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잉여'라는 단어가 좋은 뜻으로 해석되다. 예전에는 잉여라고 하면 나머지 공부를 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동네 놀이에서 깍두기같이 핵심 멤버가 아닌 사람을 뜻하거나 아니면 뭔가를 만들고 남은 짜투리같은 어감이었는데, 요즘은 뭔가 자신만의 취미 생활을 폼나게 하고 가족들에게도 헌신적인 뭔가 럭셔리한 느낌을 받는다. 맨날 야근을 하고 주말에는 쇼파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산업화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칼퇴근을 해서 어학이나 여러 기술들을 별도로 습득하기도 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캠핑도 가고하는 그런 책임감있고 가정적인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잉여는 여유로움을 뜻하고 잉여는 자유로움을 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잉여로운 사람이라면 남는 시간과 자원을 그냥 허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사회에 헌신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이제는 잉여로움은 칭찬의 말이 되었다.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해커정신도 잉여의 다른 모습이고, 오픈소스나 프리소프트웨어 등도 잉여의 결과물이고, 프로츄어나 프로슈머라는 신인류의 모습도 잉여의 결실이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전설적인 회사들의 창업 스토리에는 매번 그런 잉여의 전설이 따른다. 70년대의 히피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이 꿈꾸는 잉여스로움의 극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유로우면서도 반사회적인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홈브루컴퓨터클럽과 같은 아마추어 엔지니어들의 모임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홈브루에서 자랑질을 하기 위해서 워즈니악이 밤잠을 설치지 않았다면 애플이라는 회사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잠시 죽을 쓰고 있지만 (Zucked = 저크버그꼴이 되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크버그가 IPO를 단행하기 전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밝힌 해커리즘에서 잉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외에 많은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이 처음부터 '돈을 벌어야겠다'라는 목표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재미있고 의미있는 서비스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시작한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이 미화되어있다.)
잉여에 대한 사소한 얘기는 이 정도에서 마치자. 잉여도 다 같은 잉여는 아니다. 그래서 4가지로 잉여를 구분해봤다.
- 소비적 잉여 Consumptive Surplus. 이건 진짜 아무 짝에도 없는 잉여다. 사실 아무 짝에도 없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의미없는 잉여는 없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했다. 소비적 잉여는 말 그대로 그냥 잉여의 시간과 자원을 허비하는 거다. 퇴근 후에 쇼파에 누워서 TV만 시청하면서 빈둥빈둥 시간만 보내는 그런 부류를 뜻한다. 이게 의미없는 잉여가 아니다라는 말한 이유는 그런 쉼/휴식이 우리 삶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 남는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 짝에도 없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TV를 보면서 여유롭게 다양한 생각을 하고 또 복잡한 머리와 마음을 정리한다면 의미없는 허비가 아닐 수도 있고, 말했듯이 심신을 재충전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
- 유희적 잉여 Playful Surplus. 유희적 잉여는 취미생활을 하는 등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부류를 뜻한다. 운동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어쩌면 그냥 어학학원 등에서의 학습도 유희적 잉여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다. 회사 업무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거나 학원수강을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냥 책읽는 것이 취미라서, 그리고 그냥 운동, 어학이나 요리, 목공 등과 같은 스킬을 배워두고 싶어서 학원에 다니는 부류를 뜻한다. (업무와 관련되어서 책읽고 학원을 다니는 것은 이 글에서 말하는 잉여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그냥 즐기기 위해서 남는 시간과 자원을 소비한다. 주말에 가족과 같이 캠핑이나 소풍을 가는 것도 유희적 잉여 활동에 속한다고 볼 수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유희적 잉여는 그냥 즐거움을 위한 잉여다. Just for fun.
- 창조적 잉여 Creative Surplus. 창조적 잉여는 잉여 시간/자원을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업무와 관련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잉여 에너지를 더 창의적인 것에 투자하는 거다. 이노센티브에 등록된 아마추어 전문가들의 활동이나 아마추어 발명가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간혹 이런 창조 잉여자들에게서 대박 사업 아이템이 나오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데 창조적 잉여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대박 아이템은 그냥 신기루일 가능성도 많다. 그래서 자신의 잉여의 시간을 창조활동에 무조건 투자하라고 조언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은 현실성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현실성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재미있다.
- 생산적 잉여 Productive Surplus. 생산적 잉여는 창조적 잉여과 구분하기가 좀 애매하다. 애매하다기보다는 내가 제대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창조성이 뭔가를 새로운 것을 간헐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생산성은 꾸준히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도로 구분하면 될까? 업무와 무관한 모바일 앱을 만드는 아마추어 개발자라던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꾸준히 피드백을 제공하는 컨트리뷰터라던가, 목공 등의 기술로 생활필수품을 만들어서 사회에 기부하거나 벼룩시장에 판매하는 사람들이 이 생산적 잉여에 속하는 듯하다. 창조적 잉여가 대박 아이템이라면 생산적 잉여는 중소박 아이템정도랄까? 취미로 만든 제품/서비스를 통해서 그냥 사회에 꾸준히 기여를 하는 것이 생산적 잉여로 보면 될 것같다.
소비적 잉여는 피로 및 스트레스 해소 외에는 결과적으로 남는 것이 없고, 유희적 잉여는 특정 스킬을 배움으로써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창조적 잉여는 겉으로 보기에는 멋져보이지만 말처럼 쉽지도 않고, 그 결과물이 직접적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커 보이지 않는다. (대박 아이템으로 발전한다면 한방에 기여하겠지만) 그렇지만, 생산적 잉여의 결과물은 대박 아이템이 아닐 뿐이지 우리의 생활에 꾸준히 기여를 한다. 혁신의 측면에서는 생산적 잉여는 점진적 혁신 incremental innovation이고, 생산적 잉여는 파괴적 혁신 disruptive innovation이다. 장기적으로 파괴적 혁신이 맞다. 그러나 파괴적 혁신 이후의 점진적 개선의 과정이 없다면 파괴적 혁신 또한 빛을 바랜다. 또 창조적 잉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창조계급에 목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산계급에서 더 실용적인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 중요한 코멘트는... 소비적 잉여와 유희적 잉여가 특별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그런 누적된 소비/유희 과정이 창조와 생산의 밑걸음이 된다.
각자의 특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전략적으로 소비, 유희, 창조, 생산을 위해서 잉여 시간과 자원을 배분할 필요가 있다. 대략 2 : 3 : 1 : 4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잉여의 시간 중에 일부는 쉬는데 할애를 하고, 일부는 앎/지식을 축적하는데 할당하고, 일부는 대박 아이템을 구상하고, 또 나머지는 현실적인 솔루션을 만들어가면 될 듯하다. 업무에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라면 소비에 5할을 할당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회 기여에 더 큰 의미를 둔다면 생산에 5할 이상을 할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블로깅을 하는 것은 과연 소비인가 유희인가 창조인가 아니면 생산인가? 나 혼자만의 자기만족이라면 그냥 소비와 유희 활동일테고, 누군가 읽고 공감을 한다면 생산 활동일테고, 또 누군가 감명을 받고 생활에 영향을 줬다면 창조 활동이겠지. 블로그는 저의 생각의 배출구이며 수다의 수단이기 때문에 당장은 소비와 유희의 활동이 맞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는 새로운 깨달음/각성의 메시지가 있기를 바라며 이런 헛소리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