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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P

현자되기

현자타임 (또는 현타)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원은 전혀 다르지만) ‘현실자각타임’이라고 순화돼서 통용됩니다.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문득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의 상태를 바로 깨닫고 현실을 직시하는 걸 뜻합니다. 저의 2019년 목표를 제가 직면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현자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조금 불의해도 되잖아’라는 제목으로 글을 적으려했지만 별로 와닿지 않고 내적 갈등을 겪었는데 문득 ‘현자’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나의 잘못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잘못인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잘못인지, 이도 아니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도 있지만, 최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변 반응에 참 무던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저는 주변의 흐름에 여러모로 많이 민감합니다. 때론 제 자신의 상태나 감정보다는 주변 분위기에 더 쉽게 휩쓸립니다. 굳이 내가 나설 일도 아닌데… 하지만 그때 나서지 않으면 스스로 비겁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또 막 지릅니다.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고 행동하는 건 아닙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내게 돌아올지도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었기에 무모할 수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현실을 다시 만났을 때 막막하고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흐릅니다.

현실자각.

지난 9월, 조금 늦은 시기에 건강검진을 했다. 결과지를 받아봤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며칠 전 메디피움 (건강검진한 곳)에서 전화가 왔다. 뇌MRI 검진에서 위험하지 않은 부위에 문제 (백질병변)가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백질병변을 정확히 설명한 것을 찾기 어려운데, 심하면 치매 등의 인지장애를 일으킨다고 한다. 별 다른 이상이 없으면 6개월 뒤에 추적검사를 받고 이상이 있으면 뇌신경센터로 찾아오라고 한다. 또 갖은 상상을 했지만 이젠 처음 들었을 때보다는 덜 심각하다. 처음에는 그 부위가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라는 걱정을, 지금은 덜 위험한 부위에 이상이 생겼다면 위험한 부위에도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건강검진을 좀 일찍 해서 발견하지 못했다거나 이런 이상이 시작된 걸 모른채 살아갈 수도 있었다. 조심하면 괜찮은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모르다가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위안이면 위안이다. 괜히 기분 나쁜 두통이 이것 때문인 것같기도 하고…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지만 그렇게 걱정 하나는 더 해서 또 살아갈 뿐이다.

어린 시절을 넉넉하게 자라지 못했기에 빚은 늘 부정적이다. 카드로 결제할 때도 웬만하면 일시불로 지불할 정도로 대출을 꺼린다. 하지만 최근 7,000만원을 대출 받았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거라서 실질 금리는 2%지만 어쨌든 6년동안 갚아나가야할 (만기를 다 채울 생각은 없으나) 대출이 생애 처음으로 생겼다. 집 살 때 어머님께 빌린 돈의 상당액은 갚을 수 있었지만, 40년 넘게 빚없이 — 대신 주변의 누군가가 빚을 졌기에 내가 직접 고통을 느끼지 못했겠지만 — 살았던 패턴이 바뀌면서 여러모로 불편하다. 아직 한번도 원금+이자를 갚지도 않았으면서 시작부터 호들갑이다. 무리한 것은 아니지만 은행에 메인 동안은 좀더 고분고분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그런… 불의해도 대출금을 다 갚을 때까지는 참을 수 있다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중이다. 대출이라는 현실이 ‘불의해도 참자’로 이어졌던 셈이다. 몇 억을 빌렸으면 불의를 참는 게 아니라 앞장서서 불의를 저지를 기세다.

며칠 전 기사를 봤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연봉 1억원 이상을 받는 사람이 70만명을 넘겼다고 한다. 대략 2,000만명 정도가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지금 당장 내가 1억 연봉을 받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상위 3% 내에 겨우 들어갈 수 있다. 보통 직장인들에게 1억은 꿈의 연봉일텐데, 그 금액을 달성하더라도 삶이 크게 좋아질 것 같지는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없는 생각이다. 몇 년을 더 고생해서 그 연봉에 이르렀을 때 과연 성취감을 느낄 수가 있을까? 그때가 됐을 때는 한 상위 5%에 속할 수는 있겠지만, 별로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성취할 수 있는 마지막이 경제(적 지위)라는 얘길 들었는데, 삶의 모든 잣대가 돈으로 측정되는 게 참 싫다. 온전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나는 뭘 해야할까? 돈으로 나를 채울 수도 없을 뿐더라, 채울만큼 자산을 모을 가능성은 거의 0가 됐다고 본다. 돈이라도 마지막 희망의 끈으로 잡고 있다면 욕심을 부릴텐데, 이것도 나를 지탱해주지 못할 것 같다. 희망은 희박하더라도 가능성에서 생기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요행이다. 때론 요행마저도 바라마지 않지만ㅠㅠ
**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장 객관적이고 공평한, 어쩌면 유일한 평가 지표인 것은 맞다. 그래서 슬픈 거다.

생각은 많은데 글은 참 안 적힌다.

