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 글을 적고 싶었고 또 어제 퇴근하면서 페이스북에 글을 적었는데 글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노트를 펼친다.
*** 주의. 서론에는 상당히 보기 거북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으니 제가 쓰고 싶었던 글을 보고 싶은 분은 '본론을 넘어 결론은 이렇다.' 이후부터 읽으세요.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96년도다. 어릴 적부터 서울(에 있는)대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서울에 간 사람들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매우 어릴 때부터 가졌던 것같다.
나이가 들면서 지방에서는 대학을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아갔지만 그래도 어릴 적 결심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이과였고 서울이 아니더라도 대전이나 포항에 좋은 대안이 있었다.
만약 과학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면 대전을 향했을텐데, 내 중학교 성적은 과학고를 갈만큼 우수하지는 않았다.
또 이를 악물로 굳이 과학고로 진학을 해야하는 목표의식도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공부하면서 그냥 상위권을 유지했던 것같다.
참고로, 5학년 생활을 이틀남겨둔 1989년 2월 22일 (날짜가 맞을 듯)에 대구의 만촌초등학교로 위장전입해서 전학했다. (위장전입... 고위공무원되기에는 벌써 수틀렸다.)
그리고, 운좋게도 나름 수성구에서 좋은 중학교였던 (학교명성도 그렇고 내가 통학하기에도 편했던)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학년별로 총 10개반으로 총 500명 정도가 한 학년이다. 그때 내 석차는 500명 중에 겨우 50위를 턱걸이할 수준이었다.
겨우 10%에 드는 아이가 과학고를 꿈꿀 수는 없었다. 반에서 1, 2등하는 애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
어릴 때는 악착같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기에 더 높은 점수를 얻지도 못했던 것같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 진짜 남들 하는 만큼만 했다. 그만큼도 안 하는 아이들 때문에 그래도 내 성적/석차가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3년을 겨우 10% 선에서 유지하다가, 대구지역은 고교평준화로 소위 말하는 뺑뺑이를 통해서 오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지금도 그리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대구 수성구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 중에서 오성고가 가장 딸리는 학교다.
주변에 경북고, 경신고, 덕원고, 대륜고 등에 비하면 한참 밑도는 학교다.
당시에 학교건물도 산 위에 지어졌고, 완전히 흰색으로 도색되어 정신병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 주변을 지나가면 산 위에 정신병원이 있는 것처럼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오성고등학교는 명성도 별로였는데, 한 학년에 8개반 총 400명 밖에 안 된다.
규모가 경쟁력인 사회에서 학생수가 적으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여력도 부족했던 것같다.
고등학교에서도 난 그렇게 심하게 공부를 한 것같지 않다. 그런데도 반에서 꾸준히 2/3등정도는 했던 것같다.
모두 뺑뺑이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학교에만 열등한 애들이 왔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5등을 하던 애가 고등학교에서 2/3등을 했다는 것이 산술적으로 좀 납득이 안 간다.
그렇게 3년을 보냈고, 졸업할 때도 내신 1등급은 받지 못하고 2등급으로 졸업했다. 400명 중에서 13위로 기억한다.
수능성적인 정확한 기억은 어렵지만 당시 200점 만점에 168점 정도 받았던 것같다.
핑계를 좀 대자면, 우리 때 시험이 조금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 나쁜 점수는 아니다.
대학 동기들 중에서도 잘 받은 애들도 175점을 넘긴 경우를 거의 보기 힘들었으니...
전국 퍼센티지로는 상위 약 0.3% 정도에 들어가는 점수였다.
어쨌던 2등급, 수능 168점으로 서울대 재료공학부와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지원했다.
(서울대는 진짜 등떠밀려서 지원했던 거고 원시료나 본고사를 위해서 이동, 숙박 등 돈만 낭비했다.
당연히 떨어졌기 때문에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포항공대에서도 1순위로 붙은 건 아니다. 정원 30명이었는데, 특차로 한 10명정도가 이미 선발되었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본고사를 통해서 선발했는데 나는 그 20명에도 속하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후보 2~30위 정도는 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학을 떨어져서 재수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대구에 대성학원이 있었지만, 서울의 종로학원 행이 거의 유력했다.
그런데 선순위 학생들이 모두 서울로 향했기에 난 운 좋게 또 턱걸이로 포항공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제 처음에 적고 싶었던 내 대학생활로 들어간다.
