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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감성의 언어 시장의 말

살다보면 예전에 우연히 느꼈던 감정이나 느낌을 다시 받을 때가 있다. 감정뿐만 아니라 이성적 깨달음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어제는 새삼스레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언뜻 떠올랐고, 감성이 이성에 앞선다는 생각이 또 그랬다. 잘 알다시피 MBC 파업이 한달을 넘어섰다. 그래서 대부분 뉴스 진행이 파행을 겪고 있고, 파업의 대의인 공정보도와는 무관해보이는 예능프로그램들도 재방송이 속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무한도전'을 1달 넘게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정도의 불편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무한도전의 결방은 나에게 자유로운 토요일 오후와 저녁 시간을 주었다.

어제 한겨레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올렸다. (참고로 '재미있다'라는 표현은 그냥 내가 즐겨쓰는 수사일뿐이다. 표현대로 '재미'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흥미롭다'의 의미에 가깝다.) 바로 조국 교수가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참고. 김태호 PD "파업 동참 이유는 가슴이 울어서...") 그동안 MBC 파업에 대해서 많은 글을 올리지 않았다. 블로그에서는 그냥 본문 중에 잠시 언급된 정도로 올린 듯하고, 트위터에서는 몇 차례 관련 기사를 올린 것같다. 그런데 이전에 올렸던 많은 기사들이 MBC 파업의 실상 및 내막을 더 자세히 다룬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은 RT가 거의되지 않거나 소수의 관심만을 끌었다. 그런데 어제 트윗한 김태호 PD의 인터뷰는 급속도로 SNS를 점령했다. 뭐가 다른 것일까? 현재 '무한도전'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이 가지는 파급력이나 김태호 PD와 조국 교수가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물음에 적절한 답은 아닌 것같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는 김태호 PD가 사용한 '가슴이 울어서'라는 표현 때문인 듯하다. 김태호 PD는 분명히 MBC 파업에 동참한 이유를 거창한 공정방송실현이라는 대의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러 세세한 증거들을 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이 울어서'라는 것을 파업참여의 변으로 내세웠다. 무겁고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이 아니라, 감성적인 답변을 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본다. 지금 베스트셀러에 오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 대한 한줄서평으로 '감정적인 문제는 이성적으로, 이성적인 문제는 감성적으로 해결하라'로 했다. 사회적으로 무겁고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더욱 논리와 이성을 앞세우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 논리와 이성은 머리는 움직일 수는 있어도 가슴은 움직일 수가 없다. 가슴을 움직일 수 없다면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다. 감성이 이성을 앞선다고 서두에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MBC 파업이라는 메시지는 조국과 김태호 그리고 무한도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전파되었다. 올바른 미디어의 선택이 그것이 담은 메시지의 정당성과 진의도 보장한다.

최근 글에서 팟캐스트에 대한 내용을 자주 언급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나는 꼼수다'나 '나는 꼽사리다' '저공비행' 등을 언급하면서 '유희의 시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들 팟캐스트들이 내용의 지루함 (복잡함 난해함 무거움)을 표현의 유쾌함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그들 팟캐스트의 진행자들이 어려운 주제를 논리적으로만 설명했다면 지금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잘 보라. 그들의 입에는 욕이나 저속한 표현이 끊이질 않는다. 시도때도없이 경박한 웃음이 넘쳐난다. 김어준씨의 '시바'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고, 선대인의 거친 표현에 사람들이 끌리기 시작했다. 더우기 '저공비행'에서 보여주는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의 상황에 적절한 촌철살인의 비유는 사건의 핵심을 찌른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공통점은 모두 '시장의 언어/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차려입은 샌님의 언어 체계가 아니라, 시장통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그 언어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말을 사용하고 있기에, 우리의 문제가 아닌 것같던 것들이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때론 혼란스럽고 때론 듣기 거북한 소리지만 우리의 삶이 반영된 언어에서 우리가 동질감을 느낀다. 이성적으로는 굳이 동창할 이유가 없는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4대강사업, BBK 문제, 강정마을, 원자력발전, 재벌계혁 등등등... 어쩌면 당장 내 눈앞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눈앞의 문제가 되었다. 이 시대의 선지자는 학교나 사원에서가 아니라 분명 시장에서 나올 것이다.

시장의 언어는 감성의 언어다. 만약 학교의 언어나 방송의 언어, 즉 이성의 언어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면 우리는 머리에서 한번 걸러내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체계나 감성체계로 한번 변화해야 했었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는 바로 그 언어체계인 시장의 언어, 즉 감성의 언어로 우리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때 우리는 바로 반응한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슴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가슴이 뛰기도 하고 가슴이 울기도 한다. 가슴이 뛰어야 우리 몸도 뛴다. 고귀한 메시지보다 친근한 미디어가 더 중요해진 것같다. '미디어는 메시지다'와 '감성이 이성에 앞선다'를 새삼 깨닫게 된 계기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글을 이성적으로 전개하려고 노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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