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잠에서 깨어 문득 든 생각이다. 지금이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위기이고 어쩌면 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냥 그런 느낌에 대한 글이지 충분한 근거가 있는 글은 아니다. 그리고 경제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몇몇 경제학 용어들이나 역사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정확한 의미는 참고자료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것까지 내가 떠먹여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오해할 수 있어 미리 말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다.
낮잠 들기 전에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로 유명한 경제학자 조세프 슘페터의 전기 <혁신의 예언자> 첫장을 넘겼다. 그리고 잠이 들고 깨어서 정신을 차린 이후에 처음 든 생각이 자본주의의 위기다. 이번 대선 결과와도 무관치가 않고, 그동안 대선의 주요 이슈였던 경제민주화와 (보편적/선별적) 복지와도 무관치 않다. 지금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일대 위기에 처해있다. 새로운 번영인가 아니면 파국인가의 갈림길에 대한민국이 놓여있다. (여담. 물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큰 위협을 받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잘 어필되지 못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하고, 데이비드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을 제시하고,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서 고전경제학이 완성되면서 학문으로써 경제학이 시작되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람들의 삶 그리고 경제학에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치부를 잔인하게 파고 들었다. 20세기에 넘어오면서 경제대공항이 발생하면서 존 케인스를 중심으로 고전경제학에 정부/공공의 역할을 더욱 강조한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했고, 2차대전 이후의 세계화과정에서는 밀턴 프리드먼을 중심으로한 (일명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가 경제학의 주류였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인해서 현재는 신자유주의는 종언을 고하고, 다시 정부의 역할에 대한 자성과 함께 자본주의 4.0이니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 주류의 하나로 대한민국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MB정부가 효용이 끝난 신자유주의를 끝까지 부여잡은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제시할 때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망하고 공동사회로 발전할 것이라 예상을 했다. 이론적인 측면만을 본다면 칼 마르크스의 사상이 그 이전과 이후의 어떤 사상들보다 더 견고했지만, 역사는 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변화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다시 한번 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그 모습으로 반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낳게 된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현재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의 곳곳)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 문제다. 현재의 양극화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이 사회의 자본주의는 결국 실패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노예화가 되는 전제군주주의의 나락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그들이 혁명을 일으켜서 공산주의사회로 변모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현재의 양극화 문제는 치명적이다. 경제적 양극화에서 시작해서 교육, 문화 등의 사회 전반에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심지어 계급분화의 조짐까지 보인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의 자산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상위 몇 퍼센트의 부자들은 플러스 자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하위 상당한 빈자들은 마이너스 자산이 급속도로 늘어나는데 있다. 각종 푸어들이 개인파산에 이르게 되고, 그런 무리들이 앙심을 품고 결합을 해서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상상하는 그대로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폭발했던 것이 채 20~30년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는 더욱 기본적이고 치명적인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가 '사람답게 살자'였다면, 경제적 민주화는 말 그대로 '살자'의 문제다.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민중반란이나 유럽의 대혁명들이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대선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 심상치가 않다. 물론 시작은 MB정권의 실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지난 5년 동안 세계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경제문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치더라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여러 아우성들이 있었다. 그것에 반해서 등장/부상한 것이 바로 SNS와 각종 팟캐스트들이었다. SNS와 팟캐스트는 P2P라는 점조직의 특성이 강하고, 기득권의 시각에서 보면 해적과도 같다. 그런데 이번 대선 이후에 그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진보진영에서는 이번 대선의 패배의 큰 원인으로 조중동 KMS가 보여줬던 비상식적인 여론전에 있다고 보고, 한겨레신문과 유사한 국민주 방식의 대안방송국을 만들자는 움직이 일고 있으며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근년에 공중파 뉴스들의 비공정성에 문제가 자주 제기되고 있고,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은 해고자들이 만든 뉴스타파가 유일하다는 그런 인식이 저변에 퍼지고 있다. 단순히 팟캐스트와 뉴스타파를 들으면서 분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대안방송을 만들자라는 운동을 시작한 것과 같은 형태가 경제문제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생협이나 협동조합의 형태로 일부 사람들 사이의 경제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어떻게 될까?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물건을 공유하고 기존의 시장과는 완전히 분리된 그런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가 있다. 국내 재벌들에 대한 비판이 더 강해져서 그들이 만든 제품은 더 이상 소비하지 않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들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이 만들어지는 것도 상상가능한 시나리오다. 