게 언론 본연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전파되는 가십성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실시간으로 스팸질하고 뿌리는 것이 다 이기는 하지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분명 기성 언론에 큰 충격을 줬지만 언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언론, 적어도 대한민국의 언론은 사망선고가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와 같은 외부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론 내부에서 스스로의 생존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명박근혜를 거치면서 언론이라 불리던 집단들은 스스로 찌라시가 되어가고 있다.

정부나 대기업에서 불러주는 홍보 자료를 받아쓰기해서 마치 기사인양 뿌려대고, 포털에 올라오는 실시간 이슈어만 수집해서 가십을 재생산하는 것이 언론이 됐다. 이제는 심층취재, 아니 일반 취재 능력도 상실한지도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비판하고 깊이 파고드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부당해고했고, 이제 그들은 스스로의 살 길을 찾아서 대안언론을 만들었다. 이번 사건을 지나면서 기성언론들의 몰락과 대안언론들의 성장이 대비될 것이라 본다.

그 전에도 많이 있었고, 촛불집회 때의 아고라도 있었고, 천안함이라든가 여러 사건 사고들을 통해서 기성언론들의 안이함과 대안언론의 필요성을 실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성언론들의 카르텔이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더욱더 견고해졌다. 종편이라는 새로운 숨통도 터줬고 잠재 경쟁자들을 여러 수단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래도 시대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소소한 사건들에서는 빈틈이 잘 눈에 띄지도 않고 위장해서 감춰버리면 되는데, 크고 긴박한 사건 속에서 빈틈은 여실해 노출된다. 기성언론들의 오보행진은 마치 바보들이 낭떠러지는 향해서 브레이크없는 자동차를 가속하는 것을 보는 듯하다. 그러는 사이에 대안언론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된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뉴스타파나 아프리키TV의 개인 방송의 신뢰도나 영향도가 기성언론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 시작은 지금이라고 말해도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누군가 대한민국 언론사를 회고해본다면 지금 이 사건이 물줄기가 확 바뀐 시점이라는 것을 확인해줄 거다.

** 슬픔 속에 잠긴 이들을 위해서 사건의 명칭은 별도로 적지 않습니다.
** 다른 생각들도 많았지만, 당장의 생각 흐름에 맞게만 글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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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후배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오랜만에 지도교수님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고 왔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2학기 중에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학부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공학입문 수업 시간에 특강을 한 번 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수업시간이 월요일이라서 (주말에 고향집에 갔다가 월요일에 수업참여하는 일정)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생이 아닌, 아직 산업공학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학부1년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데이터마이닝에 대한 내용을 강의하면 자칫 너무 어려운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내가 스스로 비판하는 내용없는 수박겉핥기식의 내용만 전달할 것같아서 망설여집니다. 인터넷 트렌드를 정리해서 발표하기에도 학부 1년생들에게는 적합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때마침 국책사업인 BK에서 산업공학과가 홀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했었고, 학과 내에서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내용으로 발표하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학부 1년생들에게 적합한 내용이 아닙니다. 아직 산업공학을 맛도 못 본 이들에게 산업공학은 망했다라는 식의 비판을 들려주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시대가 변했는데 여전히 전통적인 산업공학을 고수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쒸우는 행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산업공학이라는 마성에 깊이 빠지기 전에 현실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그네들의 일생에 도움이 될 것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발표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제목은 짧게 'Survival'로 정했습니다. 제 블로그를 오랫동안 보신 분들은 저의 2013년의 목표를 '살아남기'로 정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살아남기'라는 말이 어쩌면 포스트 테일러 시대를 살아가는/살아갈 세대들에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얘기해주기에 적합한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입에는 저의 학부태생, 현재 사는 곳, 직장 및 업무에 대한 설명입니다.) 피카소가 말했듯이 모든 창조의 시작은 파괴입니다. 산업공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을 학생들에게 산업공학을 철저히 부숴뜨려주는 것은 그들 나름의 산업공학을 정립하는데 필수적이라 생각합니다.