어렵게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나는 생각없는 대학생활을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여러 과제나 시험 등에 늘 지쳐서 어쩔 수 없는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나의 미래와 조국/사회의 미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적이 없다.
난 그저 생각없이 편안한 대학생활을 했다.
대학에서는 고등학교 때보다는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같다. 참 아이러니하다.
어째서 우수한 인재드이 모인 곳에서 여전히 난 상위 10%정도의 학점을 받았는지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고맙게도 여전히 나의 베프들인 동기들의 희생으로 나는 그래도 높은 점수를 유지했던 것같다.
대학에서 나는 그냥 그렇게 학점만 따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악착같이 학점 사냥을 나서지도 않았다.
1학년 1학기와 2학년 1학기에 4.3만점에 3.대 초반의 학점을 받았고, 나머지 학기는 모두 3.4 이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최종 3.55/4.3의 학점으로 졸업했다. 더 자랑하자면 아무나 받는다는 Magna cum laude였다.ㅋㅋ
(석사 때 평점이 가장 낮은 3.51이었고, 박사 때는 평점 4.0이었다. 석사 때는 여러모로 우울했다.)
내 대학생활의 요는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좋은 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학점을 받으면서 전혀 생각없이 대학생활을 했다는 거다.
내가 대학을 졸업해서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내가 졸업해서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전혀 없었다.
그냥 흐르는 시간에 맞춰서 과제나 제때 제출하고 상위권 학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험성적 관리만 하면서 지냈다.
난 생각없는 대학생활을 했다. 그게 나였다. 생각없는 사람...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더 흘러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미국에서 프리닥 Pre-doc (박사후과정 Post-Doctorial Researcher에 비유해서, 학위를 받기 전에 해외연수/연구에 나가는 걸 그냥 프리닥이라고 불렀다. 정식명칭은 아닐 듯)을 하고 그렇게 지낸 후에,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정립되었을 때 후배들을 보니 참 생각없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런데 내가 목격했던 후배들의 그 모습이 바로 내가 몇 년전에 생활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후배들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목표가 뚜렷한 경우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없다고 표혀한 것은 개인의 비전/목표의 수립여부와 사회에 공헌 여부를 말한다.
나도 생각없는 대학생활을 했지만, 후배들이 나와 똑같이 생각없는 대학생으로 있는 것이 참 속상했다.
이 당시에 나의 시니컬한 성격이 더 강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본론을 넘어 결론은 이렇다.
그런데 지금 대학생들은 너무 생각이 많다. 그들의 나이에서는 결코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 될 생각으로 넘쳐난다.
바로 지금 문제가 되는 비싼 등록금과 그걸 마련하기 위해서 악전고투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많은 서민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는 결코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봐서는 안 된다.
(물론, 그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그것 이상의 어두운 사회를 보면서 자라는 것도 가슴이 아프다.)
지금 한참 젊은 그들은 내가 그들의 나이에 그랬던 것처럼 생각없이 지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누렸지만 지금의 친구들은 그 생각없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젋은이들은 꿈을 꾸고 비전을 그리고 목표를 세워서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고민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받았고 누렸던 그 혜택을 지금 젊은 세대들이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그렇다고, 또 생각없이 그들에게 돈이 없으면 대학에 가지 말라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이 사회라는 곳이 가방끈의 길이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높이가 비례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상위 높이는 단순히 가방끈만으로 범접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장벽도 있지만...
이 사회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소위 말하는 제대로된 정규직을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비싼 등록금때문에 대학생활을 포기한다면 소위 말하는 88세대요 비정규직 세대로, 백수/백조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대학을 포기해라라고 쉽게 말할 수가 없다. 가슴 아프다.
... 글을 계속 이어가면 한숨이 깊어질 것같다.
결론은 우리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가져야할 생각을 가지게 해주자. (비전, 미래, 그리고 사회)
그리고 그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생각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자. (부조리와 불확실성)
내가 누렸던 그 생각없음을 그들도 누려봤으면 좋겠다.
처음에 일종의 자랑으로 시작해서 마무리는 제대로 못 짓고 또 글을 마친다.
5년 전에는 나의 생각없던 대학생활이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나는 내가 너무 미안하다.
어쩌면 그때의 나/우리의 생각없음이 나비의 날개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노트를 펼친다.
