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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현실적 타협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사진 한장을 보게되었습니다.[각주:1] 대학교/연구실 후배가 올린 학생식당의 아침메뉴를 찍은 한장의 사진입니다. (아래 사진 참조) 사진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함께 붙어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동안 학생식당의 맛이 있고없고를 떠나서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별로 불평하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 나온 쥬스의 양은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던 1996년도에 학생식당의 밥값이 1,000원이었고, 중간에 아침 1,000원/점심저녁 1,500원으로 인상된 적이 있었고, 제가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던 2008년도에는 1,500/2,000원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조금 더 올랐겠지만... 요즘은 김밥천국이 아니면 5,000원짜리 밥도 구경하기 어렵고, 웬만한 메뉴의 가격이 10,000원을 전후하기 때문에 학생식당의 가격은 매우 저렴한 편입니다. 물론 맛 그리고 전반적인 만족은 다른 문제.

아 앤간하면 가격대비 성능좋은 학생식당은 까기 싫은데 인간적으로 너무 치사하다. 사진에 있는 주스 나온 그대로임.. 저거 하나만 저 높이면 따르다가 모자랐구나 하겠는데 쟁반에 같이있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저 높이만큼 따라져있다. 아니 주스 1/3컵씩 줘서 재료비 참 많이 아끼것다...

2012년 6월 7일의 포스텍 학생식당의 아침메뉴

저도 10년을 이용했던 학생식당인지라 위의 후배의 불평을 보는 순간 폭풍공감이 갔습니다. 그러나 제 눈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학생식당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가격대비 성능좋은'이라는 문구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수와 계산에 밝은 공돌이 -- 특히 효율성과 최적화를 강조하는 산업공학도 -- 의 특징을 너무 잘 표현해주는 문구다정도로 생각했지만, 비율/상대/효율 등의 단어에 함몰된 성능/품질에 대한 인식이 안타까워졌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절대 가치에 대한 추구보다는 상대 비교에 안주하는 모습을 자주 연출합니다. 많은 연구에서 보여주듯이 평균연봉 2억원인 회사에서 연봉 1억원을 받는 사람보다 평균 연봉 3천만원인 회사에서 연봉 5천만원을 받는 것에 더 행복 또는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이상한 (비합리적) 심리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연봉 1억원을 받는 두 사람이 있다면 그 두사람의 (소유에 따른) 절대행복도는 같아야 하지만, 한명은 평균연봉 2억원인 회사에 다니고 다른 이는 5천만원인 회사에 다닌다면 후자가 느끼는 만족감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액수보다는 주변과 비교되는 상대적인 액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후배의 글을 보면서 맛 또는 품질은 절대적 측도로 평가받아야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격에 비해서 괜찮다 또는 이것도 못 먹는 사람들에 비해서 (나는) 괜찮다 등과 같은 상대적 측도로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듯합니다. 어느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서 3,000원짜리 백반을 시켜놓고, 맛이 없더라도 가격은 저렴했어요라고 웃는 것이 사람인 듯합니다. 맛을 평가할 때는 일단 가격이나 다른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맛이라는 기준에 따라서 평가해야 합니다. 그 외의 가격이나 서비스 등의 다른 요소는 그 요소에 맞게 경중을 평가하고, 총점에 반영하면 됩니다. 그런데 흔히들 맛을 평가할 때도 가격에 비해서 맛있다라고 평가합니다. 1,000원짜리 맛이 있고, 1억짜리 맛이 따로 있는 걸까요? 그냥 맛은 '있다 없다'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요리에서의 맛 ==> 서비스나 제품의 품질.

애플의 제품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뺄 수가 없을 듯합니다. 애플에서는 제품을 개발할 때 투입되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가능한 얘기지만...) 일단 최고의 제품, 사용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현혹시켜서 열광시키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첫번째 우선순위입니다. 그 다음에 투입되는 연구개발비를 걱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인사이드 애플>에 들어있는 내용이던가?) 제품의 품질은 품질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최고를 추구함에 있어서 투입되는 리소스에 대한 최고는 좀 지양되어야 합니다. 물론 가격대비 성능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관련기사: 애플, 비효율과 장인정신의 사이에서) 품질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는 것이 장인정신입니다.

90점짜리 제품과 99점짜리 제품과 100점짜리 제품을 앞에 두면 사람들은 그 제품들의 품질차이를 크게 못 느낍니다. (특히 개별로 제공해주고 사용해보라고 한다면 더욱..) 그러나 그 제품을 개발하는데 투입되는 비용이나 판매되는 가격은 매우 큰 차이가 납니다. 90, 99, 100짜리 제품을 개발하는데, 1, 10, 1000...0000의 단위 리소스가 투입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 타협을 합니다. 10을 투자해서 99를 얻는 것보다는 1을 투자해서 90을 얻는 것이 더 낫다 또는 9배 효율이 더 높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숫자에 대한) 바보가 아니면 1을 투입해서 그냥 90짜리 제품을 만듭니다. 90짜리 제품은 1,000에 판매하고, 99짜리제품은 10,000에 판매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또 보통 그렇습니다. 짝퉁 vs 명품.) 90짜리 제품에 대한 사용자들이 불평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러면 1,000짜리 제품을 쓰면서 뭔 그런 불평불만이 많냐?는 식으로 대응합니다. 애초에 90 제품을 만든 자기 자신의 과오를 가격으로 덮어버립니다. 수치적으로는 합리적일지는 몰라도... 이건 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너무 익숙합니다. 그리고 90제품에 대한 불평이 쏟아지면 95짜리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더 노력하기 보다는 그냥 900, 800으로 가격을 낮춰서 그냥 임시방편으로 불만을 잠재웁니다. 뭔가 이상한 사회입니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사람은 합리적이다' 또는 '모든/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입니다. 고전 경제학의 튼튼한 기초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많은 연구에서 절대 사람은 합리적일 수 없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경제학의 가장 큰 실수는 '사람은 합리적이다'라는 가정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품질을 따질 때도 가격을 슬그머니 가져와서 '가격대비 성능'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도 사람의 합리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합리화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적 가치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보다 더 앞에 둬서는 안 됩니다. 현실적 타협은 가능하지만, 그래도 최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글의 제목을 '현실적 타협'이라고 정했지만, 제 마음 속에서는 아직 이 글의 제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1.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행동에 대한 글도 언제 한번 다시 정리해야겠습니다. 저의 행동패턴의 변화가 그동안의 IT/인터넷이 변화와 궤를 같이하는 듯합니다. 4~5년 전에는 눈을 뜨면 바로 메일부터 확인하던 것이, 2~3년 전에 트위터를 한참 사용할 때는 트위터부터 확인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페이스북부터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으로의 변화는 지난 10년 사이의 인터넷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음은 뭐가 될까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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