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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P

방해금지

어떤 제목의, 어떤 글을 적을지 이틀을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했음에도 생각을 전혀 정리하지 못했다. 벌써 2020년의 두 번째 날이다. 2020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원더키드’다. 그래서 제목을 원더키드로 하려니 본문에 적을 내용이 없다. 며칠 전부터 계속 적으려던 글에 착안해서 그냥 ‘틀깨기’로 하려니 아직 준비가 덜 됐다. 피상적인 공자왈 글이 될 것이 뻔하다. 능동적인 틀깨기에 앞서 그저 수동적으로 방해/장애물은 되지 말자는 의미도 일단 제목을 ‘방해금지’로 정했다. 이제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자.

최근 몇 년동안 연초가 되면 늘 어떤 제목의 글을 적었다. 굳이 새해다짐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그 시기를 보내면서 강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거다. 그렇게 몇 년을 적어오다 보니 올해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글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지난 12/31에 들었다. 하지만 글을 적지 못하고 1/1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글을 적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1/2. 어쨌든 제목을 정하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어떻게 끝날지는 지금은 모르겠다. 어떻게든 적힐 거고 어떤 결론으로든 흘러갈 거다. 어쨌거나 올해도 나는 내 삶을 살아간다. 그걸로 충분하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모를 수 있지만, 흔히 읍내라 불리는 지방의 소도시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너른 평야지대인 호남지역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산과 계곡이 많은 지역은 비슷하게 생겼을 거다. 가운데로 큰 길 (보통 왕복 2차로)이 있고 그 길을 따라서 건물들이 쭉 길게 들어선 모습이다. 계곡을 따라서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거니와, 평지에 큰길을 여러 개를 내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했으리라 본다. 논밭을 만들 땅도 없는데 너른 땅을 길로 사용하기도 어렵거니와 많지 않은 사람을 수용하려고 격자 모양의 구조를 갖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역의 소도시, 읍내는 2차선 길을 따라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선 구조가 형성됐을 거다.

2~30분을 걸어야지 초등학교에 갈 수 있던 시골에서 자란 내게 버스를 타고 나간 경산 (지금은 시)이나 하양 읍내는 상당히 큰 도시였다. 일단 큰 길이 있고 주변에 3~4층이 넘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요즘도 지방 소도시에서 4~5층짜리는 꽤 큰 건물이다. 시골 문방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장난감을 갖춘 문구점도 여럿 있어다. 하양 읍내에 있던 가나다 아니면 ABC란 상호의 문방구를 가는 것도 상당히 큰 일이었다. 자칫 버스를 잘못 타면 진짜 길을 잃었을 테고 지금 이렇게 글을 적지도 못했을 거다. 어릴 때 그렇게 크게 생각했던 하양 읍내를 가로지르는 2차선 도로와 주변의 건물들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을 피해서 다닌다. 일단 도로 폭은 좁은데 불법 주차된 차로 늘 정체 상태다. 3~4층의 낡은 건물들은 활기를 찾기가 어렵다. 집에서 학교 (포항)에 갈 때면 6차선 우회도로를 이용한다. 더 이상 하양 읍내는 생기가 있는 큰 도시가 아니다.

2차선 도로와 4층 건물은 잘 갖춰진 인프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큰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2차선 도로는 증가한 인구와 차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도로를 넓혀야 한다. 하지만 도로를 따라 들어선 건물 때문에 넓힐 수가 없다. 건물을 부수고 넓힐 수도 있겠지만 아직 수명이 남은 건물을 그냥 부수기도 어렵거니와 이미 비싸진 건물과 대지를 구입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결국 도시를 우회하는 새로운 도로가 생기고, 그 옆으로 더 높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온다. 어느 순간 도심이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할렘이 된다. 예전에 2차선 도로는 도시의 척추 역할을 했지만 이젠 좁은 도로는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흉이 됐다. 

이 지점에서 프레임, 틀, 패턴과 연결된다. 어떤 것이 생겨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초와 프레임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처음의 기초는 좁고 프레임은 큰 무게를 감당하기에 버겁다. 이때가 되면 이제 더 넓은 다른 곳에 더 넓은 기초와 새로운 프레임을 쌓거나 아니면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기초를 다지고 프레임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파괴를 창조라 부른다. 기존의 틀을 부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축할 수가 없다.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와해성 기술 disruptive technology, 파괴적 혁신 disruptive innovation이란 용어가 그래서 생겨났다.

지식이나 기술의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 사진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카메라의 기본 기능을 배우고 여러 환경에서 적합한 설정값을 익히고 구도를 배워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보기에 괜찮은 사진이 나온다. 실패할 수 없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머무른다면 이 사람은 그저 달력사진가에 머무른다. (물론 나는 멋진 달력 사진을 찍고 싶다.) 단순 찍사를 넘어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그동안 배웠던 것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일부러 노출을 과다로 만든다거나 괜히 수평수직 등의 구도를 바꿔본다거나 카메라를 막 흔들거나 초점이 안 맞게 찍는다거나 아니면 이상한 물건을 앞에 놔두고 찍는다거나… 하지만 우연히 찍힌 또는 매번 다른 설정의 사진을 찍는다면 이건 예술이 아니다. 기존의 틀과는 다르지만 일관성이 있는, 소위 톤과 매너를 지킨 자신만의 사진 세계를 만들면 그의 사진은 예술이 된다. 기초를 배우는 과정은 기존의 프레임을 익히는 것이고, 그 이후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톤과 매너를 만드는 것으로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피카소가 처음부터 입체파 풍의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누구보다 더 사물을 보는 그대로 표현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런 기초 그림만을 계속 그렸다면 그저 거리에서 관광객의 얼굴을 그리는 가난한 인물화가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그 이후에 자신만의 기법으로 그림을 뒤틀어서 입체파가 탄생했다. 기존의 화풍을 배우는 과정이 있어야 했지만, 또 그 후에는 기존의 화풍을 스스로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패턴을 찾는 능력과 패턴을 깨부수는 능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다른 많은 지식이든 경험의 영역에서도 이런 프레임과 반프레임의 원리는 존재한다.

어제까지 이 글을 적어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물론 이런 식으로 글이 적힐지는 몰랐다) '프레임/틀깨기’로 제목을 정하려던 이유는 이제껏 내가 살아왔던 관점이든 경험을 뒤틀어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봐야겠다는 무모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틀깨기라는 걸 바로 시도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올해는 기존 프레임을 깨부수고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해두고 1년 뒤에 이 글을 다시 봤을 때 부끄러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기존 틀을 적극적으로 부수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기존 틀을 부수는 것을 방해하지는 말자라는 생각으로 급선회했다. 그래서 제목이 방해금지다. 스스로 틀을 깨고 틀을 만들고 싶지만, 내 생각에 갇혀서 주변의 누군가의 틀깨기와 구축 작업을 방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이뤄야 한다는 욕심을 버린다. 더 나은 누군가가 더 나은 프레임을 만드는데 조금의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아니 그들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다. 

방해금지. 창조적으로 프레임을 구축할 수 없더라도 누군가의 창조성에 방해는 되지 말자. 스스로 이룩하지 않아도 된다. 때론 그 때 그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마침 이런 글이 올라왔다. https://entertain.v.daum.net/v/20200102151110421 틀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 하지만 틀에 갇히면 진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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