산업공학과는 잘 알다시피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과 포드의 대량생산이 시초입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미덕이었고, 그래서 규격화 효율성 최적화라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1~20년 사이의 변화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그런 전통적인 산업공학의 키워드가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에 삽입된 내용은 교수 or 삼성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부실대학도 퇴출되고 어쩌면 국가부도도 현실화되는 시대에 살면서 철밥통이라는 교수나 공무원도 안전한 직업이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삼성도 10년 후에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런 산업화의 테일러 시대를 종언시킨 동인은 잘 알듯이 인터넷, 모바일, 그리고 Bitom (참고. BITOM의 세계로)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터넷은 오프라인에서 디지털화가 가능한 것들 (음악이나 영화와 같은 컨텐츠, 유통 및 금융 등)을 파괴했습니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이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과 프리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모바일은 인터넷의 디지털화를 진일보시켰고, 우리의 생활패턴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Internet of Things, 3D 프린터, 팹랩, 공유경제 등에서 보여줬던 비트화의 재아톰화는 전통 산업의 모습을 완전히 탈바꿈시켰습니다. 대량생산 대샹소비가 아닌 커스터마이제이션과 오픈소싱으로 대변되는 탈테일러시대에는 더이상 규격이나 최적화가 아니라 다양성과 통합이 더 중요한 미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탈테일러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몇 가지 힌트는 주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다양한 활동에 해보라는 조언입니다. 특히 대학생 시절에 (요즘은 알바에 모든 시간을 빼았기지만) 다양한 문화 예술활동을 해보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나중에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삶에 균형을 주는 안식을 제공해줄 수 있고, 또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서 그 속에서 불편한 점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개선해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테슬라 모터스의 Elon Musk와 아마존의 Jeff Bezos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상세 설명 생략) 어렵겠지만 인생의 목표를 정할 때 가장 먼저 당위성 (have to)를 생각하고, 다음으로 어떻게 (able to), 마지막으로 무엇을 (love to)를 생각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무엇을에서 시작하면 결국 큰 그림없이 그저 바쁘기만 할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어렴풋하더라도) 목표를 정했다면 그것과 관련된 지식과 트렌드를 꾸준히 축적하라고 조언합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다음이나 네이버의 탑 화면에 피쳐링된 기사정도는 읽을 것입니다. 간혹 특정 분야 (예, IT)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섹션탑의 기사들을 읽어볼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를 정했다면 누군가가가 피쳐링한 그런 기사들 뿐만 아니라, 하루에 올라오는 모든 기사 (전체기사)를 훑어보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종합적이면서도) 선별적으로 습득해야하고, 또 국내 기사뿐만 아니라 외신 (IT쪽은 왜곡이 덜 심하지만, 최근에는 특정 대기업 또는 그들의 경쟁사 관련 기사에서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기사들도 확인하고 전문 블로그/매체의 기사들도 꾸준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RSS를 구축하는 것도 좋지만, 잘 만들어진 큐레이션 피드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트렌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재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서 관련된 서적을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에 일본의 어느 상점 입구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적어도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진학한 학생들이라면 대를 이을 가업이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면 경영학이나 해당 기술 관련 학과에 진학했어야 했고, 잘 나가는/유명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면 또 그것에 맞는 진로를 선택했을 건데, 산업공학과는 가업과는 많이 무관한 학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는 조언도 해주고 싶었고, 그것보다는 아직은 대학생으로 여전히 부모님께 기댈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렇기에 부모님을 담보로 두고 다양한 삶에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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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두달이 남았기 때문에 내용이 조금 변경될 수는 있지만, 큰 틀에서 바뀔 것같지는 않습니다. (2013.11.04에 수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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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적은 '대한민국의 페이스북 사용자 연령분포'에서도 보여지듯이 참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전체 인구 대비로는 20%정도 밖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젊은층은 대부분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가입만하고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겠지만, 페이스북을 통해서 수많은 연결이 완성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밤에도 문득 '어느 순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 상에 존재하는 것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페이스북 친구가 500면이 채 되지 않으니 모든 지인들과 친구를 맺은 것도 아님은 확실하지만, 순간순간 아는 사람들이 여기 다 있네라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간혹 전혀 모르는 사람의 프로필을 볼 때 뮤츄얼프렌드에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을 보거나 전혀 엉뚱한 두 사람이 연결되어있는 것을 보면 세상 참 좁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페이스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이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이스북 상에 존재하지 않는 친구의 안부는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고 잊혀지는 것같습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간 관계가 확장될 거라는 기대를 많이 가졌습니다. 실제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서 예전에는 모르는 던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멀리 떨어져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구들의 소식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또 우리는 페이스북 상에서만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페이스북에 매일 사진이나 글귀가 올라오는 그는 잘 지내고 있나보다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그 사람의 진짜 안부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라이크 한 방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에서 아날로그 감성은 사치에 불과합니다.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공유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는데, 현대인들은 '나는 페이스북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이상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바타만 존재할 뿐입니다.

(2013.06.02 작성 / 2013.06.10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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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사고

Gos&Op 2013.05.23 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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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org에서 세계의 석학 150명에서 '인터넷이 당신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꿨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들이 짧은 답변/에세지를 엮은 책 '우리는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각자의 전문분야 및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변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답변은 크게 5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는 답변이 다수를 포함하고 있지만, 역으로 부정적으로 바꿨다는 답변도 눈에 띕니다. 그 외에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양상은 달라졌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답변들도 있고, 뭔가 바뀐 것같은데 그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아니면 변화시킨 것이 아닌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는 불가지론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그냥 자신의 환경에 맞게 변형시켜서 답변한 조금 동문서답형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도 스스로에게 '인터넷이 나의 사고방식에 어떤 변화를 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봤고, 또 블로그에 공개할 글이 없어서 급하게 이 질문에 짧게 답변을 해볼까 합니다.

엣지의 질문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인터넷, 사고방식, 그리고 변화입니다. 먼저 사고방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이나 중고등학교 10대 시절에는 별로 사고에 대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맹목적 주입식 교육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 때는 별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때 어떤 식으로 사고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도 별로 내 사고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같고, 20대 중반 이후에 비로소 제대로된 사고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던 것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비판적이 되어가는 기현상을 보인다는 점이 함정이긴 하지만...

그런데 제가 인터넷을 처음 사용한 때가 대학을 입학한 1996년부터이고, 그해 겨울 HTML을 공부해서 홈페이지를 만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이후 본격적으로 (반항적이든 순응적이든) 사고를 하기 시작한 시점은 20대 중반은 시기상으로 2000년대 초반이고 이때는 이미 인터넷이 우리 생활 저변에 확대된 이후입니다. 즉, 저의 입장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기 전에는 사고에 대한 생각이 없었고 사고에 대한 생각을 가진 이후에는 이미 인터넷이 보편화된 시점입니다. 그래서 사고 또는 의식 방식에 대한 인터넷의 영향을 명확히 구분짓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위의 엣지 질문에 답변했던 세계 석학들은 대부분 40, 50대 또는 그 이상입니다. 일부는 그들이 젊었을 시절, 인터넷 태동기 때부터 인터넷을 사용한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그들이 사회적 지위를 갖춘 3~40대가 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비판적 사고를 하는 20대 (이전)는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 이후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한 이후에 인터넷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이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고 체계가 갇춰진 이후에 인터넷이 소개된 사람들과 인터넷이 보편화된 이후에 사고체계가 갇춰진 사람 사이에는 인터넷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1970년대에 태어난 제 또래 세대는 완벽한 인터넷 네이티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터넷 이주자도 아닙니다. 저와 비슷하게 어릴 적에는 인터넷이 전무했고 (PC통신은 있었지만), 철이 들고나서 보니 인터넷이 보편화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보다도 어린 세대들은 성장하던 10대 때 또는 태어난 그 시점에 이미 인터넷이 보편화를 넘어 생활화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 네이티브들에게 '인터넷이 사고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느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본투인터넷 세대들은 인터넷이 그들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준 것이 아니라, 인터넷은 디폴트로 주어진 환경에서 그들의 사고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인터넷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줬느냐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주어진 인터넷을 이용해서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숙명입니다.

