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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의 여러 측면.

지금 제주의 강정마을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럼비 바위 일대의 발파작업은 이미 시작되었고 조만간 구럼비 바위의 발파작업도 할 거라고 합니다. 보통의 자연의 파괴는 비가역 irreversible 과정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간혹 장기적으로 가역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현재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로만 가능합니다. 원래는 윗세오름에서도 백록담으로 오를 수 있지만, 현재 완전히 훼손된 자연을 복원시키기 위해서 지금 20년 넘도록 등산로가 폐쇄되어있습니다. 20년 간 폐쇄했지만 아직 제대로 복원이 되지 않아서 언제 재개방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등산로를 복원하기 위해서도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한데, 구럼비 바위는 한번 파괴되면 절대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자연과 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가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입니다. 그동안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여러 정의들을 보았지만 어제 읽은 책에서 본 정의가 마음에 들어서 오늘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 <성장의 한계[각주:1]> (by 도넬라 H. 메도즈, 데니스 L. 메도즈, 요르겐 랜더스)를 읽고 있는데, 1987년도 세계환경개발위원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아래와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욕구에 잘 대응하는' 사회이다. -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
그동안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이 위의 한 문장으로 완전히 해결된 듯합니다.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중요하게 둔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이득을 위해서 미래를 희생시키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시키지도 않는 것이 지속가능함입니다.

그런데 위의 문장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위의 정의는 지속가능성을 시간의 축에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완전한 지속가능성은 시간의 축에서 뿐만 아니라 공간의 축에서도 설명이 가능해야 합니다. 공간의 축에서 지속가능성을 다시 정의하면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곳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여기의 욕구를 잘 대응하는'정도가 될 듯합니다. 현재와 미래를 여기와 다른/저기로 단순하게 바꿨습니다. 전체 지구의 측면에서 봤을 때, 한 곳의 발전이 다른 곳의 발전을 훼손시킨다면 나라/지역간의 불균형과 격차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불균형의 사회는 지속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개척이 바로 공간적 지속가능성을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강대국의 이득을 위해서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아서 그들의 희생을 강요했던 그 시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결국 각 국에서 반란이 발생하게 되었고, 또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어졌습니다. 굳이 일제강제침략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지역 간의 불균형이 발생하면 지속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축이 더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축입니다. '나/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그들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나/우리의 욕구에 잘 대응하는'을 인간축에서의 지속가능성의 정의입니다. 현재 Occupy Wall Street (월가점령) 시위에서 말하는 1% 대 99%의 분리,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소득/경제에서 시작한 교육, 정치, 문화 등의 사회 전분야에서의 불평등과 불균형, 또는 양극화는 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의 이득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중소기업이나 서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절대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지속가능성은 현재와 미래, 여기와 저기, 그리고 나/우리와 너/그들 사이의 서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함께 보호하고 함께 발전하고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경쟁이 아닌 공존과 협력의 사회/시대가 결국은 지속가능한 사회/시대입니다.

  1. 본문에 책을 소개하였다고 해서 제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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