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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오만과 편견

영국의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이 적은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설이 있다. 여러 차례 영화로도 나왔던 유명한 작품이다. 대학원 시절 영화 (2005년작 오만과 편견)는 봤던 기억이 나지만, 자세한 내용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결혼 적령기의 젊은 남녀들이 가지는 남성의 오만과 여성의 편견에 대한 심리를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책/영화 소개평에 적혀있다. 전형적인 멜로물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따르기에 요즘 소설이나 드라마의 복잡한 구성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시시한 사랑 이야기정도로 밖에 읽히지 않을 듯하다. (여담. 왜 여성 작가는 여류/여성작가라고 부르고 유색인종의 가수는 흑인가수라고 굳이 특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밤에 MS가 Dell에 20억달러를 지원해주면서 델이 상장폐지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MS공식발표) 그냥 '오만과 편견'이라는 표현이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부터 MS가 델을 지원해줄 거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델의 상장폐지까지는 생각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성장한 델이 2000년대 중반부터 애플의 주도로 시작된 컴퓨팅 환경의 변화에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에서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컴퓨터가 만들어진 이후로 여러 업체들이 한동안 왕좌에 올랐지만 10년을 제대로 채우진 못했던 것같다. 소프트웨어나 서비스/솔루션 업계는 조금 다르지만 하드웨어가 주류인 기업들은 10년이상을 정상에 머무르는 것을 보기가 힘들다. 애플도 지금 10년 주기의 끝자락에 놓였다는 경고성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냥 주저 앉을지 아니면 턴어라운드를 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런 주기적인 흥망성쇠는 패턴은 별로 변하지는 않았다.

위의 소식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은 90년대 말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을 때 마이클 델이 한 독설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애플의 회생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그냥 회사를 정리하고 주주들에게 지분을 나눠주라고 독설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0년의 시간 후에 애플은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 요약되는 모바일 혁명의 중심/선두에 자리하고 있고, 델은 그 언저리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신세가 되었다. 이 시기에 잡스가 델에게 똑같은 독설을 했다는 설도 있다. 패러다임이 바뀐 몇 년 사이에 델은 더디어 백기투항에 이르게 된 것이다. PC의 전성기 시절에 보여줬던 마이클 델의 오만/자만은 지금 그들에게 부메랑이 되었고, 한번 휘청한 기업이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그런 편견을 잡스는 바로 깨어부숴버렸다. 그렇기에 위의 기사를 보면서 오만과 편견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머리 속에 떠올랐다.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컴퓨터 완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가격은 가격대로 비쌌지만 성능은 그저그런 수준이었다. 완제품을 구매하면 컴퓨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로 친구들 사이에서 취급되기도 했다. 컴퓨터를 조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부품을 훤휘 꾀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시절에 마이클 델은 인터넷을 이용해서 한 몫 챙길 수가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오프라인 매장의 물류비용을 줄이고, 부품을 다량구입해서 제품의 가격을 낮춰서 성공했던 것이 델의 신화다. 그러나 아이폰을 필두로 나오기 시작하는 제품들은 이제 소비자가 직접 조립을 할 수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 어느 하나도 소비자가 직접 부품을 구입해서 조립할 수가 없다. 그나마 노트북은 하드디스크를 SSD로 바꾼다거나 RAM 메모리정도만 더 끼워넣을 수 있다. 회사 업무가 아니면 굳이 PC를 구입할 필요도 없어졌다. 델이 가졌던 전략적 우위는 시장 자체가 바뀜으로써 무용지물이 되었다. 자신만의 시장을 창출하지 못하는 기업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의 길로 델이 접어든 것같다.

분명 델은 혁신의 상징이었다. IBM이나 HP 등의 완제품 회사들의 틈에서 창조적 파괴를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카테고리의 제품을 내놓지 못하면서 다른 파괴적 혁신의 먹이감이 되어버렸다. 모바일 혁명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같지만 지난 5~6년 이상 천천히 진행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렇게 서서히 진행되었기에 델이 눈치를 못 챘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전략적 우위를 지닌 기업으로써는 당연한 반응이다. MS의 경우도 남이 개척해둔 영역에 규모로 밀어붙이면 성공하던 그런 기억 때문에 모바일OS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같은 과오를 가지고 있다. MS의 발머 역시 델과 비슷한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오만과 편견은 언젠가는 깨어질 것들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깨기는 참 어렵다. 오만과 편견을 깨었다는 표현보다는 오만과 편견을 가진 사람/기업이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같다.

국내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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