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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P

대표성,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연초에 올해 연봉계약서를 사인하기 위해서 유닛장님과 면담을 가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면담 말미에 올해 이루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셔서, 짧게 생각하고 나서 바로 내 이름으로 내세울 수 있는 대표 서비스를 하나 갖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서 5년동안 많은 일들을 했지만, (서비스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딱히 '이건 내 자식이야'라고 우길만한 것은 없었다. 많은 것들을 했지만 결국 내 것은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여러 사람들이 협업을 하기 때문에 서비스에서 내가 차지하는 영역이 작은 경우도 있고, 데이터 분석 및 제공이라는 것이 인터넷/포털 서비스에서 밖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비스를 처음부터 기획했거나 개발의 전과정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라면 이건 내 서비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들 서비스에서 내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어있었다. 또한 자잘한 서비스들도 많이 맡았기 때문에 밖으로 자랑할만한 것도 아닌 경우도 있다. 결국 5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있게 내세울 대표 서비스가 없는 셈이다. 그래서 일전에 적었던 데이터 분석 플랫폼이라도 만들어보고 싶다면서 면담을 마쳤다.

처음 이 글을 적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평소처럼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가면서 '과시적 생산'이라는 제목의 글을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시점이다. 평소에도 잉여력에 대한 글을 몇 차례 적었지만, 잉여력이 어쩌면 과시적 생산으로 이어졌을 것같다는 생각에서다. 과시적 생산은 경제학자 베블린이 처음 사용해서 베블린 효과라고 불리는 '과시적 소비'에서 따온 표현이다. 그런데 과시적 소비는 베블린의 많은 업적과 기여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된다. 그러나 우리는 베블린을 떠올리면 으레 과시적 소비라는 말이 생각나고, 역으로 과시적 소비라는 용어를 들어면 베블린 또는 베블린 효과를 떠올린다. 이 순간 역사상 유명한 사람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하나의 표현이나 이론 등을 남겼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사람의 이름을 딴 법칙도 존재하고 여러 물리 단위도 존재하고 아니면 그/그녀를 대표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생각나는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겠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문과생도 들어서 알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천재인 오일러와 가우스는 오일러 공식 및 상수 (e=2.718...)와 가우시안 분포가 늘리 인용된다. 베이지언 룰은 당연히 베이지의 작품이다. 리만가설이나 푸앵카레 추측, 피타고라스 정리, 힐베르트 공간 등에도 그들의 이름이 있다. 뉴턴-랩슨 메소드에도 두명의 수학자의 이름이 있고, 뉴턴은 고전물리학으로도 대표된다. 보어 법칙이나 브라운 운동, 맥스웰 방정식, 프랑크 상수, 슈뢰딩거의 고양이 등에도 그들의 이름이 붙어있다. 상대성이론하면 아인슈타인이 떠오르고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바로 생각나게 하고, 컴퓨터를 생각하면 바로 폰 노이만과 튜링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 외에도 쿨롱이나 줄, 파스칼, 옴, 와트, 볼트, 헤르츠 등의 각종 물리단위에 붙은 이름들에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경제학에서도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멜서스의 인구론,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등도 그렇다. 사계하면 비발디가 떠오르고 베토벤은 영웅이, 다빈치는 모나리자가 떠오른다. 여기서 열거한 것들은 그들이 일생동안 쌓았던 축적/기여했던 것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들을 기억한다. 4대강 하면 떠오른 인물이 있고, 독재자의 딸해도 떠오른 인물이 있는데...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해줄까? 역사 속의 위대한 위인들을 보면서 나도 내 이름이 붙은 뭔가를 남겨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내 이름으로 뭘 남길 것인가?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에서 지역도 그 대표성이 있는데... 나는 뭘로 기억될까? 누구의 아들로 불리기에는 부모님의 명성이 고향마을을 벗어나지 못한다. 출신학교로 기억되기에는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음을 생각하면 창업자나 전혁직 CEO정도만 기억될 뿐 그외의 모든 직원은 그냥 무존재의 존재일 뿐이다. 특정 학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에는 나의 잡학이 방해가 된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대표적인 서비스를 하나 만들면 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할려고 해도 내가 다음에서 이룩한 것을 자랑하기가 좀 그렇다. 갓 졸업한 학생이라면 학교성적이나 학교명성을 팔면되지만, 나같은 경력직에게는 내가 회사에서 이룩한 일들로 평가받고 그 평가에 따라서 연봉이 결정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이직을 마음 먹는다고 해도 내세울 껀덕지가 없으니 걱정이 된다. 나를 주장하기에는 나의 캐릭터가 너무 약하다. (누군가는 '풉'할지도 모르는 소리긴하다.)

대표성이란 일종의 아이덴터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이 느끼는 브랜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처음 시작했을 때 '회사의 대표성은? 그것을 상실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메모를 남겨놨었다. 그래 이노무 회사의 대표성은 뭘까? 10년 전에는 한메일과 카페가 그랬는데, 더이상 아니다. 네이버는 여전히 지식iN이 있고, 카카오는 카톡이 있는데... 다음의 대표성은 뭘까? 개나소나 다 가진 그런 것이 아니라 다음만의 고유함이란 게 남아있을까? 처음 다음에 들어와서 촛불집회의 열기가 한참일 때 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강조했다. 다음은 사용자들에게 마지막 자유의 공간이어야 했다. 가치판단이 필요할 때 내가 가장 먼저 들이대는 잣대가 바로 '자유'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었는데... 다음을 대표하는 서비스가 남아있지 않더라도, '다음 = 자유'는 인식을 심어준다면 그냥 돈 잘 벌어주는 그런 서비스/제품보다는 더 소중한 가치와 대표성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여전히 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대표성은 뭔가요?

(2013.01.29 작성 / 2013.02.01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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