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SP

그대, 편히 쉬시게나.

이제서야 눈문이 나온다.

지난 8월 21일 새벽에 나의 오랜 벗이 이 세상을 떠났다. 두살이나 어렸지만 그저 옆에만 있어도 힘이 되어주던 후배 녀석이었는데, 나는 그 친구 옆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제서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미안함을 갚을 수가 없다. 친구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가던 길에 공항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일주일 전에만 이곳에 왔더라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어쩌면 지금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을텐데…' 제주도로 놀러오라고 말만 하지 말고, 내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길을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깊이 남는다.

소식을 들은 후에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마지막 글을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저려온다.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가 된다.

이번 출장에 튀빙엔에 방문하기로 하자 와이프가 "튀빙엔 가면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어디야?"라고 물었다.
나는 지체없이 "집에서 연구소 갈때 걸어갔던 숲길!"이라고 대답했다.
튀빙엔에는 참 멋진 곳이 많은데 연구소 출퇴근 길에 걸었던 흔하디 흔한 언덕길이라니 와이프가 의아해 했다.

왜 그 길이 가장 가보고 싶은 걸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추억이라는 것은 함께한 절대적인 시간에 비례하기보다는 그 곳에, 그 시간에, 그 소리, 그 향기에 얼마나 강렬하게 감정을 느끼고 또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느냐에 비례하는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신혼 때 아내와 튀빙엔에서의 생활은 많은 추억이 깃들여 있다. 낯선 환경에 긴장도 하고 너무도 뛰어났던 연구소 동료들 덕분(?)에 자존감도 떨어질 때도 있었고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한 다양한 감정들이 가장 많이 묻어난 곳이 그 출퇴근 길에 걸었던 숲길이었다. 집은 언던 아래에, 연구소는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매일 30분 정도를 가파른 언덕 숲길을 걸었다. 냇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들렸다. 가파른 언덕 숲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면 잡생각도 사라졌다. 나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때로는 힘들었던 내 마음을 토닥이며 위로했던 시간이 이 언덕을 오르던 출근길이었다. 무거운 가방끈을 짊어메고 각오를 다지며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곳이 나에겐 가장 추억이 깃든 곳일 수 밖에 없다. 또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아린 곳이기도 하다.

오늘... 그 길을 걸었다...

언덕 길 올라가는 중간에 작은 벤치가 하나 있다. 예전에는 언덕을 오르면서 힘들어도 그 벤치에 앉아 쉬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와서 한번씩 이 숲길이 생각날때마다 후회됬던 것이 "왜 그 때 나한테 벤치에 잠시 쉴 수 있는 단 5분의 여유도 주지 못했나?"였다.

오늘은 이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이제는 열심히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잠시 쉬며 새소리, 물소리, 숲내음을 맡을 수 있는 소박한 여유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안다.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대원아, 형이야.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덥고 가물었다. 그런데 너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가는 길에 한줄기 소나기가 내리더라. 그리고 장지로 가는 길에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마치 네가 비를 내리는 것같더라. 데이터마이닝을 하는 사람으로써 우연의 일치, 상관관계, 인과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이 헛것이 되더라.

추억이 되었을 때 함께 걷고 싶었던 교정이었는데, 너의 마지막 배웅길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언젠가 또 그 길을 걸으면서 너의 부재를 느끼면서 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다.

미안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네 소식을 듣고 굳이 빈소까지 찾아가봐야 하나?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런데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너는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줬을 거라는 생각에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있는 동안 제주도로 놀러오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늘 바빠서 그러지 못했다. 사실 그때는 네가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또 네게 미안하다. 형한테도 편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만 묵묵히 삭히는 네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런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네게 가봤어야 했는데… 이제는 내가 네 곁으로 갈테니 그때까지 아버지의 품에서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네가 없는 하루를 또 보냈다. 네가 없는데도 TV를 보면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더라. 살면서 또 너를 잊고 지낼 형을 용서해줘. 살면서 세 가지 말만 잘 하면 된다던데 내가 지금 네게 해줄 말이 이것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리고 또 보고 싶다.

거기 쉬고 있어. 이제 내가 갈께.
===

다른 후배의 아버님께서 적은 글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그리고 사인은 급성심정지입니다.)
아들 친구의 하늘 길에 부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