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말

Gos&Op 2014.10.30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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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사람은 죽어서 어록을 남긴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합니다. 언제부턴가 부고기사와 함께 고인의 어록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이 트렌드가 된 듯합니다. 고 신해철씨의 부고 이후에도 그가 내뱉았던 많은 주옥같은 말들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블로그에서 뿐만 아니라 메이저 신문사에서도 그가 했던 말을 다시 전하고 그 뜻을 되새깁니다. 안타까운 현실지만 그의 어록의 생명력이 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대한민국민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록 기사/글들 중에서 저는 슬프게 하는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겨레 신문에 실렸는데 (어쩌면 다른 블로그 포스트 제목이었는데, 지금 검색해서 바로 보이는 것이 한겨레 기사라서 제가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신해철이어서 할 수 있던 말들’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제목을 보는 순간 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좌절했습니다. 비단 이것뿐만 아니지만…

분명 신해철씨는 깨어있는 사람이었고 다양한 사회 부조리에 자신만의 생각을 가졌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더욱이 그것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외쳤습니다. 신해철씨는 분명 이 사회에 깨어있던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만이 깨어있던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어록들을 종합해서 같은 생각/말을 가진 사람은 오직 그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했던 생각/말들의 배경이 된 개별 사건/이슈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대마초 합법화에 대한 이슈도 누군가는 같은 생각으로 찬성했을테고, 대정부 비판 발언도 비슷한 생각을 한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그는 말을 했고 나머지는 침묵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해철씨는 분명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을 했고 우리는 침묵했다.

그래서 제가 슬펐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누구는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데, 다른 누구는 그저 사회에 순응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신해철씨였기에 비판적인 말을 할 수 있었다. 유민 아빠였기에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서 주장하고 단식할 수 있었다. 김제동, 김어준, 주진우,.. 이었기 때문에 정부를 비판하고 낮은 자리에 가서 이웃을 감싸줄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할까요? 분명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개인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용기가 필요한 사안이 된 현실이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모두가 할 수가 있고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 누구기 때문에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그/그녀의 뒤에 숨어버리는 나약하밉니다.

소수의 깨어있는 또는 용감한 사람만이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고 변화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 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주인은 생각과 말과 행동의 권리가 있고, 또 그렇게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미루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저도 반성합니다. 비판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 많이 침묵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그런 비판이 필요한 사안의 심각성이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스스로 분노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의 이면을 깊게 파고들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이는 그저 변명일 뿐입니다.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는 현실이 슬픕니다.

신해철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했어야 할 소리를 그는 했고 우리는 침묵했습니다. 고인의 숭고함을 되새기는 것과 함께 우리의 나약함을 반성하고 우리의 각오를 다잡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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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

Gos&Op 2014.03.14 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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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앱 하나가 기사에 소개됐다. 앱에서는 속풀이라고 표현했지만 회사에 관한 또는 근무하면서 발생한 여러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익명게시판 서비스인 팀블라인드라는 앱이다. 기사가 나왔을 때는 다음은 게시판에 포함돼있지 않았는데, 그저께 다음도 서비스에 포함되어, 앱을 설치해서 바로 가입했다. (내가 이미 글을 적었는지 댓글을 달았는지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날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을테니… 그리고 적더라도 길게는 안 적을 예정임. 내 문체는 내 개인정보처럼 모두에게 식별되기 때문에)

아직 서비스 초기라서 회사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을테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가입해서 열심히 글을 적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많다. 익명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금 과격한 표현도 있고 또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눈에 띈다. 서비스 초기지만 나름 활기를 띈다. 어쩌면 내가 이 회사에 온지 6년만에 처음 보는 활기다. 물론 절대적으로 많은 숫자의 글이 올라오는 것도 아니지만 여지껏 이 정도의 반응을 본 적이 없다. 사내의 공식 게시판을 통해서도 아니면 야머라는 게시판을 통해서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자발적인 열기다.