*** 주의. 서론에는 상당히 보기 거북한 내용이 포함되어있으니 제가 쓰고 싶었던 글을 보고 싶은 분은 '본론을 넘어 결론은 이렇다.' 이후부터 읽으세요.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96년도다. 어릴 적부터 서울(에 있는)대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서울에 간 사람들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매우 어릴 때부터 가졌던 것같다.
나이가 들면서 지방에서는 대학을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차츰 깨달아갔지만 그래도 어릴 적 결심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이과였고 서울이 아니더라도 대전이나 포항에 좋은 대안이 있었다.
만약 과학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면 대전을 향했을텐데, 내 중학교 성적은 과학고를 갈만큼 우수하지는 않았다.
또 이를 악물로 굳이 과학고로 진학을 해야하는 목표의식도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공부하면서 그냥 상위권을 유지했던 것같다.
참고로, 5학년 생활을 이틀남겨둔 1989년 2월 22일 (날짜가 맞을 듯)에 대구의 만촌초등학교로 위장전입해서 전학했다. (위장전입... 고위공무원되기에는 벌써 수틀렸다.)
그리고, 운좋게도 나름 수성구에서 좋은 중학교였던 (학교명성도 그렇고 내가 통학하기에도 편했던)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학년별로 총 10개반으로 총 500명 정도가 한 학년이다. 그때 내 석차는 500명 중에 겨우 50위를 턱걸이할 수준이었다.
겨우 10%에 드는 아이가 과학고를 꿈꿀 수는 없었다. 반에서 1, 2등하는 애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
어릴 때는 악착같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기에 더 높은 점수를 얻지도 못했던 것같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 진짜 남들 하는 만큼만 했다. 그만큼도 안 하는 아이들 때문에 그래도 내 성적/석차가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3년을 겨우 10% 선에서 유지하다가, 대구지역은 고교평준화로 소위 말하는 뺑뺑이를 통해서 오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지금도 그리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대구 수성구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 중에서 오성고가 가장 딸리는 학교다.
주변에 경북고, 경신고, 덕원고, 대륜고 등에 비하면 한참 밑도는 학교다.
당시에 학교건물도 산 위에 지어졌고, 완전히 흰색으로 도색되어 정신병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 주변을 지나가면 산 위에 정신병원이 있는 것처럼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오성고등학교는 명성도 별로였는데, 한 학년에 8개반 총 400명 밖에 안 된다.
규모가 경쟁력인 사회에서 학생수가 적으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여력도 부족했던 것같다.
고등학교에서도 난 그렇게 심하게 공부를 한 것같지 않다. 그런데도 반에서 꾸준히 2/3등정도는 했던 것같다.
모두 뺑뺑이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학교에만 열등한 애들이 왔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5등을 하던 애가 고등학교에서 2/3등을 했다는 것이 산술적으로 좀 납득이 안 간다.
그렇게 3년을 보냈고, 졸업할 때도 내신 1등급은 받지 못하고 2등급으로 졸업했다. 400명 중에서 13위로 기억한다.
수능성적인 정확한 기억은 어렵지만 당시 200점 만점에 168점 정도 받았던 것같다.
핑계를 좀 대자면, 우리 때 시험이 조금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 나쁜 점수는 아니다.
대학 동기들 중에서도 잘 받은 애들도 175점을 넘긴 경우를 거의 보기 힘들었으니...
전국 퍼센티지로는 상위 약 0.3% 정도에 들어가는 점수였다.
어쨌던 2등급, 수능 168점으로 서울대 재료공학부와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지원했다.
(서울대는 진짜 등떠밀려서 지원했던 거고 원시료나 본고사를 위해서 이동, 숙박 등 돈만 낭비했다.
당연히 떨어졌기 때문에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포항공대에서도 1순위로 붙은 건 아니다. 정원 30명이었는데, 특차로 한 10명정도가 이미 선발되었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본고사를 통해서 선발했는데 나는 그 20명에도 속하지 못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후보 2~30위 정도는 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학을 떨어져서 재수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대구에 대성학원이 있었지만, 서울의 종로학원 행이 거의 유력했다.
그런데 선순위 학생들이 모두 서울로 향했기에 난 운 좋게 또 턱걸이로 포항공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제 처음에 적고 싶었던 내 대학생활로 들어간다.
