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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Jeju

나무의 바다에서 이명호 작가님을 만나다

제주 다음스페이스의 인포데스크 앞에 작은 갤러리가 있다. 처음에는 회화가 여러 점 걸렸었는데 나랑은 좀 안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문화적 감성/소양이 그 정도에 미쳤나 보다. 그런데 7월의 어느날 모든 그림들이 사라지고 사진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래도 사진은 좋아했고, 사진은 그림과 다르게 현실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니 (물론 여러 효과를 주거나 최근에는 리터칭을 통해서 현실과 다르게 왜곡되기도 한다.) 나같은 문화적 문외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시된 작품은 두개의 큰 사진과 그리고 무수한 작은 사진들... 이게 뭐야? 내가 찍어도 이정도는...? 사진 전시회를 가본적은 없기에, 그래도 전문 작가님의 작품이면 사진에서 풍겨나오는 뭔가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7월의 무더운 여름날 GET에 동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울에 근무하시는 분께서 지금 다음스페이스에 전시된 작품 그리고 그걸 찍으신 작가님은 해외에서 대단히 유명하다고 하셨다. 사진 한 점을 찍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그걸 찍으면 외국의 유명 갤러리에서 먼저 전시가 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몇달을 기다려야 볼 수 있다고 하셨다. 갑자기 사진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참 권위에 약하다. 강한 자 앞에서 바로 꼬리는 내리는 것이 처세술이라면 처세술이다.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사진을 자세히 봤다. 그래도 사진은 전주에 보던 것과 다를 바는 없었다. 그래서 사진이 좋은지도 모른다. 전시된 사진에 나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았고, 작가님이 뭘 말하려는지를 나혼자 유추하려는 어리석음을 발동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사진들이 회사의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내일 (오늘, 어제 밤에 사진을 공유받지 못해서 아침에 올림) 사진들이 철거된다고 한다.

다음스페이스에 전시되어있는 고비사막에서 찍은 바다. 뒤쪽으로 작은 사진들은 고비에서의 작업과정을 남기신 사진들입니다. 아침 역광에 대강 찍은 거라서 작품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점은 죄송...

제주도에 갇혀 지내다보니 다양한 문화행사를 즐길 수도 없고 나름 유명한 분들을 만날 기회도 별로 없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공연이나 행사들이 자주 열리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서 생각보다 많은 문화행사를 즐길 수는 있다.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내용을 즐길 수 없다는 것뿐이다. 유명한 사람들이라... 제주공항에 상주하고 있다면 유명한 분들을 지나가는 발치에는 자주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난 하루종일 사무실에 쳐박혀있다. 가끔 TV에서 누구누가 제주에서 드라마/예능을 찍은 것을 보지만 그들은 이미 떠난 이후.. 난 그저 쓸쓸히 리모컨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다.

갤러리의 사진들을 디렉팅하신 이명호 작가님이 다음스페이스에 오신다고 사내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냉큼 참석하겠노라고 댓글을 달았다. 굳이 참석의사를 댓글로 남기지 않아도 될 듯하지만 매번 이런 행사가 있으면 댓글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일단 댓글을 달아줬다. 그리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첫 인상은 평범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사진 작가가 없다. 지난 번에 뵈었던 노익상 다큐사진 작가님이나 한겨레 곽윤섭 사진부장님정도... 그리고 김중만씨 정도는 이름은 알고 있다. 두모악의 고 김영갑님도 이름은 아는구나. 그러고 보면 사진작가는 이래야 된다라는 그런 선입견/편견도 없다. 사진작가도 그냥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나근하게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강연은 재미있을 것같다는 기대감을 높인다. 그래도 말보다는 사진으로 말씀해주실 것같다.

약 2시간동안 이어진 강연은 최근 몇 년동안 작업하셨던 나무시리즈와 바다시리즈의 촬영과정 그리고 결과물들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내가 만들어낸 말인양 사용해보고 싶은 재미있는 표현들... '감성의 객관화' '캔버스를 통한 비현실화' '좋은 문제를 내는 사람' '비현실을 만드는 작업' 등...