(2013.05.21 작성 / 2013.05.23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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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정헌법 1조.

Gos&Op 2013.04.18 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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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인터넷 글을 읽어보면 간혹 수정헌법 1조가 자주 언급된다. 여기서 수정헌법이란 미국의 헌법을 뜻한다. 미합중국 건립시에 작성되었던 제헌헌법이 시대의 요구사항에 맞춰서 몇 차례 수정이되었는데, 그렇게 수정된 헌법을 수정헌법이라 부른다. 특히 수정헌법 1조가 '표현의 자유' 때문에 자주 언급된다. (참고로, 대한민국 헌법 1조는 지난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 뇌리에 깊이 들어왔을테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고 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최근에 읽고 있는 '불편한 인터넷'에서 인터넷 상에서 발생하는 프라이버시, 평판, 표현의 자유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고, 제프리 스톤이 적은 제 10장 '프라이버시, 수정헌법 1조, 인터넷'이라는 챕터에서 수정헌법 1조와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전부터 수정헌법 1조는 표현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위의 책을 읽으면서 수정헌법 1조의 자세한 내용/표현이 궁금해져서 찾아봤다.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또 의회는 언론, 출판의 자유 또는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수 있는 권리와 고충 처리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출처: 위키피디어

위의 위키 내용을 토대로 보면 수정헌법 1조는 단순히 표현의 자유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을 자유를 포함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자유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듯하다. 즉, 국가 또는 의회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 종교 선택, 표현 언론 및 출판, 집회, 청원 - 자유를 강제하거나 규제할 어떠한 입법활동을 금하고 있다. 물론 헌법이라는 것이 형을 집행하기 위한 것보다는 기본 원칙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것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종교나 표현,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다.

인터넷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소개한 '불편한 인터넷'을 자세히 읽어보면 자유의 범위와 한계, 더 정확히 말하면 제한의 예외사항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지난 5년을 보내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합중국의 수정헌법 1조를 매우 부러워했다. 어쩌면 앞으로 5년도 그런 시간이 될지 아닐지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벌써 이상한 낌새가 많이 포착되고 있다. 예, 인터넷에서 박근혜 후보 비방 40대 실형 선고)

(인터넷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무제한의 허용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는 있다. (강제력에 의한 자기 검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터넷에 올린 글이 표현의 자유에 해당되는지를 판단하는 몇 가지기 기준이 있다. 먼저 사실을 적시하는가?의 여부다. 허위/거짓 내용을 올리면 표현의 자유에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는 타인의 프라이버시나 명예훼손 여부도 기준이 될 듯하다. 사실을 말하더라도 명예훼손이 될 수 있는 판례들이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표현의 저속성도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사실/정보의 취득의 정당성도 중요하다.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는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공익을 위한 뉴스의 가치가 있으면 표현의 자유가 좀더 관대해진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으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 더 자세한 사례가 나온다. 물론 미국 얘기다.ㅠ)

자기검열을 극히 싫어하고 그래서 입이 막히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적법한 수단과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향후에 문제의 소지가 적다/없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더 그렇다. 슬픈 현실이지만, 잘 알고 대처해야할 듯하다. 제한을 알아야지 그 내에서 또 다른 창의를 발휘할 수 있다.

(2013.04.15 작성 / 2013.04.xx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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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매일 보잖아요.

Gos&Op 2013.03.29 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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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학 선배를 만났습니다. 몇 해 전에 선배도 제주도에 잠시 살았었는데 그때는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주에 일이 있어서 내려온 김에 잠시 얼굴을 봤습니다. 30분 정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선배가 다른 곳에 볼 일이 있어서 헤어졌습니다. 헤어지면서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라고 배웅 인사를 했는데, 선배는 '우리 매일 보잖아'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우리 페이스북 친군데..'라며 말을 끝냈습니다. 그렇게 선배는 떠났지만 마지막 말은 계속 머리 속에 남습니다.

기차나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인간들의 물리적 이동 거리가 길어졌습니다. 가능한 이동거리는 길어졌다지만 그래도 자주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신이 발달하고 전화가 보급되면서 적어도 목소리를 통한 심리적 거리는 단축되었습니다. 한동안 미국에 머물면서도 장거리 국제전화 (당시 인터넷 전화가 처음 보급되던 시절임)를 통해서 일주일에 한번꼴로 한국에 전화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터넷을 통한 심리적 거리가 더 짧아졌습니다. 페이스북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릴 수도 있고, 페이스타임과 같이 화상연결도 쉽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떨어져있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어서 또 그렇게 물리적으로 언젠가는 만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이미 페이스북을 통한 연결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나름 인터넷 회사에 다니고 IT트렌드에서 빠싹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사고에 빠져있나 봅니다.

이렇게 떨어져있는 가족, 친지와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전화와 인터넷의 최대 장점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목소리와 디지털 신호의 교환으로 직접 마주보며 얘기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제주도에 나와있어서 교통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공향 집에 계신 부모님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월요일 저녁에 짧은 전화통화가 유일합니다. 그렇게 연결되어있지만 접촉은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대학을 진학하면서 학교가 달라져서 이제 연락이 끊긴지 오랩니다. 대학 친구들도 모두 각자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각자의 가정을 꾸려서 만날 기회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인터넷에 가끔 올라오는 글이나 사진 이상의 연결은 끊어진지 오랩니다. 가끔 결혼 등의 소식만 이메일로 받습니다. 카톡 대화방에서 많은 수다가 이뤄지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는 카톡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수다에도 참석한지가 참 오래되었습니다. 옛 친구들은 그저 인터넷에서 연결되고, 저는 저 나름대로 현재 생활에서 부대끼는 동료들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매일 보잖아'라는 그 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 참 좋아졌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또 세상 왜 이렇게 각박해졌지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듭니다. 이미 여러 기사나 칼럼들이 기술을 통한 연결과 기술을 통한 단절을 얘기합니다. 저도 그 혜택과 피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맞아요. 우리 매일 보잖아요. 그래도 우리 좀 더 자주 만나요."

