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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풍요는 생존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비오거나 흐린 날은 사진 찍으러 잘 나가지 않는데, 어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냥 샤려니숲길을 갔습니다. 1~2시간정도만 산책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후문으로 들어가니 붉은오름으로 통하는 길이 오늘 (6/9)까지 개방한다고 해서 오름트래킹을 했습니다. 오름을 한 바퀴 돌다보니 작년 여름 태풍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수십 수백년된 큰 나무가 여전히 뿌리채 뽑혀 쓰러져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연의 경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쓰러진 나무들의 특징은 나무 뿌리가 땅 속에 깊이 박혀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 이들은 수십 수백년을 살아온 그 땅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을까요?

예전에 미국에 체류하던 때의 기억이 났습니다. 주변 공원에 온통 5~10m이상의 큰 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어서 웬마한 비바람에는 끄떡없을 것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강풍이 불고나면 가로수들이 뽑혀서 도로가 막히는 일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나무도 덩치는 크지만 그 덩치에 비해서 나무 뿌리가 깊이 박혀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대로변/공원의 가로수에서 잎이 떨어지면 다 청소해버립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낙엽이 그냥 썩어 거름이 되어 지표면이 매우 거름집니다. 그러니 나무가 양분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덩치는 커졌지만 체력은 떨어진 요즘 청소년들과 비슷합니다. 뿌리가 깊지 않으니 웬만한 강풍에도 픽 쓰려져 버립니다. 큰 태풍에 국내의 가로수들도 쓰러지지만, 뿌리가 얕아서라기보다는 (숲에서와 달리) 서로 바람을 막아주고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제 붉음오름에서 봤던 나무들의 모습이 미국의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숲에서 낙엽지면 당연히 청소되지 않고 땅이 비옥해지고 뿌리가 양분을 얻기 위해서 필사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10m이상의 큰 나무였지만 뿌리는 지표만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큰 바람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물론 제주는 전역이 화산석으로 이뤄져서 뿌리가 깊이 땅 속을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제주의 웬만한/대부분의 곳은 지표에서 1m만 파고들어가면 온통 암반입니다.)

이렇게 쓰러진 나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산업계, 벤처생태계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설명하는 대로라면 저도 반성해야 합니다. 저도 종종 그랬지만, 많은 기사나 글을 통해서 국내에서 벤쳐기업들이 생존하지 못하는 이유를 척박함에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업, 창조의 문화가 없다는 얘기도 매번 들리고, 기술적 인프라가 취약하다는 말도 매번하고, 법조계나 의료계보다는 기술계를 경시하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창업을 해도 대기업들의 등살에 결국 고사된다는 류의 해석, 설명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이 풍요했다면 대한민국의 벤처생태계가 건전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쉽게 창업하고 쉽게 폐업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뿌리를 깊이 박을 필요도 없는 큰 나무가 되어버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풍부한 문화적 사회적 토양은 쉽게 창업할 수 있게 만들고, 또 실패 후에도 재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쉽게 될 수 있는 것들이 태풍과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그런 기업들을 보호해줄 수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회의가 듭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이, 척박한 환경에서 버티고 살아남은 기업이 결국 더 오래 생존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씨가 뿌려졌으면 결국 삭이 트기 마련입니다. 온실에서는 그 시기가 조금 더 이르고 싹틀 가능성이 높을 뿐입니다. 채소가 아닌 거목이 되기 위해서는 (대형식물원이 아닌 이상은) 온실 속의 묘종도 결국 비바람을 직접 맞아야하는 자연으로 옮겨심겨져야 합니다. 여건이나 분위기가 잘 갖춰졌으면 벤처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벤처가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실패가 무조건 용인되는 사회에서는 성공에 대한 갈급/절실함도 그만큼 적을 것입니다.

풍요함은 잘 자라는 환경은 되지만 위기에 생존할 방패막이 될 수는 없다. 환경은 환경일 뿐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용할수도 극복할수도 있어야 합니다.

(2013.06.09 작성 / 2013.06.xx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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