나는 그런 익명게시판이 좋으냐 나쁘냐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긍정적인 요인과 부정적인 요인은 어디든 존재하는 것이고, 비단 익명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물론 익명성을 남발하는 것은 자제됐으면 좋겠고, 또 특히 떳떳이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도 못하는 찌질이들이 익명성에 의존하는 것은 늘 반대였다. (물론 함구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익명성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밝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함) 적어도 익명게시판을 통해서라도 그동안 경험치 못했던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의 생각 (불평/불만이 대부분이지만)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들이 이것을 통해서라도 울분의 한풀이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한 순간 (나를 포함해서) 이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을까? 어디 속편히 털어놓지도 못하고 그런 불평불만을 속으로만 삭혀야했던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나만하더라도 조금 감정적인 글을 적으면 왜 그렇게 감정적이냐고 피드백을 받고, 또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자제해서 드라이하게 글을 적으면 또 반항하냐라는 피드백을 받는다. 사내 게시판에 한동안 활동을 많이 했지만 이상한 반응들을 본 이후로 (거의) 절필하고, 1년에 1회정도만 가끔 글을 적고 있다. 나는 그래도 나름 남들의 평가나 의식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도 눈치를 보면서 글을 적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보다 더 여리고 착한 사람들은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본다. 그들은 나처럼 속의 이야기를 막 꺼내지 못하고 혼자서 삭히거나 또는 주변의 친한 사람들에게만 조용히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익명게시판이 생겨서 그나마 속풀이라도 하기 시작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보니 그들이 참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참았으며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리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경멸한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싫어지는 거다.)

앞서 말했듯이 사내게시판은 그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다. 물론 꾸준히 하루에도 10여개의 글이 올라오지만, 공지사항, 분실물/습득물 신고, 서비스 장애 등이 대부분이다. 한동안은 그나마 글쟁이들이 있어서 뻘글이라도 적었는데, 그런 사람들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또 회사를 떠나버렸다. 야머라는 좀더 자유로운 공간도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 공개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신세한탄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많은 소리, 다양한 소리는 결국 헛소리였던가라는 자책을 하며 지낸지도 오래다. 오죽했으면, 글쟁이 10명을 모아서 돌아가면서 한명씩 하루에 한 개씩만 적어도 2주 주기로 다양한 글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고, 그걸 실행에 옮길까?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말했듯이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고 이런 모음글도 적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회사/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아왔던가? (물론 나는 표현의 자유가 모든 것이 허용된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인고의 시간 속에서 사람들을 스스로 강압되고 학습돼왔다. 자기검열의 수준을 넘어서 스스로 입을 닫아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익명게시판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 더 크게 폭발하고 더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 이 회사, 그리고 크게는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비록 익명성이 그들을 자유케했지만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원래 말없고 얌전하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인데, 왜 이렇게 투사가 되어가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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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미화해서 글을 마치자면) 많은 글들이 기본적으로 사랑과 관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늘 해외축구 기사에 네스타의 인터뷰 내용이 소개됐는데, 단어 몇 개를 고치면 많은 사람들이 (익명)게시판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네스타는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내 밀란이 아니다. 우리는 대규모 투자를 하거나 큰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선수 영입에 쓸 수 있는 돈이 없다. 이것이 경기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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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을 자유

Gos&Op 2013.06.27 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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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볍게 '하고 싶은 일을 해라'라고 조언을 한다.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마라'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좀 어렵고 무모할 때는 반대와 우려 썪인 격려를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나무라거나 재촉하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자유가 있듯이 하기 싫은 일을 피할 자유도 있다. 
나의 꿈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리마인드시키듯이, 
내가 정녕 피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 없듯이 하기 싫은 일을 모두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조금더 빠르고 바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행함의 자유와 하지 않음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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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회사에 비판적인 글을 적다보니 '그렇게 회사에 불만인데 왜 계속 다니냐?'라는 질문을 간혹 받기는 한다.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련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갈 데가 없다. 능력이 부족하고 인맥이 좁고 의지가 빈약해서 그런 것같지만, 마음이 혹하는 제안을 받지도 않았고 당장 이곳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둔 곳도 없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고 있지도 않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를 헌터형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나는 엄청난 농부형이다. 미래를 결정하는데 적당한 대안이나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야생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거다. 당장 대안을 만들어놓지 않은 상황에서 불만이 있다고 해서 뛰쳐나가는 것은 만용이다. 물론 그냥 뛰쳐나가면 살길이 생긴다.

