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이 있다면 수강해 보고 싶다.
예전에 <인생수업>과 <상실수업>을 읽은 적이 있다.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 어떤 내용이 포함되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어쨌든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의 글이었는데 나는 지나치게 가볍게 읽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죽음은 너무 먼 얘기로 치부해버리고 마치 자신은 죽음을 피해갈 것같이 우리는 살아간다.
상실은 아무리 연습해도, 수없이 경험을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늘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있지만, 주변 지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다. 특히 부모님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는 그 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등과 같은 생각이 머리 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부모님이나 친지분들과의 작별에 대한 나와 비슷한 생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껏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많았다.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을 만났고, 또 주변에 수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인생의 반을 살면서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가까웠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반 언저리에 다다르면서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별은 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현실이 되고 내 삶이 되어버렸다.
큰어머니를 보내드리는 지금도 그렇고, 재작년 작은아버지를 보내드릴 때도 그랬듯이 여전히 상실은 익숙치가 않다. 그리고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더 큰 짐으로 다가온다. 보통 주초에 집에 전화한다. 말주변이 없어서 긴 통화가 이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일주일에 한번은 통화한다. 때를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전화하는 이유는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무섭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하늘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매번 무섭다. 설마 지금이 그때인가?라는 무서운 생각이 늘 엄습한다.
상실에 대한 수업은 없다. 그저 직접 겪고 대처해날 수 밖에 없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겠지만 -- 또 익숙해져서도 안 된다 --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게 상실수업이다.
(2013.04.22 작성 / 2013.04.26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