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있는 삶

Gos&Op 2015.08.17 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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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손학규씨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모토로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노동 시간이 가장 긴 국가다.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또 야근을 한다. 그러니 저녁에 가족과 같이 식사할 수가 없다. 노동 시간과 야근에 더해서 출퇴근 시간이 길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한시간정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면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모두 소진된다. 가족과의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은 사치가 됐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주말이 되면 쌓였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주말마저 사라진다. 그렇기에 '저녁이 있는 삶'은 깊은 울림이 됐으리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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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 아침이었다. 여름에는 창으로 강한 태양 빛이 들어와서 일찍 잠에서 깨곤 한다. 집에서 혼자 할 일이 없으니 출근 시간도 조금 이르다. 아침에 귓가에 들리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전날 제주를 휩쓸었던 폭풍우가 마치 꿈 속에서 경험했던 것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비 온 다음 날의 싱그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회사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이슬을 머금은 풀과 꽃은 축복이다. 그 싱그러움과 상쾌함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 (참고. https://brunch.co.kr/@jejugrapher/25)

그때 문득 나에게 아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침이 있는 삶'을 가져봤던가?를 묻게 된다. 대한민국에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한 만큼 아침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30분이나 한시간정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밤의 피곤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허급지급 일어나서 다시 출근길에서 치이는 그런 아침이 아니라, 한 여름 오후에 우물물로 등목을 할 때 느끼는 그런 시원함을 느끼는 아침말이다. 우리에겐 그런 아침이 필요하다. 그런 아침을 맞이한다면 그날 하루가 즐거울 거다. 그러나 수많은 도시의 직장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나도 잘 안다.

저녁이 있는 삶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면, 아침이 있는 삶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물론 각자 사정에 따라서 아닐 수도 있다. 아침에 짧게라도 혼자서 운동을 하거나 외국어 스터디를 하거나 주변을 산책하거나 아니면 그냥 묵상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위한 투자의 시간, 어쩌면 세상와 완전히 동떨어진 나만의 시간말이다. 누구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밤동안 에너지를 비축했다면 이제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동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게 아침의 역할이다. 그런데 우린 그 시간이 없다.

제조업 등의 극한 노동 현장은 조금 다르겠지만, 일반 화이트칼라 사무실의 아침 풍경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9시 또는 10시에 출근해서 삼삼오오 카페/휴게실에 모여서 커피를 마시면서 30분정도 잡담을 한다. 흡연자들은 카페 대신 흡연실이 될 수도 있다. 출근하느라 지친 심신을 그렇게라도 여유를 주지 않으면 하루를 온전히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이건 너무 소모적이다. 이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서 또 야근을 한다. 만약 출근이 힘든 과정이 아니고 짧더라도 혼자만의 아침/여유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비생산적인 시간이 많이 줄어들 것같다. (티타임이나 끽연타임과같은 소셜 컨넥션이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출퇴근 시간이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우선 짧아야 한다. 이 말이 현실성없다는 것은 잘 안다. 그래도... 

우리는 이제 노동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소모적인 관행이 계속되는 한 노동의 패러다임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같다. 노동의 생산성은 결국 노동자의 집중력에 달려있다. 닭과 달걀의 논쟁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무엇이 닭이고 무엇이 달걀인지는 모르겠으나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즉 온전한 저녁과 아침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도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각성없이 선진국의 9to5 근무 조건을 얻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8시간 근무가 점심시간을 제외한 9-6인데, 미국은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9-5가 일반적인 듯하다.)

온전한 저녁을 가족들에게, 그리고 온전한 아침을 나에게... 나는 나만의 아침이 필요하다. (이 문장의 '나'는 글쓴이가 아니라 글을 읽는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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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인의 부탁을 받고 독서동아리의 토론회 사진을 찍고 왔습니다. 서귀포시 남원에 있는 제주살래 (http://www.jejusallae.com)라는 곳인데, 독서동아리인데 협동조합형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회원은 약 30명인데, 어제 모임만으로 판단하건데 제주로 이주해온 분들을 중심으로 친목 및 정보교류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듯합니다. 제주에는 괸당이라는 토착민들의 끼리끼리주의가 있는데, 어쩌면 그런 것에 반해서 이주민들 사이의 공동체가 아닌가라는 오해 아닌 오해도 해봅니다. 
* 책을 좋아하고 제주 남원 쪽으로 이주하시는 분은 참가해보세요. 항상 열려있는 공동체고, 아래 사진처럼 길가에 그대로 개방되어 문턱이 낮습니다.