대안기업이 만들어져서 뜻이 맞는 이들만 취직이 가능하고, 뜻이 맞는 이들에게만 제품/서비스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 대안방송국처럼 신문방송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을 수가 있고, 인터넷 포털도 시민포털이 만들어져서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곳에서 새로운 인터넷 율도국이 만들어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것을 최근의 움직임에서 감지된다. 여러 측면에서 주류에서 비껴난 다양한 대안경제체제 또는 대안공동체가 우후죽순 생겨날 가능성도 농후하다. 지리산마을과 같이 아애 1차산업으로 회귀해서 (중앙/지역 정부와 연결이 없는) 지역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현재 양극화가 고착화되는 경제체제 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날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양극화를 완화하는 방법을 적극 찾아야 한다. (말이/말만 좋은?) 경제민주화가 그것을 해결해야하는데, 사실 많은 국민들이 제대로된 실현가능성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같은 취지의 것이다라는 당선자의 말에 허탈해하고 있다. 선진국들의 부자들이 보여줬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기에는 지금까지 국내 재벌들이 보여줬던 형태에서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경제학/자본주의의 역사에서도 다양한 수정이 가해졌고 정부와 공공의 개입이 있었듯이,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보편적 복지를 통해서 최저 사회안전망을 마련해서 저소득, 하층민들이 사회에 대한 원초적인 불만을 키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기득권만 보호하는 친재벌적 스탠스에서 벗어나서 재벌들에게 돌아간 각종 혜택들을 현실에 맞게 제거/조정해고, 조정된 환경에서 얻은 것들을 다시 아래쪽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그들이 내세웠던 낙수효과 Trickle Down가 실제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그 효과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장치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정부는 감시와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이정도의 최소한의 노력이 없다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고, 그것이 곪고 골다보면 결국 터지기 마련이다.
제대로 갖춰진 (보편적) 복지 또는 사회안전망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과격한 체제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거대 언론이나 재벌 연구소에서는 복지정책이 사회주의 정책 또는 비자본주의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논리일 뿐이다. 70, 80년 대에는 기업이 제품을 만들어서 해외로 수출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과거처럼 수출만으로 먹고 살 수가 없다. 이제는 국내에서 많들어진 많은 것들이 내수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그냥 창고에 쌓여서 썪어갈 수 밖에 없다. 내수를 일으키는 방법은 단기적으로 빚내서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빚없이 건전하게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여력을 마련해줘야 한다. 제대로된 가격정책과 함께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그것이다. 매번 핸드폰이나 자동차의 국내 판매가격이 해외의 그것과 차이가 난다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재벌들은 기능이 다르다라는 논리로 방어만 하고 있다. 그런 언론전보다는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가격을 처음부터 책정해서 소비자들을 오랜 기간동안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제대로된 대가가 수반되어야 한다. 단순히 경영학 이론에만 바탕을 둬서 업무유연성이니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으로 공장이 채워지면 장기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것이 뻔하고 (현재와 같은 노동분규를 포함해서) 또 그들에게 건전한 소비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그들이 만든 제품/서비스를 그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그런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것이 기업 내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조정/규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복지, 특히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경제적 양극화가 사회적 계급분화, 더 나아가 사회적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못하고 그냥 덮고 넘어가면 결국 국민들은 스스로 각성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여러 사회운동들이 전개될 것이 뻔하다. 민란이나 혁명 등과 같은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체제의 위기는 외부 요인보다는 내부 요인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지금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의 위기도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다. 과거 산업화 시대나 그 이전의 식민시대의 사고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운영하면 안 된다. 지금 많은 국민들이 당선인을 우려하는 이유는 그/그들이 내세운 정책의 부당성과 불완전성보다는 그들이 갖추고 있는 생각과 사고의 완고성에 있다. 시대의 조류와 세계사적 흐름을 무시하고 한번 만들어진 틀에 세계를 담으려하면 (진화된) 국민들의 반발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유연한 사고와 실행만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구조적 문제는 창의적인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강하게 결합되어있지만, 자본주의의 위기가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민주주의 위기는 더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세력에게 민주주의의 적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논리와 힘을 경계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이 내세우는 보편적 복지나 기타 여러 가지 생각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틀렸다면 무엇이 어떻게 틀렸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설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절차적 민주주의다. 그런 과정이 없이 찍어내리는 식의 통치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지난 5년을 거치면서 또 앞으로 5년을 준비하면서 당선인에게 바라는 (유일한) 바람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유연한 리더십이 없으면 결국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모든 국민은 대한민국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그래서 비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역사의 기로에 서있다. 위기가 기회가 아니라, 위기 전이 기회다. 미래(번영)의 문이 항상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