(2013.03.21 작성 / 2013.03.x29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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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찾기

Gos&Op 2013.02.14 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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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종욱 찾기'

영화 '김종욱 찾기'는 아련한 기억 속의 첫사랑의 연인인 김종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의 일상 속에도 그런 김종욱같은 사람이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김종욱을 첫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글의 기본 내용은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결정적으로 글로 표현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모든 전문가가 전문가는 아니다'라는 문장이 문득 떠오른 때다. 그렇다. 이 글에 말하는 김종욱은 나만의 전문가를 의미한다. 그저 유명하고 권위가 있는 인물이 아닌 내 주변의 전문가를 찾는 프로젝트가 바로 코드명 김종욱이다. (물론 실제 프로젝트가 진행중인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어느날 우리에게 찾아온 이후로 다양한 서비스들의 역습을 경험했다. 1996년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다. 그 전에 OT기간동안 포스비라는 학내 사설BBS에 계정을 먼저 만들었던 것같다. 고퍼는 사용해보지 못했지만, 유즈넷은 가끔 사진이나 폰트를 찾는다고 이용했던 적도 있다. 지난 달 서비스를 종료한 나우누리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1학년 겨울 방학 즈음해서 HTML을 배워서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에 푹 빠지기도 했고 JAVA라는 언어를 배운답시고 책부터 구매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홈피에 방명록을 붙인다고 CGI소스를 다운받아서 설치했던 것도 반평생 전의 이야기다. 그러던 중에 요즘도 많이 사용하는 웹메일이 등장하고, 웹기반의 커뮤니티와 지식서비스가 나왔고, 또 블로그라는 개인미디어는 홈피를 집어삼켰다. 웹2.0이라는 마케팅 용어 이후로 지금의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의 서비스들이 인터넷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을 다닐 때 만들어졌던 인터넷 1세대 그리고 대학원 이후에 나온 인터넷 2세대가 현재는 공존하고 있다. 인터넷에 다양한 서비스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길어졌다.

인터넷의 많은 서비스들의 핵심은 데이터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 메타/통계 데이터 등)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있다. 단순히 컴퓨터 화면/브라우저상에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아니라, 사용자들의 만족효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데이터의 정렬에 관한 것이다. 검색에서는 랭킹이라 불리고 다른 서비스에서는 추천이라고 불린다. 사람이 직접 관여해서 운영되는 경우도 존재하고, 알고리즘에 의해서 자동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많은 서비스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차별화를 시도하지만, 결국에는 이 랭킹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로 집결된다. 구글은 페이지랭크를 선보이면서 인터넷의 절대강자가 되었고, 페이스북은 엣지랭크를 선보임으로써 유용한 사용자경험을 제공했고, 아마존은 개인화 추천이란 것을 선보였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로 랭킹을 제대로 해결한 기업들이 결국 탑랭크되었다. 역사가 말해주고 또 말해줄 것이다.

랭킹. 문제는 참 단순한데 답은 꽤 복잡하다. 인터넷의 절대 반지다. 많은 사람들이 답을 구했지만 손에 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구글이 그랬고, 페이스북이 그랬고, 아마존이 그랬다. 그러나 아직은 완벽하지도 범용이지도 않다. 그래서 여전히 희망이 있고 새로운 웹도라도 (웹 엘 도라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다. 그저 웹 세상에서는 구글이 평정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구글이 그저 컨텐츠와 집단지성을 이용하고 있을 때, 새로운 경쟁자들은 컨텍스트에 주목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트위터는 시간을 공략했고 페이스북은 인간을 공략했다. 포스퀘어가 공간을 지배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공간정보는 그냥 범용이 되었다. 아, 소위 지식서비스라 부르는 Q&A도 구글의 거대한 알고리즘 틈 사이로 사람을 집어넣은 것이다.

랭킹이나 추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까지 사용되는 방법은 구글과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집단지성, 지식iN으로 대표되는 전문지성 (일단, 답변자들이 전문가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대표되는 지인지성이 있다.

집단지성. '많아지면 달라진다'는 말 (클레이 셔키의 책 제목)이 있다. 많은 사람이 선택을 했다면 '좋다' 아니 적어도 검증되었다라고 볼 수가 있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한 곳이 구글과 아마존이다. 구글은 다량의 문서 네트워크에서 암묵적인 인커밍 허브를 찾아내는 방법을 활용해서 이를 페이지랭크라 불렀다. 아마존은 상품 구매자의 평점을 활용해서 개인화 추천 시스템을 만들었다. 특히 아이템 기반의 관련 컨텐츠는 이후 유튜브의 관련 동영상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외에 이베이의 판매자 평판 시스템도 명시적 집단지성을 잘 활용한 예다. 문제가 있으면 대중에게 물어보면 된다. 각자의 능력과 지식은 미흡할지 모르나 모이면 정답에 가까워진다. 물론 문제의 답이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일반적으로) 가정 하에 그렇다.