어렵게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나는 생각없는 대학생활을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여러 과제나 시험 등에 늘 지쳐서 어쩔 수 없는 생활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나의 미래와 조국/사회의 미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적이 없다.
난 그저 생각없이 편안한 대학생활을 했다.
대학에서는 고등학교 때보다는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같다. 참 아이러니하다.
어째서 우수한 인재드이 모인 곳에서 여전히 난 상위 10%정도의 학점을 받았는지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고맙게도 여전히 나의 베프들인 동기들의 희생으로 나는 그래도 높은 점수를 유지했던 것같다.
대학에서 나는 그냥 그렇게 학점만 따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악착같이 학점 사냥을 나서지도 않았다.
1학년 1학기와 2학년 1학기에 4.3만점에 3.대 초반의 학점을 받았고, 나머지 학기는 모두 3.4 이상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최종 3.55/4.3의 학점으로 졸업했다. 더 자랑하자면 아무나 받는다는 Magna cum laude였다.ㅋㅋ
(석사 때 평점이 가장 낮은 3.51이었고, 박사 때는 평점 4.0이었다. 석사 때는 여러모로 우울했다.)
내 대학생활의 요는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좋은 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학점을 받으면서 전혀 생각없이 대학생활을 했다는 거다.
내가 대학을 졸업해서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내가 졸업해서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전혀 없었다.
그냥 흐르는 시간에 맞춰서 과제나 제때 제출하고 상위권 학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험성적 관리만 하면서 지냈다.
난 생각없는 대학생활을 했다. 그게 나였다. 생각없는 사람...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더 흘러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미국에서 프리닥 Pre-doc (박사후과정 Post-Doctorial Researcher에 비유해서, 학위를 받기 전에 해외연수/연구에 나가는 걸 그냥 프리닥이라고 불렀다. 정식명칭은 아닐 듯)을 하고 그렇게 지낸 후에,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 정립되었을 때 후배들을 보니 참 생각없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런데 내가 목격했던 후배들의 그 모습이 바로 내가 몇 년전에 생활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후배들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목표가 뚜렷한 경우를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없다고 표혀한 것은 개인의 비전/목표의 수립여부와 사회에 공헌 여부를 말한다.
나도 생각없는 대학생활을 했지만, 후배들이 나와 똑같이 생각없는 대학생으로 있는 것이 참 속상했다.
이 당시에 나의 시니컬한 성격이 더 강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본론을 넘어 결론은 이렇다.
그런데 지금 대학생들은 너무 생각이 많다. 그들의 나이에서는 결코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 될 생각으로 넘쳐난다.
바로 지금 문제가 되는 비싼 등록금과 그걸 마련하기 위해서 악전고투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많은 서민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는 결코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봐서는 안 된다.
(물론, 그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그것 이상의 어두운 사회를 보면서 자라는 것도 가슴이 아프다.)
지금 한참 젊은 그들은 내가 그들의 나이에 그랬던 것처럼 생각없이 지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누렸지만 지금의 친구들은 그 생각없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젋은이들은 꿈을 꾸고 비전을 그리고 목표를 세워서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고민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받았고 누렸던 그 혜택을 지금 젊은 세대들이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그렇다고, 또 생각없이 그들에게 돈이 없으면 대학에 가지 말라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이 사회라는 곳이 가방끈의 길이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높이가 비례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상위 높이는 단순히 가방끈만으로 범접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장벽도 있지만...
이 사회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소위 말하는 제대로된 정규직을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비싼 등록금때문에 대학생활을 포기한다면 소위 말하는 88세대요 비정규직 세대로, 백수/백조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대학을 포기해라라고 쉽게 말할 수가 없다. 가슴 아프다.
... 글을 계속 이어가면 한숨이 깊어질 것같다.
결론은 우리 대학생들에게 그들이 가져야할 생각을 가지게 해주자. (비전, 미래, 그리고 사회)
그리고 그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생각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자. (부조리와 불확실성)
내가 누렸던 그 생각없음을 그들도 누려봤으면 좋겠다.
처음에 일종의 자랑으로 시작해서 마무리는 제대로 못 짓고 또 글을 마친다.
5년 전에는 나의 생각없던 대학생활이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나는 내가 너무 미안하다.
어쩌면 그때의 나/우리의 생각없음이 나비의 날개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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