페이스북에 댓글도 남겼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은 그저 기득권자들의 손쉬운 논리일뿐 바른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물론 조금 있어 보일려고 적었던 댓글이긴 하다.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고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만도 생기고 비판도 하는 거다. 평소에 조용히 있다가 소리소문없이 없어진 여러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어차피 관심도 없는 곳에 와서 참고 사느라 고생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역사는 순응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룩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저 순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언제나 밝혔듯이 나는 자유를 원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속담이 있다. 속담은 그 나름의 오랜 지혜가 담겨있다. 그러나 이 속담도 그냥 일부의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진짜 필요하다면 초가삼간을 태워서라도 해결해야 한다. 만약 빈대가 아니라 모든 나무 기둥을 갉아먹는 개미로 장악된 집이라면 태워 없애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 몇 마리가 눈에 띌 때는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초가삼간을 태워야하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라는 의미에서 꾸준히 비판을 한다.

역사적으로 폭군이라는 악명을 받고 있고 또 사건의 이면에 논란거리가 있지만 새로운 로마는 네로의 선택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옹호할 생각은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곳에 99척 대궐이 지어진다면 결과적으로 더 좋을 수도 있다. 강조하지만 '결과적으로'다. 과정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른 컨텍스트에서 말했던 거지만, '사실이 진실은 아니다.' 내 입을 통해서 발설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다 내 생각이 아닌 경우도 많다. 비겁한 자들을 대신한 경우도 많다. 물론 그게 내 생각과 전혀 맞지 않다면 내 입을 통하지 않을 거다라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수박은 겉으로 속을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침묵의 카르텔에 동참하는 날이 올 거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내 글에 거짓은 없다. 적혀있는 그 이상의 내용도, 함의도 없다. 수고하지 마라. 내 심장은 어느 때처럼 여전히 뛰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아차, 문단을 시작하며 사실이 진실이 아니다라고 적었었지.)

(2013.05.27 작성 / 2013.05.31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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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에 주제 넘게 '교육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도발적인 글을 적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우민화, 즉 생산적인 근로자 양성을 목적으로 했던 근대 교육체계가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미래의 사회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가 창의적인 인재를 요한다면 그런 인재를 키워내는, 아니 학생들이 그런 인재로 자라나게 하는 환경을 준비하면 됩니다. 근대 우민화 교육의 종말을 선언했을 뿐, 교육 그 자체의 효용성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학생들이 실생활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지식을 흡수하도록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경험을 스스로 창조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버려둔다는 말의 함의는 그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창의적 자유를 허용하고, 또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호기심과 도전을 가로막는 교육은 이제 시효를 종료해야 합니다. 미래의 교육은 분명 뇌를 사용하는 것 (암기)이 아니라 뇌를 활용하는 것 (사고/창의)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3차 산업혁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의 말미에 교육에 대한 챕터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느끼고 있는 근대 교육의 문제와 그리고 해결책에 대해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전개해놓은 것을 읽고 놀랬습니다. 리프킨도 근대 교육이 단순히 이미 죽은 그래서 더 이상 효용가치도 없는 지식을 흡수하는 것에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리프킨이 분명히 밝히는 대안은 학생들에게 공감의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작 <공감의 시대>를 읽어보면 더 도움이 될 듯합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은 자연과의 교감을 의미하고, 또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인간/동료와의 교감을 의미합니다. 물론 직접적인 교감에 더해서, IT기술 등의 현대의 이기를 이용해서 전 세계와의 교감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시야를 세계의 수준으로 넓히고 지구 반대편의 인류들과도 소통하라는 것임)