전문지성. 요즘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그냥 구글에 검색해보거나 트위터/페이스북에 질문을 올리지만, 예전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문가를 찾아가는 거였다. 물론 유명한 전문가를 우리가 직접 만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치명적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개념적으로는 그런 만남의 가능성을 높여놓았다. 아니, 우리 모두가 아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재야의 고수들을 만날 수 있다. 개념적으로 전문가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사받는 시스템이 지식iN 또는 Q&A 서비스다. 물론 현재 인터넷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지만 사이비도 많다. 특히 마케팅/홍보로 오염된 경우가 많다. 어쨌든, (신뢰할만한) 전문가가 있다면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다. 아프면 인터넷에서 검색도 해보지만, 병원을 찾는 이유도 가운을 입은 의사가 전문가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진짜 천재를 만나 고급의/정확한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집단지성보다 낫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그런 이를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전문지식에도 집단지성이라는 투표수나 공감수 등을 믹싱한다.

지인지성. 사실 일반 대중에게 묻거나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보다 더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엄마한테 물어보는 거다. 엄마가 갑이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만으론 부족하기 때문에 주변의 친구들의 조언을 듣는다. 친구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또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많이 알기 때문에 전문지식은 아니지만 친밀한 답변을 해줄 수가 있다. 나에 대한 컨텍스트 정보가 없는 전문지식이나 대중의 지혜가 쓸모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너무 사소해서 전문가나 대중들에게 묻기가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물론 검색하면 대부분 나오지만… 구글은 신이니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이를 파고든다. 페이스북의 엣지랭크가 친구와의 친밀도 점수를 활용하고 있다.

집단지성은 대중성에 기반을 두고, 전문지성은 객관성에 기반을 두고, 지인지성은 친밀성에 기반을 둔다. 최근의 서비스들은 이들 모두를 잘 활용하는 듯하다. 어떠한 형태로든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있다면 별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에 의해 검증된 지인의 진솔한 전문지식을 답변으로 얻는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집단지성이라는 대중적 검증과 전문지성이라는 신뢰하는 출처, 그리고 지인지성이라는 개인적 친밀감을 더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래서 김종욱이 필요하다. 나와 아는 사람 중에서 검증된 전문가 김종욱을 찾는다. 프로젝트 김종욱. 참 복잡할 것같다.

(서론은 길지만 본론과 결론이 짧은 것이 내 글의 특징이다.) 검색이나 추천에서의 랭킹/순위는 다른 말로 관련성이라 표현할 수 있다. 내가 입력한 키워드와 나의 처지에 맞는 검색결과, 그리고 나의 개인적 취향에 맞는 제품/컨텐츠를 추천하는 것이 관련성이다. 그런데 이 관련성은 3가지로 세분화된다. 

  • 첫번째는 질문자 (나)와 답변자 (너) 사이의 관계다. 지인 네트워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관심사로 묶인 관계일 수도 있다. 같은 물건을 구입했던 사람, 같은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 같은 기분/처지를 공유하는 사람 등등의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이 온다. 
  • 두번째는 나/질문자의 관심사다. 답변은 나의 관심에 맞아야 한다. 아무리 전문가의 답변이더라도 또는 99%의 대중이 선택한 것이더라도 나 개인의 관심사와 맞지 않는다면 전혀 쓸모가 없다. 관심사는 평소 누적된 나의 행동에서 얻을 수 있다. 평소에 검색했던 검색어목록, 작성했던 글, 자주 읽는 기사, 또는 자주 가는 곳 등의 평소의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나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답변자의 관심사도 파악이 되어야 한다. 나의 관심사는 질문의 컨텍스트를 제공해주지만, 답변자의 관심사는 답변자의 전문성을 확보해준다. 
  • 세번째는 너/답변자의 관점이다. 관점은 다소 불명확한 개념이다.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답변만으로 부족하다. 답변자가 어떤 관점으로 그런 답변을 내놓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답변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예를들어, '강정 해군기지의 문제점'이라는 질문에, 찬성론자는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부작용을 축소시켜서 답변을 줄 것이고 역으로 반대론자는 필요성/당위성보다는 환경파괴나 공동체파괴 등의 극단적 부정성을 강조하는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관점도 어필이 되어야 한다. 답변의 뉘앙스가 나의 관점에서 벗어난다면 답변의 만족도가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질문자의 관점이 나와 똑같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답변을 주는지가 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전문성의 가진 지인이 나의 관점에 맞는 답변을 해주면 베스트케이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전문가를 김종욱이라 부르기로 했다. (여담. 회사 내에 동명의 인물이 있긴하다. 과연 그가 답을 하사해주고 떠날 것인가?)

프로젝트 김종욱의 결과물이 소셜Q&A 서비스인 Quora나 Aardvark 등과 닮았다. 그러나 Q&A 서비스는 온디멘드 On-Demand다. 즉 누군가 질문을 하면 그제서야 지인 전문가가 답변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 김종욱은 Q&A보다는 검색을 염두에 두고 있다. 즉, 지금 내게 필요한 정보/답변을 지인 전문가의 예전 글에서 찾아주는 것이다. 물론 현재 변화된 상황에 맞는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건 검색이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래도 비동기식 Q&A가 줄 수 없는 즉시성의 장점이 있다. 현재가 지나면 현재의 관심사도 없어진다. 아드바크의 초기 조사에서 응답시간이 수분 내로 매우 짧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시간, 며칠 이후에야 답변을 얻는 경우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인터넷, 특히 모바일 세상에서 사람들은 참을성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 수초의 시간도 길다. 최근 페이스북이 그래프서치를 선보였다.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결국은 지인전문가 김종욱이 아니라, 김종욱이 전해주는 정보에 관심이 가는 것인 걸까? 영화에서도 결국 김종욱이 아닌 새로 만난 인연과 연결이 되었다. 김종욱은 구실일뿐...

(2013.02.02 작성 / 2013.02.14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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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개발 방법론

Gos&Op 2013.01.21 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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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신규 서비스를 위한 기획회의에 참석한 직후에 적고 싶었던 글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용자들을 만족시키는 좋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글을 적고 싶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일반론이지만 정리해두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처음부터 제대로된 컨셉/기획안을 만들어서 빈틈없는 개발을 하거나 빠르게 개발하고 사용자들의 반응에 맞춰서 빠르게 수정보완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적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문장이외에 덧붙일 내용도 없었기에 그냥 글을 적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가지 더 생각나서 글을 완성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새로운 방법론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기획중심의 개발과 개발중심의 기획을 확장/변형한 방법론입니다.