토론회 중... 초상권을 위해서 일부러 흐릿한 사진을 택했다는 것으로 인물 사진를 못 찍는 것에 대한 핑계를 대신한다.



말랑말랑한 독서토론회를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전 설명을 하자면 모임 중에 입도한지 반년이 조금 지난 촛불부부가 있었습니다. MB정권 때 촛불집회에서 연이 되어 커플이 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성향(?)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 서울에 있는 또는 페이스북에 연결된 지인들이 대부분 비슷한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부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그런 생각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그들은 제주에서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의 행복을 남에게 알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배낚시를 나가서 ‘나 지금 배낚시하러 왔다’라고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미안해졌습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지인들은 세월호 등의 여러 이슈로 광화문 집회에 참석해있고, 집회 상황을 실시간으로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는데… 그 중간에 ‘여기 제주’라는 행복한 모습을 사진을 생뚱맞게 공유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제주에 와서도 여전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지만, 나만 동떨어진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죄스럽다고 합니다. 살벌한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는 나는 행복해라고 말하는 것은…

반은 좋은 목적으로 여러 사진을 가벼이 공유하고 있는 제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나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시절이 어려울 때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이상화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겠지만 봄이 봄이 아닙니다. 개인의 행복도 처참하고 잔인한 (이웃의) 현실 속에서 행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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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하지 마라.

Gos&Op 2013.05.10 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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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또 주제넘은 짧은 글을 남겼다. 그런 종류의 짧은 글들을 모아서 포스팅을 하나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이 글 생각이 계속 나서 좀 더 길게 적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떤 일을 할 때 희생이란 단어가 떠오른면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이 낫다. 희생은 사랑이 아니라 결국 그저 핑계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밤에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아침에 눈을 뜬 후에도 여전히 생각나서 짧게 글을 적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스스로 희생한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특히 (나도 부모님이 계시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많은 부모들이 스스로 자식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본다.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이제껏 쌓은 경력도 포기하고 사회적 지위도 포기하고 다른 많은 재미난 것들을 포기했다/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식들에게 너만 없었으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말하는 자식을 위한 포기, 즉 희생이 과연 희생일까?

이들이 말하는 희생은 그냥 자기 만족일 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것까지 포기했어라고 말하지만 과연 진정 사랑했던 것일까?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희생했기 때문에 그/그녀는 나에게 빚졌다 또는 감사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찌 진정한 희생일까? 보상을 바라는 것이나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은 사람으로써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생각나는 순간 (고귀한) 희생의 가치가 떨어진다.

내가 지금 세상의 많은 부모들의 희생/사랑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더 이상 희생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누군가 (특히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뭔가를 보상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나기 시작하고 아니면 내가 왜 널 위해서 이런 것까지 해야하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일은 희생/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기 과시이고 나중에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희생은 상대도 편하지 않다. 희생이 희생이 아닐 때 진정 희생이다.

미생 123수의 내용도 조금은 일맥상통한다. 스스로 누군가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해준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지 마라. 그건 희생이 아니다. 그런 희생은 하지 마라. 생각에서 자유로워라.

(물론 나는 나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해줬던 주변의 많은 분들께 내 최선의 방법으로 보은을 할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희생과 사랑을 베풀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가 은혜를 입었다면 그걸 갚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성인군자처럼 무조건적 희생을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나는 속물이니 내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길 바란다.)

(2013.05.01 작성 / 2013.05.10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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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은 내가 다음이라는 회사에 직원으로 첫 출근한 날짜다. 4년을 꽉 채우고 이제는 5년째를 시작했다. 3년 위기설이라는 게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을 읊는다'는 속담과 같이 한 분야에서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그 분야를 훤히 꿰뚤어보게 된다. 그 순간 갈림길을 만난다. 전문가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일이 몸에 배다보면 일을 더욱 효과/효율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전문성 또는 효율성이 다양성과 새로움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개도 경을 떼고 나면 서당이 지겨워질 거다. 3년 위기설의 이유는 현재의 상태에 익숙해질수록 현재에서 새로움을 얻기가 어렵고 일종의 나태에 빠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난 1년을 그렇게 보낸 것같다. 길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있는데, 그래서 재미도 없고 이정표도 없다.


