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아키텍트가 알아야할 97가지'에 Greg Nyberg가 '위대함은 충분함의 적이다'라는 짧은 글을 적었습니다. 트렌드와 니즈가 급변하는 요즘같은 시대에는 완벽하게 기획/준비된 서비스보다는 적당/충분히 구현되어 서비스되고 또 사용자의 피드백에 따라서 완성시켜나가는 영원한 "래피드" 베타 서비스가 더 맞는 것같습니다. '좋음은 위대함의 적이다'라는 말에서는 그냥 적당한 것에 만족해서 더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서비스의 설계의 측면에서는 위대함을 쫓아야겠지만, 현실적인 서비스 구현/운영의 측면에서는 충분함을 먼저 쫓고 충분함을 바탕으로 해서 좋음과 위대함으로 진화/발전시키는 것이 맞는 전략인 듯합니다. 지난 주에 올렸던 '완벽에의 집착'도 같은 맥락의 글입니다.
그리고 서비스의 구현 및 오픈 전략에서도 충분함이 좋은 전략이기도 하지만, 서비스/제품 자체도 완벽함보다는 충분함을 내세우는 경우도 최근에 많습니다. 이미 2009년도에 Wired에서 "The Good Enough Revolution: When Cheap and Simple is just Fine.'이라는 기사를 통해서 적당히 좋은 것에 대한 것을 다뤘습니다. 제품/서비스의 품질이 올라갈수록 당연히 가격도 올라가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더 좋은 제품/서비스를 주겠다는 욕심 때문에 소비자의 접근조차 막아버리는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이에 비해서 소비자들이 편하게 구입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에, 그 가격에 맞는 적당한 품질의 제품들이 오히려 고가의 하이엔드 제품/서비스보다 인기를 얻게 됩니다. (물론 전문가용 제품/서비스는 여전히 완벽의 고품질을 지향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으로 쉽게 찍어서 적당히 필터입혀셔 공유할 수 있는 Instagram의 성공이나 음질은 다소 떨어지는 MP3 디지털음악이 음반시장을 장악하는 것도 충분함이 적당할 때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리고 특수한 계층을 타겟으로 잡은 적당/충분한 제품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10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snapchat같은 것이 페이스북이 장악한 SNS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오늘 (4.19) 아침에 올린 '제 3의 길'에서 회사 내의 분석요청에 대한 하소연을 잠시 했습니다. 유관부서로써 데이터분석을 지원해주는 것에는 별다른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좀 귀찮거나 짜증나는 요청이 있습니다. 대부분 요청 내용이 좀 모호하게 기술된 경우도 있고, 아니면 바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급하게 요청하거나 시간이 좀 많이 들어가는 요청인 경우입니다. 이전 글에서 적었듯이 처음에 짜증나고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원하는 것을 가공해서 전달해줍니다. 그런데 간혹 요청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질 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모든 서비스를 개편/오픈하기 위해서는 기획 개발 전에 가용 데이터로 필요성/가능성을 미리 검증받도록 규정이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복잡한 분석 요청이 들어옵니다.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받아보고 싶겠지만, 중간에서 가공처리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너무 귀찮은 작업입니다. 그런데 가능성 feasibility를 확인하는 단계에서는 적당히 샘플링된 데이터만으로 가능성을 확인하면 되는데, 그것 이상의 데이터를 요청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간혹 실제 업무와는 무관하거나 전달해줘도 전혀 검토도 안 될 법한 것까지 요청하기 때문에, 바쁜 일정 중에 그런 요구사항들까지 챙겨주는 것이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닙니다. 가능성을 검증하는 단계에서는 그저 가능성만 확인하면 되는데, 마치 시스템을 오픈한 이후의 정밀한 효과분석을 하는 수준의 데이터를 요구하는 좀 무리한 요청까지 들어옵니다.
** 여담이지만, 데이터 분석가가 기획자가 떠먹기 편하도록 조금의 수고를 더 해서 잘 정리된 데이터를 만들어주듯이, 역으로 기획자도 데이터 분석가가 조금 더 편하게 분석에 집중할 수 있는 다양한 제약조건이나 필요한 파라메터 및 데이터 등을 정리해주는 수고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동반자 관계가 됩니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기획자와 분석가 사이가 마치 주종관계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자괴감을 받으면서까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라는 회의감도 종종 듭니다.
아침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또 만만하니 페이스북에 한 자 적었습니다.
적당히 해도되는 것은 그냥 적당히 끝내고 그 시간에 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일을 해라.
다 보지도 못할 만큼의 필요 이상의 데이터를 요청해서 또 일일이 그것들을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라면 적당 량의 데이터로 가능성만을 판단하고 남는 시간에 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일에 매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많은 데이터를 검토해보고 결론은 예스 아니면 노입니다. 예스라면 그냥 적은 데이터로 가능성을 판단해서 예스일 때보다 시간과 자원만 낭비한 것이고, 노이면 전혀 필요가 없는 일에 시간과 자원을 투입한 결과가 됩니다. 적은 데이터로 다 판단할 수가 없다면, 먼저 일부를 가지고 검증작업을 한 후에, 추가 데이터를 요청해서 검토해보면 됩니다. 그리고 실제 서비스 개발에 들어가면 또 비슷한 (가능성 테스트에서 요구했던 전체 데이터를 분석하는) 분석요청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여러 모로 시간과 자원과 창의력의 낭비입니다. 그런 낭비를 조금이라도 줄여서 잉여력에 투자를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서비스들이 무수히 쏟아졌을 것입니다.
위대함은 우리가 추구할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함을 얻기 위해서는 충분함부터 만족시켜야 합니다. 한술에 위대함을 얻겠다는 무리한 계획과 실행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개연성이 높습니다.
(2013.04.19 작성 / 2013.04.29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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