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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Jeju

다음에서의 3년 3 Years in Daum

너무 글이 밋밋해서 탑동에서 해질녘에 찍은 사진을 올림.

 2008년 3월 11일은 내가 다음에 입사한 날짜다. 오늘이 2011년 3월 12일이니 벌써 만 3년이 지나서, 이제 4년차다. 다음에서의 생활도 3년이 지났고, 다음이 첫 직장이므로 (대학 다닐 때의 현장학습이나 대학원과 포닥을 제외한) 사회생활도 이제 3년을 채웠고, 또 제주에서의 삶도 3년을 꽉 채운 셈이다. 3년이라는 시간은 35년의 내 인생의 1/10밖에는 되지 않지만, 내 사회생활의 100%라고 해도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연말부터 줄곳 다음 그리고 제주에서의 3년을 되돌아보는 글을 계속 적고 싶었다. 처음에는 단지 좀 딱딱하더라도 회사에서 수행했던 프로젝트나 분석업무를 중심으로 3년을 정리할 계획이었지만, 막상 지금에 와서는 어떤 글을 적을지 모르겠다. 처음 계획처럼 회사에서의 업무를 정리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고, 아니면 제주라는 나름 도시와 떨어진 곳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것도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에게) 의미가 있을 것같다. 물론 나의 제주 생활은 많은 이들이 꿈에 그리는 그런 삶은 아니다. 주변에서 보면 참 궁색하게 살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나의 궁색함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더 어린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야 하기에 그냥 지금의 단편만 정리했으면 좋겠다.

 다음에 들어오기까지
 30년의 시간을 짧게 정리하자면, 경북 경산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서 (내가 태어날 당시만해도 시골에서의 집안가문 자체는 좋았었다. 물론 나는 그 혜택을 제대로 못 받았지만...), 기억도 없는 수원에서의 약 1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고향 경산에서 20년을 보냈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학구열은 시골에서의 삶에 만족하던 나를 초등학교 5학년 봄방학을 이틀 남겨두고 대구에서의 삶으로 저변을 넓혀줬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7년이라는 시간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3~40분이 넘도록 버스를 타고 통학했어야 했다. 합법적인 전학은 아니었기에 어린 마음에 늘 불편했던 통학이었던 것같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서울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포항이다. 내가 포항에 가기까지의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96년도에 정상적으로 입학했고, 대학생활 4년, 석사과정 2년, 박사과정 4년 반, 그리고 포닥 1년 반, 총 12년의 시간을 포항에서 보냈다. 띠동갑 신입생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학교를 떠났으니 참 오랜 기다림이었다. 박사과정 중에 잠시 (1년 반)동안 미국 매릴랜드에 있는 NIST에서 연구원 (박사학위를 받기 전이라 '프리닥'이라고 별칭해서 부름. 물론 정식명칭은 아님)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2004년도의 대한민국의 기억은 내게 없다. 지금의 삶도 만족하지만, 미국에서의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같다. 그렇게 20년의 대구/경산, 10년의 포항의 삶을 마무리하고 찾아온 곳이 바로 제주다. 그리고 3년을 보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보내게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정해진 운명의 길로 가는 것이고, 그 운명은 분명 내가 정한 것은 아닌 것같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과학자, 구체적으로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었다. 그렇기에 박사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학 4년에 대학원을 붙어놓은 후에, 4년간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회사를 찾아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계획했던 일에 대해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잠시했었다. 친구들이라고 해서 영원히 함께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던 것같다.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들은 대학 때 동기들이다. 고향의 불알친구들이야 고향집에 가면 만나지만, 중간에 대구에서 학교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친구들과는 지금 연결이 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7년은 내가 원해서 가졌던 시간은 아니었기에,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미련을 가지지 않는 것같기도 하다. 그래서 석사과정을 마치면 바로 취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취직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었다. 나름 핑계를 대자면 포항이라는 외진 곳에서 취업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가끔 학교로 찾아오는 회사들에서는 내 자리도 없었다. 그래서 박사과정을 또 갔다. 어떻게 보면 안 풀려서 그렇게 된 것같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어릴 때의 계획에 맞춰진 면도 있다. 아, 참고로 대학교 전공은 산업공학이다. 지금은 인기가 시들해져서 산업경영공학으로 학과명을 개명했지만, 나름 재미있는 전공이다. 박사학위를 받고나서도 당시에는 전문연구요원기간도 남아있었고, 특별히 산학을 하는 것도 없었기에 그냥 학교에서 포닥을 더 하기로 했다. 포항에서의 10년이라는 시간이 내게 너무 맞는 옷이어서 그걸 쉽게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나도 서서히 다른 옷을 입어보기로 했고, 몇몇 기회들을 모색하다가 어찌어찌해서 다음에 들어오게 되었다.