리프킨이 말하는 공감 또는 교감 또는 소통은 결국 interaction을 의미합니다. 자연과의 interaction, 그리고 사람과의 interaction입니다. Interaction이란 달리 표현하면 곧 '경험 Experience'입니다. 자연을 경험하고, 사람을 경험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연을 경험하고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달리 말해서 -- 저의 표현대로라면 -- 주어진 자연 환경 하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풍습, 즉 문화를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책에 적혀있는 문자로 된 지식을 읽고 흡수하는 20세기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서, 주변의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또 더 나아가 다양한 문화를 직접 만들도록 허용해주는 것이 21세기의 교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학생들에게 풀이법을 던져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를 던져줘야 합니다. 그 문제를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새로운 가정 assumptions을 더 하거나 제약조건 constraints을 설정해서 문제를 단순화시킬 수도 있고, 더 발전하면 그런 가정이나 제약사항 중에 일부를 제거하면서 문제를 일반화시킬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면서,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을 스스로 사고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배워야 합니다. (경험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리프킨도 강조한 '토론'을 통해서 공동으로 사고하는 것도 필요하고, 또 인터넷 등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세계의 학생들의 생각을 가미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일전에 다음 제주에서 <인사이드 애플>에 대한 임정욱님의 강연 후에 적었던 <기업의 문화와 철학과 가치는 소중하다>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그 글에서는 쿨선언 The Cook Doctrine으로 알려진 'We believe in...'이라는 글을 소개했습니다. 그 글에 바로 정욱님께서 답글을 달아주셨습니다. 팀쿡이 즉석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팀쿡의 모교인 Auburn University의 신조인 Auburn Creed를 평소에 외우고 다녔고, 이 Auburn Creed이 'we believe in..'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는 미래 교육 (적어도 한국에서는)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바로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또 생각의 틀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쿡이 평소에 Auburn Creed를 암송하면서 수백 수천번 'we believe in...'을 반복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자신이 재직하는 회사의 신조는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도록 해줬을 것이라 유추가 가능합니다. Auburn Creed의 내용을 통해서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신념, 또는 정심을 심어주었고, 그 형식을 통해서는 생각의 틀을 만들어줬습니다. 추측하건데 팀쿡이 언젠가는 'we believe in...'로 시작하는 멋진 말을 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총회의에서 우발적으로 쿡선언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결국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되어야 하고, 좋은 생각의 틀/템플릿을 제공해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경험하고, 교감하고, 생각하고, 창조하고... 교육의 미래는 결국 미래 인재들의 창의성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체계를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이 직접 만들어가야할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금 더 쉽게 만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지원해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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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estima.tistory.com BlogIcon estima 2012.05.25 12: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환님은 참 생각이 깊군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bahnsville.tistory.com BlogIcon Bahniesta 2012.05.26 01:1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그냥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정리도 못하고 적는 것입니다. 요즘은 업무 외의 문화프로젝트 때문에 여러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또 중요한 단어나 개념들을 자주 듣게되고 그러면 또 그것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과 엮어서 글을 적고 싶어집니다.

플랫폼의 조건

Tech Story 2012.03.13 1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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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많은 서비스들이 플랫폼 Platform을 지향합니다. 플랫폼으로 성공한 서비스들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서비스들은 플랫폼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접었습니다. 최근에는 단순히 플랫폼으로써의 서비스를 넘어서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에코시스템으로의 진화에 대한 논의 또는 환상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애플의 아이팟이나 아이폰은 그냥 음악플레이어 또는 전화기라는 플랫폼입니다. 그리고 아이튠스와 앱스토어도 단지 음악 및 앱들을 추천/판매하는 마켓플레이스로써의 플랫폼입니다. 아이폰이나 맥을 돌리는 iOS나 MacOSX 등도 일종의 소프트웨어/OS로써의 플랫폼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뭉쳐져서 그리고 사용자들의 참여가 합쳐져서 일종의 애플 에코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훌륭한 에코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실마리를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멋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더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피플웨어가 결합되면 에코시스템이 조성되는 것은 종종 목격을 합니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서비스의 기획, 개발은 공급자들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데, 사용자들의 자발적 참여는 어떻게 이끌어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서비스가 멋진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실마리는 일부 얻은 것같습니다.

