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데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 그저 귓가에는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에 나오는 '구멍난 가슴에'라는 노랫말만 아른거린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현실이 되고,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원했던 결과가 나왔다면 대선을 겪으며 생각했던 좀 건설적인 포스팅을 적으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은 그럴 준비가 덜 되었다. 마음을 추스리고 더 깊고 다양하게 생각을 한 후에 다음 절차를 밟아야겠다. (좌측 그림 링크)
모든 것이 기정사실화되고 인터넷의 반응들을 조금 살폈다.
- 투표율이 다소 낮았던 20, 30대에 대한 원망
- 붉다 못해 검게 물든 경상도에 대한 원망
- 근헤 불쌍한 건 알아도 지 자식 불쌍한 건 모르는 어르신들에 대한 원망
- 등록금 1,000만원 시대에 결국 뒷감당은 50대가 질 거라는 냉소
-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거나 어떻게라도 비자를 연장시키겠다는 다짐
- 경상도는 그렇다쳐도 서울, 경기 등의 수도권의 선택에 의아해하는 글
- 대선 승리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새누리에 대한 냉소
- 전략도 없으면서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민주당에 대한 원망
- 나꼼수팀을 비롯해서 대선을 위해 몸바쳤던 많은 야권인사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몸조심하라는 우려
- 편향되고 왜곡된 언론을 질타하며 참다운 독립언론을 만들자는 결단
- 외국 정상과의 회담에서 쪽팔린다는 말과 함께, 이제 당선되었으니 책 좀 많이 읽으라는 훈수
- 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를 이겼다라는 외신의 헤드라인을 안타깝게 전하는 글
- 어차피 MB가 다 망쳐놓은 경제 사회를 문재인이 떠맡지 않아서 다행이고 그래서 5년 뒤가 기다려진다는 글
- 대한민국의 48% 희망을 봤다며 스스로 위로하는 글
- 물론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과 낙선을 위로한다는 말
- …
계획에 없던 현실이 도래했지만, 우리는 또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이 민초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점검이 먼저다. 지도자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이 선택하는 것이다. 수준에 맞는 이를 선택했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아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은 지금 행복할 것이고, 1800일동안 그 행복이 변치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의 국민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그녀의 백성으로 살아보는 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고, 어쩌면 이런 '반'의 시기를 거쳐 '합'에 이르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더 밝은 미래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만약 아직도 경상도의 어느 구석에서 이번 대선을 맞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들이 지금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고백하자면 대선에서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했는데, 결과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서 더 실망인 것같다. 나도 그 24.2%에 속했거나 51.6%에 속했다면 지금 편히 두다리 뻣고 자고 있었겠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도 기꺼이 당신의 백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5.16, 딸은 51.6'이라는 글에 너무 마음이 아프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거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실망감 또는 상실감 때문에 며칠의 수명이 단축된 것같다. 이런 사회라면 며칠을 더 사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나보다 더 상심하신 분이 계실 거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선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쏟아졌던 국민들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는 않으실런지. 힘들어하는 그분에게 나의 한표가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이제 그의 국민으로 살아갈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우리는 또 누군가의 국민이 되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전진해 나가리라 믿는다.
역사의 시간이 꺼꾸로 되돌려졌는지는 모르나 지금부터 다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이 역사에 남게 된다. 역사를 바로 잡지는 못해도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 나는 여전히 당신의 감시자로 비판자로 남겠지만, 어쩌면 51.6%의 희망일 것이다. 여전히 의구심이 많지만 -- 선거를 통해서 검증하지 못하고 당선된 후에 검증이 시작된다는 점은 참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 그래도 결과에 승복하고 당신의 대한민국에 당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를 바랄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번 대선이 전쟁이었지만, 옆에서 본 많은 국민들은 이번 대선이 일종의 축제였다. 그래서 대선 기간 내내 즐거웠다.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 세대간의 대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대선이 더욱 축제분위기로 바뀔 거다. 전쟁의 상처와 보릿고개의 배고픔의 시간을 잊고 이제 우리 모두 축제의 마당으로 나서는 그 때를 기다린다.
국가의 중대사를 거치면서 마음에도 없는 정치 얘기를 자꾸 풀어놓았다. 이제 다시 본연의 소시민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