성공하는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요? 기획 또는 개발을 '설계'라는 용어로 아울러서 말하겠습니다.

기획중심의 설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시대의 트렌드와 사용자들의 니즈를 잘 파악해서 그 트렌드와 니즈를 파고드는 서비스의 컨셉을 정하고, 그 컨셉에 충실한 완벽한 서비스를 기획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기획이라는 것이 그 기획대로만 개발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같지만, 말그대로 기획이 완벽했다면 개발 및 운영에 문제가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보통의 기획서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실패하는 많은 기획서를 보면 대충 리소스를 산정해서 서비스 개발에 대략 10주 걸리고, 테스트하는데 2주면 되기 때문에 3달 후에는 서비스를 런칭할 수 있다 식으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실제 개발에 착수하면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이 발생하고 리소스는 늘 부족하고 개발기간은 늘 촉박하고 그래서 대강 나온 서비스를 제대로 테스트도 하지 않고 런칭을 합니다. 그러면 런칭 직후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고 초기의 버그는 사용자들을 떠나게 만듭니다. 요즘처럼 대체제가 많은 시기에는 그런 초기의 서비스 불만은 치명적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서비스들은 기획에서부터 시작한 것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기다려줬고, 그래서 현재는 나름 성공/정착한 서비스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획에서 시작한 서비스들이 제대로 성공하는 경우를 못 봤습니다.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기획안을 못 만들면서도 우리는 늘 관념적으로만 이런거 좋겠지?라고 생각하고 불완전한 기획에서 개발에 들어가고 서비스를 런칭하고 그래서 실패하고 맙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획이 완벽하면 서비스는 성공합니다. 제품의 개발주기가 몇년씩 걸리는 산업에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개발중심의 설계.
두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적당한 감을 가지고 초기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일부 사용자들에게 테스트를 받아보고 보완해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서비스를 런칭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이런 기능/서비스가 필요해라고 말하면 그걸 바로 구현해서 적용해보고 사용자들이 꾸준히 사용하면 기능을 더 개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없애거나 처음부터 다시 디자인/구현해서 런칭을 하는 것입니다. 구글의 성공 이후에 영원한 베타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지금 가장 많이 사용하는 Gmail도 초기 몇년동안은 계속 Beta 표시를 달고 서비스가 되었습니다. 일반 사용자들은 그냥 괜찮게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베타 마크를 붙이고 서비스했습니다. 알파, 베타 마크가 사용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이해해주세요라는 그런 무언의 압력이기도 하지만, 사용자들의 반응을 보고 꾸준히 개선해나갈께요라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기획중심의 설계가 완벽한 기획이 필요했다면, 개발중심의 설계에서는 빠른 구현 및 꾸준한 모니터링이 필요합니다. 극단적으로 몇 시간에서 며칠내로 초기 버전이 구현되지 못하면 또는 초기 반응이 시큰둥하면 바로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긍정 또는 부정적인 사용자들의 (명시적/암묵적) 피드백을 얼마나 빨리 많이 수집해서, 그것들을 얼마나 빨리 수정/개선해서 차기 버전으로 만들어내느냐가 성공의 관건입니다. 초기 서비스에 버그가 있었지만 사용자들이 완전히 실망하기도 전에 며칠 또는 몇 시간 내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초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사용자들은 그 문제가 며칠 내에 해결될거다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고 나의 피드백이 바로 반영이 되는구나라는 것을 느낀 사용자는 해당 서비스의 열혈 사용자가 될 가능성도 더 높습니다. 적당히 좋은 아이디어/컨셉을 빠르게 구현해서 적용해보면서 가능성이 없으면 초기 비용이 별로 안 들었을 때 바로 접으면 그만이고, 가능성이 있으면 더 많은 리소스를 투입해서 더 나은 서비스로 발전시켜나가면 됩니다.

데이터중심의 설계.
세번째 방법은 기획과 개발의 중간 쯤에 위치하면서 개발중심의 변형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 구현하기에 앞서서 현존하는 데이터들을 모으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검색엔진에서 어느날 갑자기 특정 패턴의 검색어들이 많이 유입된다면 그런 패턴어를 처리해줄 수 있는 검색서비스를 만들어서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영화, TV프로그램, 인물 등의 다채로운 정보가 검색에서 스페셜로 노출되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검색어들이 상시적으로 많다는 것을 관찰/분석한 이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간혹 경쟁사에서 서비스를 오픈해서 따라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 기획중심의 설계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음.) 아니면 트위터에서 오프라인 번개에 대한 니즈가 급증하는 것을 관찰했다면 트위터와 매끄럽게 연계된 번개서비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트위터의 초기에 트위터를 둘러싼 수많은 독립 서비스들이 개발되어 트위터에코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데이터중심의 설계는 신규서비스의 설계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이미 런칭한 서비스의 개선에 더 큰 역할을 합니다. A/B 테스트로 알려졌듯이 새로운 기능이 사용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기존 기능과 신규 기능 사이의 버킷테스틀르 통해서 새로운 서비스에서 사용성이 더 좋으면 새로운 기능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데이터중심의 설계는 개발중심의 설계와 밀접하게 커플링되어있습니다.

