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편두통 때문에 회사 탕비실에 비치된 약을 먹으러 갔습니다. 탕비실의 약상자는 아래와 같은 작은 서랍장입니다. 약이 섞이지 않기 위해서 각 서랍장마다 각기 다른 약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상자에 어떤 종류의 약이 들어있는지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서랍을 열어서 내부를 보더라도 약품이 캡슐별로 개별 포장되어있기 때문에 약품 뒷면을 자세히 보기 전에는 각각의 캡슐/약품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약품 뒷면에 약품명이 적혀있기는 하지만 효능을 설명한 부분이 잘려나간 경우도 있고, 또 약품명만으로는 어떤 효능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의 경우 잘 알려진 감기약이지만, 구체적으로 두통에 효능이 있는지 아니면 몸살에 효능이 있는지 목감기나 코감기에 효능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약상자/서랍의 겉면에 '감기약' '두통약' '설사약' '소화제' '진통제'와 같이 효능을 알려주는 라벨을 붙여놓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약품상자를 갖다놓은 직원은 분명히 사내의 다른 직원들의 생활편의를 지원하는 것을 업무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즉, 그 직원은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서비스를 담당하시는 분이 사용자들을 좀 더 잘 파악하고 배려를 해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햇습니다. 약을 종류별로 분리해서 넣어주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것을 더 쉽게 찾고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는 것도 담당 직원의 업무였을 것입니다. (처음에 서랍을 열어보기 전에는 약상자였는지도 몰랐음.) 그런데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만인을 위한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들은 과연 외부 고객들을 만족시켜주고 있는가? 또는 그들의 작은 편의도 배려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좀 과격한 표현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서비스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모여서 서비스를 만들고 있으니 서비스가 엉망이고 사람들이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새삼 뼈저리게 느낀다. 스스로 서비스의 대상이 되어보지 못한 가운데 그냥 만들기만 하면 그게 서비스가 된다고 생각하나?
— Jeong, Buhwan (@falnlov) April 6, 2012
오래 전부터 과연 우리는 고객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큰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작은 필요까지도 파악해서 해결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가끔 내외부의 서비스들을 사용해보면서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서비스의 결과물이 엉망인 것을 자주 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가 만들었기 때문에 서비스를 꾸역꾸역 사용하지만 말고, 자신이 직접 사용할 서비스를 기획/개발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많은 내부 직원들이 자기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 ('애용'이 아님)해줍니다. 그런데 진짜 그 서비스가 마음에 들어서 이용하는 걸까요? 그저 자신이 그 서비스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고 홍보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런데 고객의 마음으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서비스를 기획/개발한다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 서비스를 애용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PV나 UV 등의 가시적인 성과지표를 높이기 위한 불필요한 서비스나 기능을 추가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결국 스파게티가 된 서비스말입니다.
최근에 다음의 본사가 제주로 완전 이전했고, 사옥도 기존의 GMC에서 첨담과학기술단지 내의 다음스페이스.1로 옮겼습니다. (참고. 다음 제주 신사옥 (다음 스페이스.1) 소개 Daum's Next Jeju Challenge) 신사옥의 문에는 아래와 같은 '당기시오 Pull' '미시오 Push'를 알려주는 라벨이 붙어있습니다. 이 표식을 보면 바로 밀어야할지 당겨야할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이 버튼을 붙여놓으신 분의 작은 배려에 감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볼까요? 그런데 문마다 Pull/Push가 적혀있어서 좋은데, 두가지 다른 색상이라는 점이 이상합니다. 붉은색의 Pull/Push가 있고, 푸른색의 Pull/Push가 있습니다. 만약 푸른색은 Push 라벨에만 사용하고, 붉은색은 Pull 라벨 (또는 반대)에만 사용했다면 어땠을까요? 멀리서 걸어오더라도 푸른색이 보이면 자동으로 문을 당길 것이고, 붉은색이 보이면 밀어재칠 것이 분명합니다. 친절하게 Pull/Push 라벨을 붙여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더 직관적으로 일관성있게 적용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치 서두에 언급했던 약상자와 약상자의 라벨과 같이... 서비스나 표식에 일관성이 없으면 고객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사용자들은 이제 익숙해져서 큰 불편이 없을 수도 있으나, 새로 온 고객들은 일관성이 없으면 불편해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들도 UI/UX 측면에서 너무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서비스별로 버튼의 위치가 다르고, 폰트의 크기나 색상이 제각각입니다. 각각의 위치나 색상 등에 따라서 고유의 의미를 부여하고 일관되게 전체 서비스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용자들에게 기대감을 주고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서비스이의 역할입니다.
물론 당연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곳에 새로운 것을 배치하거나 변화를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창의성에서 창발성 Emergent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의 갇혀진 사고의 틀이 아닌 열린 사고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개념이나 패턴의) 일관성 Consistency은 획일성과 다릅니다. 위의 Pull/Push 버튼에서 색상과 문자/명령체계를 통일시키는 것은 획일성이 아닌 일관성입니다. 하나의 통일된 서비스 경험을 제공해줘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명시/암묵적으로) 합의된 그런 컨벤션 Agreed Convention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것은 일관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예시를 보면서 나는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에서 그런 일관된 경험을 고객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지게 됩니다. 신사옥으로 이주하면서 좋았던 점도 많지만, 신사옥이 갖고 있는 몇 가지 부주의/불편한 것들을 목격하면서 (위의 약상자나 푸쉬/풀버튼 이외의 것들...) 고객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비스를 만든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분명 이 사옥을 설계건축하신 분은 건축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건축의 외양이나 공법의 전문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전문가가 아닌 듯합니다. 고객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작은 불편들을 조금만 더 고민하고 이해하려고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