일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손쉬운 방법은 이직인 듯하다. 링크드인 LinkedIn을 사용하다 보면 친구요청을 가끔 받는다. 가입한 초기에는 학교나 회사 지인들을 친구로 추가해서 넣기도 하지만, 현재 친구목록의 절반이상은 헤드헨터들이다. 잊을만하면 친구요청이 온다. 언젠가는 쓸 데가 있을까 싶어서 굳이 거절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에서는 오프라인에서 연결되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친구요청을 거절하지만... 늘 그렇듯이 미인은 제외.^^) 그리고 가끔 헤드헌터들로부터 메일이나 전화를 받으면 '나도 나름 남들이 탐내는 고스펙인간이구나'싶어서 뿌듯하기도 하다. 현재까지는 업무가 지루해졌다고 해서 이직을 고려한 적은 없다. 딱히 갈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직은 아니지만 그냥 때려치울까라는 생각은 가끔 해본 것같다.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마다 사표나 이력서를 작성한다는 어떤 분의 말에 공감이 간다. 나도 나름 고스펙이고 경력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이런 대우에 만족해야하나?라는 자괴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같이 일하던 동료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흔들린다. '나무는 가만 있고자 하데 바람이 가만두지 않는다'라는 말이 단순히 '효'를 말하는 표현은 아닐터... 떠나는 물결에 함께 휩쓸려 떠나고 싶은 충동.

삶의 목표가 성공은 아니었다. 적어도 배부른 동안에는... 2004년도에 미국의 NIST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 Technology)라는 곳에서 게스트로 있는 동안 6개월 정도 체류연장을 결정하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보스로 있던 분이 나에게 몇 가지 물었는데, 그 중에서 연장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행복'이라고 했다. 내가 일을 더 많이/잘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머무르면서 행복한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나도 여러 사람들의 고민을 들으면서 '네가 만족하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라는 식의 충고를 해주고 있다. 안정적인 삶과 도전적인 삶은 양자택일이 아닌 것같다.

최근 상황이 참 복잡하다. 일은 많이 지루해졌고, 별로 중요치도 않은 문제로 중간중간에 인터럽트가 들어오고, 스타트업에 참여하라는 주변의 꾐도 있고, 대기업에 자리가 있으니 지원해보라는 헤드헌트들의 메일도 자주 오고, 떠나가는 동료들도 늘어나고, 혼자서 떠들어도 전혀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러는 회사는 나의 존재감에 신경을 쓰지도 않고 보상도 안 해주는 것같고, 조직은 개편되어 어수선하고, 뚜렷한 목표나 비전을 공유하지도 않고,... 지금이 이적의 적기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나는 지금 행복한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나는 행복의 사다리를 올라간다고 생각했는데, 늘마음 깊은 곳에는 성공의 사다리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지루해진만큼 내 성장도 정체된 것같고, 내가 올라갈 성공의 사다리도 없는 것같고... 그럴수록 행복이 아닌 성공에 집착을 하게 되고 사회/회사에 불만이 커져만 가는 것같다.

일은 더욱 복잡해져간다. 모두가 가는 길과 대부분이 가는 길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아버지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것같다. 더 가까이에 가서 살아야할까? 아니면 이럴수록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할까? 이것도 고민이다. 혼자 살지 말라는 압박도 크다. 왜 안 하냐면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싫은 상황에 빠지기 싫어서 내면에서 거부하고 있는 것같다. 여기가 내가 있을 최선의 장소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다. 모두가 가는 그 길을 가시는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대부분이 가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또는 안 가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안정을 택해도 나는 그저그런 회사의 부속품이 되어버릴 것같고, 도전을 택해도 나는 그저그런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버릴 것같다.

제대로 이룩한 것도 없으면서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도 두렵다. 행복의 사다리는 분명 성공의 사다리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성공의 사다리에 집착하고 있다. 다음 단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집착에 빠진다. 이 또한 두렵다. 갑자기 <The Pursuit of Happyness>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그런데 나의 꿈은 뭐였더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걸까?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같은 삶을 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행복해라고 혼자서 연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꿈을 연기해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다. 오늘도 삶의 넋두리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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