경험중심의 설계.
네번째는 기획중심의 설계의 변형이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은 관념과 실제에 있습니다. 기획중심에서는 그냥 주변의 트렌드나 설문조사 등에서 나타난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이라면, 경험중심에서는 나 자신이 실제 사용자가 되어서 그 속에서 느꼈던 불편한 점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극볼할 서비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존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해서 대체제/경쟁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작년 말에 사내외에 다양한 페스티벌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글을 적었었는데, 그 속에는 기본적으로 그런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운영해보면서 스스로 불편함도 느껴보고 또 사용자들의 행동을 가까이에서 관찰해보고 그들의 불편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보고 그걸 서비스화시켜보고 싶다는 것을 염두에 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여행을 해보면서 불편한 점이나 좋았던 점 등을 경험해보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이런 게 필요할 것같고 이런 건 ROI가 안 나올 것같고 등과 같은 관념으로만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들다보면 결국 리소스는 많이 투입했는데 결과는 좋지 못한 그런 경우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실생활에서 참가해서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어떤 서비스가 진짜 필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 기업을 다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관찰해보면 그들이 인터넷과 너무 동떨어져서 생활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생활에서는 인터넷/모바일 서비스를 전혀 이용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인터넷/모바일 서비스를 기획/개발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제대로된 것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상으로 네가지로 나누어서 서비스 개발방법론이라고 거창하게 적었지만, 뭔니뭐니해도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래피드프로토타이핑 rapid-prototyping입니다. 빨리 구현해서 테스트해보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기획중심의 설계에서도 기획단계에서부터 이런저런 기능을 테스트해보고 실제 데이터를 보면서 파이널 제품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실제 서비스의 프로토타입이나 데이터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위에서 시킨 업무라고해서 끝까지 기획서만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리고 정작 기획서가 나왔을 때는 이미 트렌드는 끝나가거서 유사제품들이 시장에 넘쳐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특히 이미 성공한 제품/서비스를 가진 기업들일 수록, 후속 서비스에 대한 (대박) 압박 때문에 이런 오류를 자주 보입니다. 그럴수록 초기 단계에서부터 테스트 및 분석을 거치면서 큰 그림을 완성해야 합니다. 확고한 (초기) 컨셉이 정해졌다면, 작게 생각하고 빠르게 만들어서 사용자들의 반응을 관찰/분석해서 좀더 강건한 서비스를 기획/개발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애플에서 매킨토시를 처음 만들 때 케이스만 수십가지/차례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 새로운 애플 제품은 적어도 100가지 디자인 중에 하나가 선택된다는 이야기, 페이스북에서 Q&A기능을 넣었다가 사용자 반응이 미비해서 그냥 빼버린 사례, 그리고 앞서 말했던 구글의 영원한 베타전략 및 A/B테스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대학에서 품질공학 수업을 들으면서 초기 기획/설계 단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최종 제품 개발에서 실패가 적다는 것을 정석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실물 경제에서는 초기 디자인 단계에서 많은 것들이 검토되면 뒤쪽의 생산 단계에서 문제가 적게 발생한다는 얘기입니다. 몇 년의 준비과정이 필요한 제품의 경우에는 맞는 말이지만 인터넷/모바일 서비스처럼 몇 개월 또는 수주 내에 서비스의 승패를 결정하는 분야에서는 재고되어야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획/설계 단계에 많은 것들을 점검하고 긴 회의를 거치더라도 앞서 말했듯이 꾸준한 프로토타이핑 및 테스트를 거치지 않으면 완벽한 서비스가 그냥 좋은 서비스에 밀려나고 맙니다. 그리고, 3~6개월만 개발이 지연되어도 트렌드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6개월 ~ 1년 이상의 장기적인 마일스톤을 세워두고 꾸준히 개발/개선해야할 서비스나 기반기술들도 있습니다. 양자 모두에서 빠른 프로토타이핑과 테스트는 여전히 필수/유효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에서는 다양한 경험에서 서비스 아이디어를 얻고 빨리 구현해서 데이터로 검증을 받아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디어만으론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어린 친구들에게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창업해보라고 부채질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가진 재능과 패기를 바탕으로 조언하는 것이지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런 조언도 해주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일반적인 내용을 너무 길게 적었습니다. 앞서 '정석'이라는 표현도 사용했지만, 실제 성공하는 서비스의 왕도는 없습니다. 각 기업/조직의 문화에 따라서 더 적합한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일반론에 함몰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PS. 웃픈 글이 있어서 링크를 겁니다. 게임업계인에게 직접 듣는 게임업계의 슬픈 현실. 대화내용에서 카툰 아래에 나오는 '기획자가 필요없다'는 대목이 최근 IT업계의 현주소입니다.

(2013.01.14 작성 / 2013.01.21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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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터넷은 미래의 미디어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재의 미디어는 아니다. '현재의 미디어는 아니다'라는 말은 틀렸다. 더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세상을 단독으로 변화시킬 미디어로써의 힘을 가지지 않았다'가 더 적합한 표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은 인터넷이나 SNS보다는 신문 방송 등의 올드미디어의 힘이 더 커다는 거다. 10년 전에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라 불렸던 고 노무현 대통령도 나왔고, 미국에서는 하워드 딘의 약진과 더 최근에는 SNS를 이용한 오바마의 당선 및 재선을 보면서도 아직 인터넷이 멀었다고 말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아직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거다. 인터넷과 SNS의 가능성은 여전히 무궁하다. 그래서 많이 양보해도 '인터넷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냥 회사에서 동료들이랑 저녁을 먹으면서 TV에 비친 박근혜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렇게 직감했다. 현재의 여러 정황을 보면 지금 치뤄지는 대선은 5년전의 것보다 더 극단적인 원사이드 게임으로 치뤄져야 했다. 소위 전문가들 -- 양심을 판 전문가들을 포함해서 -- 의 말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금이 5년 전보다 더 낫다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경제를 제외하고, 정치만을 생각해도 5년 전에 비해서 좋게 평가해서 정체되어있고, 사회 문화 측면에서도 여전히 미개하다. 양극화라는 말로 잘 표현된다. 양극화는 경제적인 부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정보 소유에 대한 양극화, 정치적 발언권의 양극화, 문화 향유의 양극화, 교육 및 기회의 양극화 등의 사회 전반적인 이슈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다. 지난 5년 간 더 나아진 점이 없다면 지금 대선은 지난 5년에 대한 평가이고 그래서 향후 최소 5년에 대한 준비이다. 그러나 현재 여론조사상으로 (본인은 여러 번 밝혔지만 여론조사의 결과를 믿지 않는다. 최종 결론이 현재 여론조사의 수치와 거의 일치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현재의 여론조사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 두 후보 사이의 초박빙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5년 전에 6:4정도로 게임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도 4:6 정도의 차이가 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처음부터 5:5의 싸움을 해오고 있다. 새누리이 선거에서 전략적으로 잘 대응했다고 반대로 민주당이 뻘짓을 많이 한 것도 맞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신문 방송 등의 기존 미디어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MB가 그렇게 발악해서 방송사를 장악하려 했다. 조중동의 메이저신문사들은 어차피 그들의 편이었으니...