  1년
 3년 전의 감정이나 느낌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가 힘들다. 어릴 적부터 도시에서 살았다면 시골이라는 풍경이 참 낯설었을텐데, 난 원래부터 촌놈이었다. 사람을 많이 그리워하는 타입도 아니기에 제주에서의 한가로움은 또 다른 내 옷인 듯하다. 어쩌면 미국에서의 삶 (물론, 매우 중요한 부분은 빠져있지만)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 및 동료들도 내 개인 삶에 대해서 크게 터치하는 것도 아니기에 미국에서의 삶과 비슷한 느낌이 많다. 전공이 데이터마이닝은 아니었지만, 평소부터 인터넷 쪽에 관심도 많았고 논문을 쓰면서 머신런닝 등을 다루었기에 그냥 다음 검색본부의 데이터마이닝팀으로 입사했다. 학교 다니면서부터 네트워크를 더 깊게 공부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컸기에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및 분석 쪽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그래도 인터넷하면 검색이기에 (당시까지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검색일을 시작했던 것같다. 첫 해에는 주로 매크로한 레벨에서의 랭킹 쪽 일을 했다. 사용자들의 행동 패턴을 보고 검색어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주는 작업도 했고, 또 검색화면에서의 출처별 랭킹 작업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기억은 별로 없다. 한번 일상이 되어버리면 그 일상에서 특이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 아닌가? 

  2년
 하나의 업무라는 것이 1개월, 반년, 1년 등의 주기로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면 좋을텐데, 전혀 그러지 못하지 않은가? 다음에서의 둘째 해에도 여전히 전년도의 업무가 연결되었다. 물론 내가 맡은 파트에서의 업무지연보다는 전체의 틀 속에서 준비되는 작업이었기에 이래저래 오픈이 연기되어서 2년차에도 같은 일을 계속 해나갔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업무로 우수한 블로그를 찾아내는 업무를 진행했다. 나름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만족도는 매우 크지는 못하다. 결과물이 너무 복잡해졌는데도, 여전히 빈틈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2009년 9월부터 데이터마이닝팀에서 검색품질팀으로 팀을 옮겼다. 마이닝팀에서는 검색뿐만 아니라 회사 서비스 전반에 대한 데이터 분석업무가 주를 이뤘는데, 검색품질팀은 오로지 검색랭킹과 관련된 팀이다. 이제까지 했던 굿이미지 찾기, 출처별랭킹, 그리고 블로그레벨링이 모두 랭킹 관련 업무였기에 자연스럽게 자의반타의반 새로 만들어진 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아,.. 이 시기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나 시작했었다. 그런데 마무리는 내가 짓지 못했다. 일전에도 글을 올렸지만, 다음검색에서의 통합웹 컬렉션을 만드는 작업이다. (다음 통합웹 검색 MOAS / Search Results Fusion) 처음 출처별랭킹을 만들면서부터 통합웹으로 가야된다고 말했는데, 그 업무를 직접 혼자 맡아서 시작했었다. 그런데 마무리는 내가 짓지 못했기에 아쉬운 점도 있고, 또 현재 서비스되는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라서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다. 여러 번 말했지만 아직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닌 것같다.