나무 사진 하나를 찍기 위해서 적어도 1년을 기다린다고 하신다. 그 나무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 언제인지 그걸 관찰해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가졌던 감정이 공감이 되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렇게 한장의 사진이라는 결과물만을 남기고 보여주기에는 그 지나한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아깝고 그 속의 스토리를 그냥 묻어두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래서 그 과정을 보여주기 시작하셨다. 또 다른 사진의 형태로 또는 동영상의 형태로... 그런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결과물이 된다. 과정도 결과의 한꼭지다. 결과에만 집착하지 말자. 마음 속으로 찜해둔 나무가 잘려나간 경우도 경험하셨고, 땅주인이 허락하지 않아서 또는 지나치게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셔서 결국 포기한 경우도 많으시단다. 가장 좋은 때를 찾았더라도 날씨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태프들의 작은 실수도 오랜 기다림을 헛되게 만들어버린다. 오랜 기다림보다 더 큰 준비하는 이들의 노력의 결과물이 한장의 사진이면 참 억울하다. 그래서 그 과정을 더 남기고 싶어셨으리라 그렇게 짐작해본다. 여느 사진들을 보면 매번 프레임/사진 밖의 현실/모습이 궁금하다. 그러나 이명호 작가님의 사진을 보면 캔버스 뒤쪽의 현실이 궁금해진다.

바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구글어스를 뒤진다고 하신다. 사막은 그냥 모래만 왕창있는 그런 누런 곳인줄 알았는데, 각각의 사막은 고유의 색과 형태를 가진다. 그래서 고비 사막에도 가셨고, 몽골의 인적없는 곳에도, 아라비아 사막도 러시아의 초원도 누비셨다. 그리고 또 한장의 사진을 남긴다. 나무 사진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면, 바다 사진은 사람과의 싸움이다. 인근의 수백명의 학생들을 동원해서 겨우 한장을 남긴다. 아, 맞다. 진짜 바다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막/초원에서 관념의 바다를 담는 것이다. 평생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못할 고비사막의 학생들에게는 참 소중한 경험이었으리라... (여담으로, 그래서 중국인들이 사실 스케일면에서는 크게 볼 것 없는 제주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제주도는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바다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용경협이나 대운하 등을 만드는 중국인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흰 강목이 만들어낸 바다 또는 오아시스는 비현실 속에서 현실이 된다.

강연중이신 이명호 작가님. 고비사막을 구글어스에서 미리 확인해보고 또 사진 찍기 며칠 전에 또 사전답사해서 최종 결정을 내린답니다.

사진이 등장한 이후로 화가들은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는 화풍을 버리고 더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면 현실은 사진가들의 몫으로 남는 건가? 그래서 이명호 작가님은 나무 연작을 통해서 현실을 재현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하고 싶어하셨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비현실을 담고 싶으셨단다. 작가님 그냥 비현실은 화가들의 영역으로 남겨두세요. 작가가 하는 일은 시공간의 한 지점을 들춰서 사람들에게 환기시켜주는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진작가 이명호가 아니라 작가 이명호로 불리길 원하신단다. 글로써, 그림으로써, 노래로써, 몸짓으로써, 또는 사진으로써.. 그런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는 사람이면 모두 작가라 불러도 무관할 것같다. 사진이니 글이니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인위적으로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

강연이 끝나고 사인도 받고 명합도 받았다.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 아니 고향집에서 약 4km, 걸어서 한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계셨다니... 작업은 거의 서울에서 하신단다. 다음스페이스.2가 지어지고 오픈스페이스가 생기면 그때 제주도에 내려오셔서 작품활동하는 것이 기대된다. 그때 일일스태프로 참여할 수 있으리라. 다음의 잉여력이 작품창조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다/사막 사진은 보통 3주 정도 걸린다는데 여권도 새로 만든 김에 휴가를 내고 (좀 모자라군) 한번 따라가 볼까?

...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작품과 강연을 지원해주신 아뜰리에 아키에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현재 11월 20일까지 김남표님, 이이남님, 이정웅님, 그리고 이명호님의 Contemporary? Contemporary! 작품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네요.

사인 중이신 이명호 작가님. 사진이 그림같아서 시간이 다소 걸립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담은 오아시스. 이명호 작가님의 사인은 참 난해한데, 자세히 보면 한글로 본인의 이름을 적은 것.

강연 후에 다음스페이스에 전시된 나무 작품을 배경에 띄워놓고 작가님과의 포토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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