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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0 온 페이스북, 아이엠.
  2. 2012.03.21 무존재의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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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적은 '대한민국의 페이스북 사용자 연령분포'에서도 보여지듯이 참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전체 인구 대비로는 20%정도 밖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젊은층은 대부분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가입만하고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겠지만, 페이스북을 통해서 수많은 연결이 완성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밤에도 문득 '어느 순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 상에 존재하는 것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페이스북 친구가 500면이 채 되지 않으니 모든 지인들과 친구를 맺은 것도 아님은 확실하지만, 순간순간 아는 사람들이 여기 다 있네라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간혹 전혀 모르는 사람의 프로필을 볼 때 뮤츄얼프렌드에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을 보거나 전혀 엉뚱한 두 사람이 연결되어있는 것을 보면 세상 참 좁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페이스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이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이스북 상에 존재하지 않는 친구의 안부는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고 잊혀지는 것같습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간 관계가 확장될 거라는 기대를 많이 가졌습니다. 실제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서 예전에는 모르는 던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멀리 떨어져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구들의 소식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또 우리는 페이스북 상에서만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페이스북에 매일 사진이나 글귀가 올라오는 그는 잘 지내고 있나보다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그 사람의 진짜 안부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라이크 한 방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에서 아날로그 감성은 사치에 불과합니다.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공유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는데, 현대인들은 '나는 페이스북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이상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바타만 존재할 뿐입니다.

(2013.06.02 작성 / 2013.06.10 공개)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unexperien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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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존재의 증명

TSP 2012.03.21 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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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 보면 얼핏 보기에 역설적인 주장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도 야보고는 야고서에서 '구원은 믿음이 아닌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 또는 행위를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역설이지만, 신학적으로 이미 정리된 문제다. 짧게 설명해서, 로마서는 초신자, 특히 이방인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거짓 행위가 아닌 의를 향항 믿음을 강조한 것이고, 야고보서는 이미 믿는 이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과 그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로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한 선교인인 짐 엘리엇 Jim Elliot[각주:1]의 전기 <전능자의 그늘 Shadow of the Almighty[각주:2]>에 보면, 신약성서에서 명시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행위에 더해서 한가지가 더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인간/그리스도인의 '존재'가 그것입니다. 신앙인의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존재'라는 단어를 꺼집어 내기 위해서 좀 멀리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 또는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고, 이성 앞에서 멋지게 보이려고 온갖 아양을 떠는 것도 자신의 존재/매력을 뽐내기 위한 것이고, 회사에서 무진장 애를 쓰면서 충성하는 것도 자신의 존재를 상사에게 알려서 고과점수를 잘 받으려는 그런 행위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과 같이 누군가로부터 내가 인정을 받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으면 자연스레 즐거워지고 더 깊이 충성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체화된 무기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존재의 증명 경쟁에서 저는 오늘 무존재라는 말을 꺼내고 싶습니다. 평소에 블로그를 통해서나 트위터/페이스북을 통해서나 아니면 사내 게시판을 통해서나 가끔 제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사회나 회사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더욱 분노하고 그 분노를 굳이 숨기려하지 않습니다. 꼭 부조리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안들에 대해서 좀 비꼬는 식으로 말을 하고 글을 적다보니, 사람들은 제가 그들이 관심이 있을만한 사안에 대해서도 뭔가 깊은 생각이나 비판, 의견이 있을 걸로 기대를 합니다. 그래서 가끔 '너는 XX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곤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그 XX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합니다. 뭔가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그동안 제가 쌓아놓았던 명성/평판이 일순간에 허물어질 것같은 부담감도 느낍니다. 

평소에 이런 저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고 (사실 독서량에 비해서 주제의 범위는 제한되어있음), 글을 적을 때도 다양한 소스에서 소재를 빌려오고 있지만 (이 글에서 신약성서와 짐 엘리엇을 꺼냈듯이) 저는 만물박사가 아닙니다. 저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제가 관심이 있는 주제와 사안에 대해서만 깊이 생각합니다. 관심이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저의 존재하지만, 그렇지 못한 주제에 대해서는 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든 사안들에 대한 의견을 가져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굳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제게 묻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굳이 제 스스로 저의 '무존재'를 증명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도 다른 이들과 같이 저의 존재만을 증명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너무 벅찹니다.

  1. 짐 엘리엇은 자세한 정보는 위키백과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문구를 소개하려 합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본문으로]
  2. '전능자의 그늘'은 짐 엘리엇의 어린 시절부터 신학교시절과 선교사를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에콰도르에서 선교를 시작해서 큰 성과를 못 내고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기간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짐 엘리엇의 전기는 아니지만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부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선교사역을 계속 이어가는 내용은 <영광의 문 Through Gates of Splendor>에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기독교인이고 선교에 뜻이 있는 분들이라면 위의 두 전기를 필독해볼 것을 권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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