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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하박국과 한국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한 소회

 최근 들어, 한국 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것같다. 어쩌면 30년 넘도록 애써 외면해오던 한국 교회의 왜곡 (어쩔 수 없이 완곡한 표현을 쓴다)에 대해서 이제 내 스스로 귀를 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끊임이 없었던 그 광야의 외침에 이제서야 조금씩 반응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 '하박국'을 읽었다. 하박국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끝부분에 있는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3: 17 ~ 19)
구절이다. 한국교회에서 불리우는 대표적인 복음성가 중에 위의 본문을 바탕으로 작사/작곡된 곳이 있어서 더욱 친근하고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이 복음 성가는 상당히 즐겁고 흥겨운 가락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위의 성경의 본문은 상당히 우울한 상황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어쩌면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런 상황에 대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죄의 심판의 결과로, 먹을 양식조차 없이 모두 파괴된 그런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잘 아는 어느 목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어느 날 갑자기 말씀하시면서, 왜 그 복음성가는 그렇게 흥겹게 부르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신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 그렇지만 또 그 말씀이 맞지 않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상의 이상을 보면서 분명 무서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또 기뻐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 이런 심판도 모두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의 파멸이나 사탄의 괴략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 심판과 정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우리의 의를 내세울 수도 없을 뿐더러, 그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의 역사를 바꿀 수도 없고, 그분의 역사는 정당함을 인정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비참해보일지 몰라도 그분의 섭리와 역사에 기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선지자는 지금 심판의 그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 그 이후의 상황을 보고 있다. 즉, 지금 눈 앞에서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떨어지고 우리이 양들이 죽어가는 그런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심판의 때가 이미 지나간 후의 상황을 보고 있다. 심판 이후의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선지자는 기뻐할 수 밖에 없다. 비록 폐허지만, 폐허에 남겨진 희망이라고 할까? 분명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지만, 어떠한 계획도 없이 심판하시지 않으신다. 그렇다. 벌써 심판이 내려졌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당연히 기뻐할 수 밖에 없다. "...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한국 교회의 현실, 그리고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나는 하박국 선지자가 본 것을 보고 싶다. 지금의 상황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이다. 답답하고 욕이 나오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드러나기 전에는 우리의 작은 불평은 무의미하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도 기뻐해야 한다. 화를 내면 지는 거니깐... 

 참고로, 하박국서에서 놓치면 안 되는 구절이 또 있다. 바로 2장 4절의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선포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바울에 의해서 로마서 1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두번씩이나 인용이 되어서 더 유명한 구절이다. 보통 사람들은 바울에 의해서 처음 선포된 말씀인줄 아는데, 사실은 하박국 선지자가 바울보다 앞선 4~500년 전에 이미 선포한 말씀이다. 소선지서의 한 구석에 있는 말씀을 다시 회상시킨 바울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다시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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