인터넷이 미디어로써의 힘은 막강하다. 그러나 아직은 단독으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보고 있다. SNS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들이 유통되고 있으며 또 잘못된 정보들이 바로 잡혀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 미디어에 편승해있다. 인터넷 단독의 힘은 여전히 미약하다. 현재 인터넷의 가지는 힘의 큰 부분은 여전히 올드미디어에 기대어있다. 컨텐츠 유통만을 본다면 인터넷은 거의 독립적이다. 그러나 컨텐츠의 생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갓난아기에 불과하다. SNS를 통해서 전파되는 모든 정보듸 7~80%이상은 여전히 기존미디어의 것을 실어나르거나 그것에 조금 코멘트를 첨가한 것들이다. 수많은 댓글들이 달리지만 실제 소수에게만 소비되는 그래서 거의 무의미한 컨텐츠다. 개인블로그나 트윗이 더 많이 생성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개별적으로 신뢰성을 얻기에는 여전히 미흡하고 특정 이슈에 대해서 파급력이 여전히 부족하다. 가혹 트위터를 통해서 제일 먼저 소개되고 특종이 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아주 간혹 일어나는 현상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어서 왜곡된 기억일 뿐이다. 트위터가 특종을 냈더라도 올드미디어의 후속 보도가 없으면 시간이 지나고나면 그저 인터넷 뜬소문정도로 남게 된다.

한국대선으로 돌아와보자. 현재 그래도 초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것은 그래도 조중동, KMSY 방송사에 대항하는 SNS와 인터넷의 힘이 아닌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iN 등의 대척점에 서있는 미디어의 뒷받침없이 가능했을까?를 묻고 싶다. 순전히 새롭게 나온 나꼼수나 나꼽살, 뉴스타파 등을 통해서 만들어진 컨텐츠들이 그저 블로그를 통해서 확대되고 트위터를 통해서 유통되고 검색을 통해서 소비된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의 초박빙이 가능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 현대의 초박빙 대선이 이상하다고 말하듯이 5년 전의 대선이 원사이드게임이 되었던 것도 사실 기존미디어의 힘이 아니었으면 그럴 수가 없었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웬만한 나라에서는 두개의 거대집단이 맞붙으면 거의 50:50에서 결판이 난다. 많으면 5.5:4.5 이상의 차이를 낼 수가 없다. 물론 현재의 사황만을 봤을 때, 대한민국은 비정상 민주주의니 6:4 이상도 가능하기는 하다. 미국에서 치뤄지는 많은 대선이나 총선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정당이나 후보가 힘을 얻는 것을 보지만, 큰 차이에 의해서 갈리지도 않고 결과에서도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오바마 재선에서의 (대의원) 특표 차이가 비정상적인 결과이고, 실제 투표의 결과는 50:48.5정도로 거의 50:50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순히 인터넷 여론만을 봤을 때는 이미 야권의 승리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물론 내가 뻘짓을 하는 미개인들을 팔로잉을 끊음으로써 내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한쪽으로 치우쳐져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근 쏟아지는 여러 이슈들을 본다면 문에게 저정도의 악재들이 쏟아졌다면 그는 이미 사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악재가 박을 향해있지만 여전히 50:50 싸움이다. 인터넷에서는 결판이 났지만, 올드미디어에서는 잘 숨기고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의 날것이 비인터넷 인구들에게 소비되지 못하고 있다. 비인터넷 인구란 단순히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여전히 서툰 노년층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은 사용하지만 게임이나 쇼핑 등의 유희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그들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국민의 8~90%가 인터넷을 사용한다지만 실제 사회 정치 경제 시사 등의 심각한 문제를 소비하는 인구는 극히 제한되어있다. 인터넷이 아무리 큰 힘을 가졌더라도 그런 비인터넷 인구들에게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신문 방송의 경우도 그런 비미디어 인구들이 존재한다. 그런 비미디어 인구들에게 유일한 미디어 수단은 실제 만나서 대화하는 것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비미디어 인구들에게 컨텐츠를 제공해주는 사람들이 현재의 인터넷파겠는가? 아니면 신문방송 등의 올드미디어파이겠는가?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여전히 커버리지 측면에서 인터넷보다는 올드미디어가 더 넓은 듯하다.

...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머니 설레발을 치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고 아직은 올드미디어에 바짝 엎드려서 굽신거려라는 말도 아니다. 그냥 현상이 그렇다는 거다. 인터넷은 미디어로써 참 매력적이다. 컨텐츠가 자유롭게 생성/재생산되고 자유롭게 유통되고 또 자유롭게 소비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인터넷의 가능성 중에 아주 일부만을 보고 있고 이용하고 있다. 더 큰 세계가 펼쳐져있지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우리의 미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냥 TV를 보면서 생각했던 한 가지 점을 가지고 긴글을 적으려니 논리의 비약도 심하고 빈틈이 많다. 그냥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을 아시고, 여기서 각자 더 생각을 전개해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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