제가 관여하고 있는 많은 서비스들을 어떻게 하면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문득 샤워를 하면서 좋은 플랫폼은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사용자의 지지를 받아야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플랫폼의 조건'이라는 제목의 글을 적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면 훌륭한 플랫폼은 어떤 조건 또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을까요? 앞서 말했지만 기술적으로도 훌륭해야하지만 사용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서 말장난 word play를 해볼까 합니다. 플랫폼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면서 자주 플랫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바로 Platform이 아니라 Flat Home입니다. 여기에 제가 오늘 적고 싶은 내용이 압축되어있습니다. Flat은 평평하다는 의미고, Home은 가정이라는 의미입니다. 훌륭한 플랫폼은 '평평한 집'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Flat/평평하다는 것은 접근이 용이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수평적이다라는 뉘앙스도 가집니다. 그리고 Home/가정이라는 단어에서는 편안하다와 자유롭다 등의 느낌을 받습니다. 멋진 플랫폼이란 '수평적인 가정'과 같이 접근이 용이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플랫폼의 조건으로 친절과 자유라는 키워드를 뽑았습니다. 서비스 제공자들은 사용자들이 해당 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술적인 지원을 해줘야 합니다. 아무리 멋진 서비스라고 해도 이용하기 위해서 수차례의 보안단계를 거치고, 반복적으로 ActiveX를 설치하고, 마이너 브라우저에서는 접속조차도 할 수 없다면 그런 서비스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친절'이라고 말한 이유는 서비스 제공자들이 만든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모든 길/문을 열어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용자들은 그저 간단하게 가입/로그인해서 쉽게 서비스를 이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간단한 작업/프로세스를 진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복잡한 기술적인 로직들은 서비스 제공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해결해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용자들의 쉬운 접근과 용이한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기술적으로 친절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해야 합니다. 마치 자신의 집에 들어가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이웃에게 큰 해가 되지 않는다면 집에서 음악도 좀 크게 틀어놓을 수도 있고, 전라의 몸으로 지낼 수도 있고, 때로는 청소도 안 하고 더렵게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좀 자유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주 짧은 글을 하나 올리더라도 사용된 단어가 비속하다고 글을 등록도 안해준다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서비스의 사용에 제한을 두는 행위가 많습니다. 사용자들은 서비스에 접속해서 즐겁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데, 이런저런 불필요한 각종 규제들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런 서비스를 재방문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습니다. 플랫폼이란 단지 사용자가 머물 공간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운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한 공간인데, 사용자들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다면 그런 공간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법적인 문제나 미풍양속/에티켓에 어긋나는 경우에 대한 규제가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용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또 간단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지 그들이 다시 찾아서 애용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실패하는 많은 제품이나 서비스들을 보십시오. 우선은 기술적으로 열등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용하기 불편하거나 사용자의 니즈/욕구는 전혀 고려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훌륭한 플랫폼은 편안한 플랫홈입니다. 잘 건축된 하드웨어로써의 집과 그곳을 채우는 가족과 그들 사이의 채우는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자유와 즐거움... 이게 우리가 원하는 그리고 성공하는 플랫폼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런 플랫폼들이 모여서 큰 마을이 형성되고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에코시스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글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아침에 갑자기 플랫폼은 친절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라는 새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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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도 글을 적었는데 (다음에서의 3년 3 Years in Daum), 또 1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업무적으로는 지난해의 포스팅에서 크게 다를 바도 없습니다. 그냥 무난하게 보낸 1년정도로 평가하면 됩니다. 무난함이 제 인생을 설명하는 유일한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4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점점 한계에도 부딪힌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삶이 도전이 아니라 일상이 되면서부터 그날이 그날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냥 주어진 24시간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지난 주말에 애월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문득 스쳐간 생각이 있습니다. 제주에 내려온지도 4년이지만 나는 제주에서 어떤 사람인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뭍사람들은 제주하면 관광지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4년동안 제주에서 살면서 관광객으로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제주의 토박이 현지인으로 융합되지도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저는 낯선 이방인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제 성격에 극적인 변화가 없는 이상은 제가 현지에 유합되어 살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제주에서 관광객으로 한번 살아보자라는 결심입니다. 4년동안 많은 곳들 돌아다녔고 꽤 유명한 식당들도 돌아다녔지만, 늘 관광객이 아닌 그냥 지친 삶의 여유를 위한 순간의 산책이었고 굶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맛집들을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그냥 편하게 즐기기 위해서 제주를 돌아다녀보지도 못했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5년차를 맞으면서 이제 관광객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여유와 자유의 시간을...

