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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P

브레이크

우리 회사는 근무년수가 증가해도 연차가 늘어나지 않고 3년마다 리프레쉬휴가가 주어진다. 나도 이미 3년차 리프레쉬휴가를 받았지만 여러 이유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달 전에 특별한 이유없이 오후 반차를 내고 퇴근하는 길에 '나도 이제 좀 쉬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휴가 사용 독려 메일이 왔길래 바로 휴가 신청했다. 그리고 몇 주 전의 갑작스런 사건은 내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그날 이후로 그를 잊은 날이 없고, 휴가를 보내면서 그에게 미안했고, 그리고 또 보고 싶다.)

며칠동안 이제껏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생각했던 점들을 적으려 한다.

안식휴가동안 주변 동료들은 대게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고, 유부들은 2세의 탄생과 때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간혹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시도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대게 미리 다양한 계획을 세워두고 안식휴가를 맞이하는 것같다. 그러나 나는 그냥 '쉬어야겠다'라는 생각에서 휴가를 신청한 것이고, 또 혼자서 힘드려서 해외여행이나 새로운 경험을 쌓아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제주에서 홀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재미없게 왜 그러냐고 말도 하지만, 나는 그냥 쉬는 것이 3년차 안식휴가의 유일한 목적이었고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장기간 휴가를 보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아침에 늦잠 잘 수 있다는 것보다는 아침에 알람이 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알람의 노예였다. 외부의 자극이 아닌 내 몸이 반응하는대로 자고 깨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운 일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열흘을 지냈지만 방콕만한 것은 아니다. 처음 이틀정도는 그냥 방에서 두문불출했지만, 그 이후로는 특별히 날씨가 좋지 않는 이상은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6년째 살고 있는 제주에서 더이상 새로울 것도 별로 없지만 (물론 아직 가보지 못한 많은 관광지나 맛집들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늘 다니던 길을 다시 돌아다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는 점이다. 느리게 걸으면서 제주를 다시 음미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쌩하니 그저 지나치던 길에서도 잠시 차를 세우고 주변을 조금 걸으면서 사진도 찍곤 했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찾아떠나는 여정이었다. 동쪽 끝에서 일출을 보고 서쪽 끝에서 일몰을 보았다. 평소에도 할 수 있었지만 한번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쉬엄쉬엄 보냈지만 제주도 전체를 커버한 것같습니다. 글을 적는 지금 생각난 건데 비양도에 가본다는 걸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숲 중간중간에 붉게 말라죽은 나무들이었다. 지난 여름의 긴 가뭄과 더위로 말라 죽은 침엽수들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숲 전체가 말라죽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나무부터 죽었다는 거다. 좋게 표현하면 몇 그루의 나무가 희생해서 숲 전체를 살린 것이지만, 냉혹하게 말하면 진화론에서 말하는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연이 살아남는 법을 잘 보여주는 것이지만, 인간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보는 듯해서 많이 우울했다. 그리고 올해 여름처럼 이런 날씨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이어진다면 조만간 제주도에서 침엽수(림)을 볼 수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도 느낀다.

제주도에 살다보니 아름다운 곳에도 자주 다니고 특이한 것 (이제는 웬만하면 특이하지도 않지만)들도 많이 본다. 그러면 바로 아이폰이나 DSLR로 사진으로 남긴다. 그런데 내 사진의 특징은 모두 풍경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웬만큼 아름다운 것을 사진에 담아도 사진이 늘 허전하다. 간혹 사람들이 사진에 등장하지만, 그들도 그저 풍경일 뿐 내 사진의 피사체가 아니다. 허전함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늘 미련이 남는다. 피사체가 있다면 굳이 배경이 아름다울 필요도 없는데… (그냥 그렇다구.) (현재 진행중인 Imagine Jeju에 99장을 채우면 Lifeful Jeju나 Real Jeju 등의 다른 주제로 진행할 예정)

그리고 휴가 중에 출시된 다음의 서비스 WITH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또 욕먹을 짓을 했구나'였다. 이 민족과 회사는 역사를 통해서 전혀 배우지 못하는 것같다. 포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내놓아야하는 서비스들이 있다. 그러나, 그래도 컨셉은 유니크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프렌딩보다 언프렌딩에 더 고민을 해야할 때다. 친구가 친구가 아닌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휴가 전에 오픈할 줄 알고 지금 휴가를 신청했는데, 일이 잘못되어 휴가 중에 오픈/개편한 내가 관련된 서비스도 있다. 늘 부끄럽다.

예전에 미국에 잠시 나갔다 귀국했을 때, 4개월정도 핸드폰을 개통하지 않고 지냈던 때가 있다. 이번 휴가 중에도 (걸려오는 전화도 없지만) 웬만하면 전화나 메시지 연락도 끊고 지냈다 (부재중 통화도 그냥 넘겼다).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꾸준히 했다.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소소한 것들은 업데이트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안식을 취하다보니 다시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니 소소한 것을 공유하게 된 듯하다. 어쩌면 그냥 소소한 것의 연속이라서 몇몇을 공유한 것뿐일지도… 어쨌든 전통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에서는 어느 정도 단절을 했는데, 새로운 수단들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캔디크러쉬는 요즘 유일하게 즐기는 온라인게임이다. 나보다 빨리 레벨클리어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페친 사이에서는 대부분 가장 앞서있다. 실력보다는 운에 따르는 게임이다. 휴가 중에도 새로운 에피소드가 나왔고 또 가장 먼저 끝냈다. 말했듯이 실력보다는 운이 좌우한다. 즉, 게임을 빨리 클리어하기 위해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운빨이 따라야 한다는 뜻이고, 그러기 위해서 클리어 확률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이에게 랜덤하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도를 많이 해야 한다. 내가 특별히 운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많은 기회들을 잘 살렸을 뿐이다. 주어진 기회들을 그냥 허비하면서 나는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워커홀릭들은 '내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그래서 하루짜리가 아닌 일주일 이상의 장기휴가를 제대로 못 즐기는 것같다. 그러나 대부분이 경험하듯이 나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래서 더욱 일을 못 놓는 사람들도 있기도 하지만…살면서 걱정해야하는 것은 내일도 내 일도 아닌 지금 바로 나 자신이다. 쉼이라는 것이 내 일이 아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다.

평소에 딱히 먹고 싶은 게 별로 없다는 것도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혼자 밥먹을 때마다 뭘 먹지 고민하는 것같다. 식당은 선택할 수 있는데 메뉴는 생각나질 않는다. 평일에는 회사 식당에서 주는대로 먹다보니 그리고 주말은 짧게 끼니만 떼우면 그만이었는데 열흘을 보내고 보니 지난 열흘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무척 신기하다. 글을 적다보니 얇게 썰은 삼겹살은 오랜만에 먹고 싶어졌는데, 혼자 먹기는 까다로운 음식이다. 오전에 추석 선물로 제주은갈치를 집에 보내고 이제 집에서 쉬는중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의미하게 허비한 시간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터닝포인트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그것보다는 완급을 조절하는 브레이크 타임이 더 필요할 때가 많다. 바꿈이나 느림도 아닌 쉼의 순간을 위해서… 그리고 남들이 놀 때 같이 놀면 남들이 일할 때도 같이 일해야 된다.

마지막으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단언컨대 내일 알람이 울리는 순간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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