최근 몇 년동안 인공지능 AI가 큰 화두고 이걸 전공한 사람들도 인기라는데… 나는 왜? 자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상황도 인정과 존중의 부재에서 화가 났던 것 같다. 직업적 자존심의 최저선은 지키고 싶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어찌어찌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 배알이 꼴린 거겠지. 그저 내 삶을 살면 되는데 자꾸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어릴 적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는데, 이젠 하늘 아래에도 하늘 위에도 내 존재라는 것이 없어진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받을 때 비로소 이름이 불리고 꽃이 되는 건가? 이것도 자각이라면 자각이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블루투스 스피커도 하나 샀다. 이게 필요하고 매일 꾸준히 사용할 것 같았다. TV가 없으니 음악과 라디오라도 들어야했다. 그런데 막상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음악을 듣는게 귀찮다. 처음에 몇 번 듣다가 가끔 연결이 제대로 안 된 후로 음악 듣는 걸 포기하고, 이후로는 라디오를 듣는데 사용하지만 또 간혹 신호가 약하면 라디오 듣는 것도 귀찮아진다. 밖에서 라디오 dj의 멘트가 들리면 책에 집중할 수 없어서 또 라디오를 끄게된다. 한편 AI 스피커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말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연말에 전사 직원들에게 멜론이용권과 카카오미니가 선물로 지급됐고 지금 거실에 설치돼있다. (올해 인센티브는 물 건너갔구나…) 그런데 막상 스피커를 갖다놓으니 '헤이카카오 라디오 켜줘', '음악 틀어줘' 등의 명령어를 반복한다. 지금도 카카오미니로 음악을 들으면서 이 글을 적고 있다. (그리고 블루투스 스피커는 고장나서 오늘 A/S 보냈다.) 필요할 것 같아서 구입한 것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전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막상 있으니 또 열심히 사용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자각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 집을 IoT 환경으로 탈바꿈시켜서 모든 걸 앱으로 조절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다. 샤오미 제품으로 많이 채웠는데, 아파트의 기본 전등과 보일러를 앱으로 연결해서 제어하고 싶다.

미니멀라프도 트렌드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게 미니멀이다. 최소한의 것만 하면 되는데 그게 가장 어렵다. 뭐가 최소인지 뭘 더 제거해야하는지 알기도 어렵거니와 알더라도 이미 채워졌던 잔을 그냥 비우는 게 아깝다고 느낀다. 아파트 입주 후에 웬마한 물건들을 다 갖췄다. 물론 여전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걸 충동구매하고 있기도 하지만… 필요한 건 다 갖췄는데 여전히 아파트가 휑하다. 토요일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할 때마다 큰 가구를 몇 개 더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청소할 공간을 줄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래서 카페트를 사기 시작했다.)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미 많은 것을 가져봤거나 또 언제든지 쉽게 채워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부자가 직접 집을 청소해야 한다면 당장 큰 집을 포기할 거다. 자기가 직접 하지 않기 때문에 미니멀이 가능하다.) 늘 빈곤하게 살던 사람들은 필요할 때 채워넣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을 때도 늘 그때를 대비해서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게 된다. 그렇게 보관하는 게 하나 둘씩 늘어나면 미니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가진 자들과 이미 이룩한 자들의 트렌드를 쫓으며 내 삶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 나이로 43세다. 나 자신을 되돌아볼 때다. 언제는 아니었나 생각하겠지만 최근 이런 고민이 부쩍 심해졌다. 나이가 들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볼 능력을 가졌다는 게 아니다. 그저 그래야만 하는 시기가 됐을 뿐이다. 공자는 나이 40을 불혹이라 했다. 그냥 40세가 아니라 40대 전체를 뜻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시기를 보내면서 완성해가는 거다. 지금 현자를 논하면서 스스로를 살피면 미혹됨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지 않을까라고 기대한다.

연말부터 적던 글이 해를 넘겼다. 이젠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노화의 자연스런 현상이겠거니 한다. "두렵지만 한다” 그렇게 살자.

연말에 도착한다던 책이 해를 넘겨 이제서야 배송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은 읽을 책이 남았으니 이걸로 분노하지 말자. 어차피 연말이니 연초니 하는 거는 인간이 임의로 그어놓은 시간의 선일 뿐이다. 그냥 여느 때같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해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보일러에 의존해서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겨울의 한 가운데 있다. 오전에 잠시 들어오는 한줄기 햇볕이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한달 두달을 보내면 또 꽃 피는 봄이 온다.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면 또 겨울이 찾아온다. 그러면 또 임의로 +1를 할테고 이렇게 숫자를 더하지 않더라도 내 몸은 알아서 늙어가고 죽음을 향한다. 모두에게 예외는 없다. 불의에 참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그림에서 이해하는 거라고 위안하고 위로한다.

최근 ‘신의 입자’라는 양자역학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었다. 아토모스. 더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물질. 수학에서 점과 같은 존재. 존재하지만 질량이 없다. 아니, 질량이 없더라도 존재한다. 우리도 그렇다. 미약하나 존재한다.

계속 적다보니 결론을 못 짓겠다. 그냥 이렇게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서 꾸준히 글을 적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 삶은 비록 시궁창 속이더라도 남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천십구년… 그래, 가자.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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