 그러고 보니 지난 1년은 제주에 제대로 정착하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었습니다. 4월 봄부터 계속 제주의 단독/전원주택을 알아보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제주의 부동산 특성도 많이 파악했고, 내가 가진 능력이 너무 작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인정해주도 않는 높아진 저의 눈만 확인했습니다. 가진 것은 없으면서 눈만 높으니 아직 집을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에 타협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차선책으로 직접 주택을 지어볼까?라는 고민이 계속되는데, 5년차를 접어들면서 부동산 경기에 대한 걱정도 생겨나고 다음에서의 제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까라는 현실적인 걱정도 생겼습니다. 이 현실적인 걱정 때문에 관광객으로써의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로 발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한해도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더 좋은 서비스에 대한 생각들도 있었고, 더 멋진 삶에 대한 생각들도 있었습니다. 서비스에 대한 얘기는 이 글에서는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더 멋진 삶에 대한 생각 중에 하나는 바로 제주의 삶에 대한 책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주위의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십시일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더욱더 관광객으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지 하나의 잘 익은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새롭게 카메라도 장만해서 더 멋진 풍경들도 담고 싶습니다. 더 많은 나만의 추억이 더 많은 우리의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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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삶을 설명하는 세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그렇게 살았다는 의미보다는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의 키워드입니다. 여러 번 밝혔는 것같은데 바로 자유 다양 재미입니다. 삶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삶에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 우리는 빈곤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상상력이 빈곤해지고 열정이 빈곤해지고 도전이 빈곤해집니다. 첵바퀴 일상에서는 상상력도 열정도 도전도 필요없습니다. 그런 삶은 자유도 다양도 재미도 없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광객으로 살기는 이 세가지 키워드를 잘 설명해주는 것같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제 삶에는 반감기가 있습니다. 처음 20년은 경산에서 살았습니다. 다음 10년은 포항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면 제주에서의 삶은 5년정도가 될까요? 그렇다면 올해가 더욱더 중요한 해가 될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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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 몇 년만에 찾아온 화이트크리스마스지만, 전 그래서 집에 갇혔습니다. 누구 만날 사람도 없고, 그냥 쓸쓸히 이 고독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일러를 껐더니 방안에 한기마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부터 1월 2일 (일요일)까지 장기휴가에 들어갑니다. 물론, 다음주중에는 다시 회사에 나가서 밥도 먹고, 생각나는 일들도 다시 점검하고, 또 내년을 구상하겠지만, 어쨌던 형식상 장기휴가에 들어갑니다. 지난 주에도 말했지만, 다음에 입사 이후에 수행했던 여러 프로젝트와 서비스들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시간을 먼저 가질려고 했지만, 어제부터 또 다른 글에 대한 욕구가 밀려왔습니다. 제가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 회사 '다음'에 대해서 처음부터 가졌던 안타까움과 바램을 적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루 밤이 지난 지금은 어제 가졌던 그 오리지널 생각이 많이 희석되어, 전혀 딴 생각으로 탄생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과 글을 이러가려고 합니다.