  3년
 새로운 팀으로 옮겼지만 내가 맡았던 업무는 여전히 똑같았다. 물론, 작은 업무들은 털어냈지만, 메이저 업무는 여전히 같았다. 그런데 새로운 팀에 옮긴지 6개월 만인, 2010년 4월에 다시 원래의 데이터마이닝팀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왔다. 왜 옮겼냐?고 묻는다면 90%는 내 잘못이다라고만 말하겠다. 그저 내게 맡지 않은 옷을 입으면 그냥 불편해하는 나의 까탈스러움의 결과였으리라... 그렇게 다시 마이닝팀으로 옮기고 나서 한동안 나의 삶은 참 피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정상적이었지만, 큰 혼란 후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한동안 참 조급했다. 주어진 업무에서 바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그런 중압감을 혼자 만들어내서 스스로를 옥죄었던 것같다. 그런데, 다시 팀을 옮김으로써 얻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기존에 작업하던 모든 프로그램들을 검색품질팀에 넘겨주고, 새로운 일들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검색랭킹 작업은 단기간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기보다는 꾸준한 노력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어쩌면 나는 그런 지루한 업무에 취미가 없었던 것같다. 늘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에 더 쾌감을 느끼는 것같다. 마이닝팀에서는 얼핏 보면 업무의 연속성은 없어 보여도 늘 새로운 일을 맡는다는 즐거움을 다시 얻었다. 아, 마이닝팀으로 옮겨와서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소셜웹 데이터를 다루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트위터에 푹빠져지냈기에 그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일부를 실제 데이터를 가지고 장난칠 수 있었던 점이 너무 좋았다. 현재 서비스로 많이 노출되고는 있지 않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관계를 볼 수도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사도 볼 수 있었고, 또 사람들의 수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뷰와 관련된 일도 잠시 했었다. 2008년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다음뷰인데, 지금은 많이 죽은 것같아서 아쉽다. 내가 더 잘 해줄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능력이 부족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던 점이 아쉽고, 지금은 또 다른 업무들 때문에 치여서 A/S를 못 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올해는 또 새로운 업무를 맡았다. 이제까지의 업무들은 대부분 새로 시작하는 거였는데, 새로운 메인 업무는 사용자들이 검색했을 때 키워드를 추천해주는 관련검색어 업무를 메인으로 맡고 있다. 그래서 지난 2월에 이 포스팅을 적을 수가 없었다. 나름 바빴기에... 지금은 다행히 대부분의 업무파악이 끝났고, 내 마음대로 서비스를 요리할 수 있는 단계에 와서 여러 모로 다행이다. 그리고, 또 더 재미있는 서비스에도 연계되어있다. 이건 지금은 비밀이다.

 3년의 비판 그리고 아픔
 난 참 못됐다. 남의 단점을 너무 쉽게 보고 또 그걸 말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근질거린다. 그래서 말해버리고 만다. 물론, 말이 아니라 글로 표현한다. 처음 1년 동안은 다음인이라는 사내 게시판을 많이 이용했다. 다음의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이나 버그들을 많이 리포팅하고, 새로운 서비스들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과하면 늘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나름 애정을 갖고 문제점을 밝히고 개선안을 제안했지만 해당 서비스의 담당자들은 내 본심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같더라. 그래서 직간접적으로 내가 다음 전사의 안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1년간 열심히 활동하던 다음인 게시판에서 절필을 선언했다. 그러나, 지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이후에는 야머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다음인 게시판에 비하면 비공식적인 채널이었고 모든 직원들이 이용하는 서비스는 아니었기에 더 편하게 독설을 뿜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렇게 글을 적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 혼자 야머에 글을 적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2000번째의 글을 마지막으로 또 야머 활동도 접어버렸다. 다음1년은 다음인 게시판의 해였고, 다음2년은 야머게시판의 해였다면, 다음3년은 침묵의 해였다. 아, 완전 침묵은 아니다. 아바타를 통했으니^^ 아직도 회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내 (표현) 방식의 한계를 너무 뼈저리게 느꼈기에 다수의 방식 (침묵)을 취한 것뿐이다. 음, 가끔 블로그에서 직석적으로 표혀하기도 하지만, 내부의 흠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은 자제하고 있다.

  4년은?
 올해는 어떻게 될까? 업무 차원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관련검색어를 담당하고, 시크릿프로젝트를 추진중에 있다. 내 심장은 3년동안 한결같이 뛰었지만, 올해도 여전히 뛰게 할 거다. 그런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 필요한데...

 제주에서의 생활은?
 참 궁색하다. 내 나이 이제 35인데, 세련됨이 없다. 어릴 때 보던 어른들의 모습도 아니고, 지금 보는 친구들의 모습과도 많이 다른 것같다. 그러나 나는 이 궁색함이 좋다. 좋다기 보다는 미래에 더 궁색한 환경에서의 삶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너무 편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 제주에서 즐길 수 있는 여가는??? 축구, 족구, 오름 및 한라산 등산, 해수욕장, 그리고 기타 관광 및 맛집 탐방 정도...? 그런데 휘발유값이 너무 오르고 있어서 이것도 조절해야할 듯하다. 골프를 해보라는 권유도 많은데 아직까지 내 삶에 골프가 침투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골프는 나와 연은 없는 것같다. ...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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