 제가 다음에 바라는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바로 '자유'입니다. 물론, 고삐풀린 망아지가 누리는 그런 방종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자유... 당연히 누려야하지만 누리지 못하는 그것 말입니다. 자유. 저의 가슴을 뛰게하는 몇 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학술적인 부분에서는 네트워크,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십자가, 그리고 사회적인 부분에서는 바로 '자유'입니다. 제가 너무 이상적인 사고에 파묻혀서 현실을 외면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 머리와 가슴 속에 담아둔 그 이상이 없다면 저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누리고 살겠습니까? 제 가슴을 뛰게하는 그 단어 '자유'가 제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의 철학과 모든 서비스에서 발현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지난 3년간 단 한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스스로 포기해버릴까?라는 생각도 무수히 가졌고, 그냥 타협해버리자라는 생각도 무시히 가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 바램과 이상에는 큰 변화는 없는 것같습니다.

 저는 다음을 사랑하고 애용해주시는 모든 다음의 사용자/고객분들께서 다음에 접속하는 순간 '자유'를 느끼고 '자유'를 누렸으면 합니다. 아직은 그런 체계와 플랫폼을 제대로 갇추지 못했지만, 언젠가 그런 시스템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다음에 접속한다. 그래서, 난 자유다.'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날을 꿈꿉니다. 국내외의 모든 사용자분들이, 미디어다음에 접속을 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사회부조리에 울분이 생기고 하소연하고 싶을 때는 아고라에 접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또 그런 공감을 가진 분들의 위로와 협력을 구하고, 일상 생활에서 아쉬운 부분이나 재미있는 사연들은 미즈넷 (현재는 너무 사회변태적 얘기들로 가득차있지만)에 올려서 인생상담도 받고, 자신의 전문성을 또 사회와 공유하고 싶은 분들은 또 다음/티스토리 블로그를 만들어서 자기의 기술과 생각을 세계에 공유하고... 그런 모든 과정 속에서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뤄지고, 또 그런 개인의 사소한 자유가 사회나 정부의 공권력 등에서도 보호를 받는 그런 모습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굳이 민주주의의 이상이라든가 표현의 자유라는 사치스러운 얘기를 꺼내지 않겠습니다. 그냥 그런 자유... 다음의 로고를 보는 순간 그리고 다음이라는 회사/서비스를 생각하는 순간 '아, 그래 자유. 그것은 원래부터 내것이었어.'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물론, 그런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자기절제와 사회규범/미덕을 어겨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에티켓이나 미덕마저도 다음을 이용하는 모든 사용자들의 공감 내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욕설 등의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는 그런 찌질이들에 대한 자율규제까지도 꿈꿨습니다. 정부의 법에 의해서 또는 회사의 이익에 의해서 사용자들의 자유가 제한되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사용자들의 공감 내에서 절제되고 정제되는 그런 상태를 꿈꿨습니다.

 (이 패러그래프는 이 글의 전체 맥락에서 열외로 읽어주세요.) 이렇게 사용자들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듯이, 또 그런 다음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사용자들이 다음이라는 서비스에서 자유를 느끼는 동안, 그런 서비스를 기획, 개발, 운영하는 이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너무 이상하잖아요. 다음이라는 회사의 문화가 그런 자유에 바탕을 두고 진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졌습니다. 사용자들에게 이상을 심어주듯이, 우리도 그런 이상 위에서 바로 서는 모습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늘 바로 말했습니다. 내가 맡은 업무/서비스 외적인 부분이지만, 문제가 있거나 제안사항이 있으면 바로 알려서 공유/공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바로바로 알려주고 제 생각을 덧붙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제 생각과는 다르더군요. 저의 가공되지 않은 거친 표현에 상처를 받았다는 분들에 대한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들이 받은 상처 이상을 저 또한 받았습니다. 불을 켜기 위해서 초가 희생당하는 것과 같은...) 다음이라는 회사... 전체적으로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분위기가 매우 좋습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병폐들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늘 안타깝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굳이 언급할 내용은 아닌 것같네요. 요는, 사용자들에게 다음 서비스를 통해서 자유를 주듯이, 회사 내부에서도 그런 서비스를 만들면서도 '자유'를 만끽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쓸데없은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회사가 가지고 있는 그런 크고작은 문제들이 다음이라는 회사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비록 그 심각성이 작더라도, 저는 그 작은 부분도 제거해버리고 싶을 뿐입니다. ... 전 또 이 글 때문에 소위 또 찍히겠죠? 그래도, 전 말합니다. 방종과 자유 사이에 놓여있지만... (방종에 더 가깝다는 건 압니다.) ... 지난 주에 구글의 G메일을 개발한 분이 블로그에 글을 적었더군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무시하는 시스템/개인은 도태된다고... 그래서 전 더 뼈아프게 치부를 찌를 겁니다.>

 그런데, 굳이 사용자들이 자유를 누릴 공간이 다음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것입니다. 답변은 '다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상을 실현시킬 곳이 다른 어느 곳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랩입니다. 네이버면 더 좋습니다. 다음보다 더 많은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서비스가 그런 이상을 구현해준다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네이버는 너무 먼 길을 가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주위를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네이트는? 글쎄요. 아직은 힘이 적습니다. 그리고 모기업에 대한 인식을 아직은 깨끗이 지울 수가 없습니다. 구글.. 예, 인터넷의 성지 구글도 좋은 대안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번 지적했지만 구글도 그 구글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국수주의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다음'이다라는 결론은 아닙니다. 다음이 가진 몇 가지 장점을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듯이 다음은 대한민국 인터넷 1세대에는 1등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몰락을 거듭해서 지금은 2등기업입니다. 정상에서 내려온 지금 자아를 반성하고, 더 깊은 철학적 고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 고민의 끝에 재도약을 위해서는 사용자들에게 제대로된 가치와 이상을 줘야합니다. 그런 가치와 이상으로써 '자유'를 외치는 것입니다. 사용자들과의 그런 가치와 이상, 철학의 공유가 없이는 절대 재도약이 불가능합니다. 그냥 마음씨좋은 동네형으로써의 다음 (On Daum)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리더로써 다음 (Your Daum Your Future Your Voice - 당신의 다음 당신의 미래 당신의 목소리)을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사용자분들이 다음을 많이 애용해주시잖아요. (검색만 좀 더 얘용해주시면 금상첨화일텐데... 좋아질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애용자분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는 것이 필요하겠죠. 그분들이 다음을 왜 애용하는걸까?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해봅니다. 그냥 관성에 의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진정 제가 말하는 그런 '자유'를 줬기 때문에 그분들이 애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을 생각할 때, '자유'를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다음의 사용자들이 다음에 대한 오너쉽 Ownership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그 서비스를 기획/개발/운영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고객님들의 것입니다.

 '다음'이라는 사명에서 당신의 '미래'를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를 생각하셨던 분들은 그 미래와 목소리가 바로 '자유' 아닌가요? 다음을 통해서 당신의 목소리를 찾고 당신의 미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제가 꿈꾸는 '다음'입니다.

 또 하나의 꿈은 이상이 나만의 꿈이 아닌, 우리의 꿈이었으면 합니다.
 Our Daum Our Future Our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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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난 자유다.

Gos&Op 2009.04.30 1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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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변명이 생각나는 시점이지만
어쨌던 난 자유다.
후회는 나의 것이 아니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없기에 세상과 함께 숨쉰다.
그래서 난 자유다.

내가 원하는 걸 항상 갖게 해주셨지만 내게 필요치 않은 것을 허락하신 적이 없다.
He never denied my request, nor allowed what I don't need.
그래서 난 자유다.

본질이 아닌 것은 나에 대해서 말하지만 나를 말하는 것은 나 자체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내가 읽는 책들이, 내가 적고 있는 글들이, 내가 아는 또 나를 아는 사람들이, ...
그 어떤 것도 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본질 Essence이 아닌 허상 Image에 갖혀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난 자유다.

He only grant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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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Gos&Op 2009.04.13 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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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같다.
높은 곳에는 거울이 없나보다.

헛된 욕심과 부질없는 기대심만이 내 삶을 꽉 채우고 있다.
자유를 원했지만 외로움만이 남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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