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s&Op

다양성의 실종

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다양성 Diversity이다. 건전한 생태계의 특징으로 다양성을 들 수가 있고, 창발적 창의력의 기저에도 다양성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다양성이 공격받고 있다. 제목과 같이 우리는 다양성이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봐도 그렇고 개인의 삶을 봐도 그렇다. 점점 우리의 삶이 단조로워지고 있다. 잠시 자신의 하루 일과를 떠올려봐라. 우리가 얼마나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아침에 일이나서 싣고 출근해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을 하고 그러고 나서 TV를 좀 보거나 독서를 한 후에 잠이 든다. 매일의 삶이 이렇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가? 가족, 회사동료, 그리고 몇몇 어릴 적 친구나 동기동창들. 그외에 더 만나는 사람도 없다. 우리의 온라인 생활은 어떤가? 적어도 10년 전에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에는 주요 인터넷 신문 홈페이지를 방문하던 것이 하루의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뉴스는 그냥 다음에 접속해서 보고, 그 외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글을 좀 올리는 정도가 전부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약 10개 정도의 사이트를 매일 접속했는데, 이제는 다음, 트위터, 페이스북정도만 매일 접속한다. 다른 사이트는 가끔 생각이 날 때나 이벤트가 있을 때만 접속한다. 하루의 일과, 만나는 사람, 온라인 접속패턴 등등의 우리/나의 일상을 살펴보면 진짜 단조로워졌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 또는 소셜미디어를 소위 소통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그곳에서 제대로된 소통을 했던가? 트위터에서는 헛소리를 하는 부류의 글은 읽지 않는다. 처음부터 팔로잉도 하지 않는다. 나와 정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 본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트위터보다 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좀 무거운 주제의 글을 올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짧은 글로 남길 뿐이지,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다양한 글들을 모두 보지는 않는다. 물론 페이스북은 친구가 300명 미만이라서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는 대강 훑어보기는 한다. 그래도 모든 글을 자세히 읽고, 링크의 글을 모두 확인해보고, 또 친구의 글이나 사진에 모두 라이크하거나 댓글을 달지 않는다. 소통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정작 나와 정치색이 비슷하거나 관심사가 같은 이들의 글만 보게 되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올려놓고 그저 라이크나 댓글을 기다리고 있다. 나만 그런가? (나의 온라인에서의 행동패턴에 대해서는 일전에 더 자세한 글을 올렸다. 참고: 온라인 활동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다.)

다양성을 뜻하는 단어인 Variety는 TV에서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뜻하기도 한다. 뉴스나 드라마처럼 주어진 장르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인 듯하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대화도 하고 게임도 하고.. 참 다양한 활동을 한 프로그램에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능프로그램을 버라이어티쇼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의 예능프로그램이 다양한가? 무한도전을 시발로한 리얼버라이어티가 한동안 방송을 장악하더니, 이제는 슈스케를 시발로한 온갖 공개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넘쳐난다. 다양함에서 시작했던 버라이어티도 다양함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것들은 어떨까?

단조로운 삶을 심플라이프 Simple Life라 부르기도 한다. 보통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전원에서의 삶을 묘사할 때 심플라이프라고 표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전원에서의 삶이 도시에서의 삶보다 더 복잡하다. 우리가 도시의 삶을 복잡하다고 말하지만,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도시는 영화 <모던 타임스>의 표현대로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단조롭다. 자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쉬다가 자는 삶이 전부다.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도 정해져있고, 자주 가는 곳도 정해져있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할 것같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크게는 춘하추동의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파종하고 물주고 비료주고 그러다가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는 긴밤을 방에서 쉴 것만같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오늘의 행동패턴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패턴은 분명 오늘과 다르다. 날씨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앞서 말한 삶의 패턴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다르다. 매일매일의 내외부 상태에 따라서 삶의 패턴이 다르다. 만나는 사람도 오늘 만났던 사람을 (가족이 아닌 이상에는) 내일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왜 시골에서의 삶을 심플라이프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귀농하는 이들은 심플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거다. 그냥 자연의 순리와 흐름에 따라 살겠다는 것은 심플라이프가 되겠지만, 자연의 흐름이 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어쨌던 인간이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삶이 더 단조로워졌다. 도시에서의 삶에서 다양성을 찾기가 어렵다. 다양성... 어디 갔어?

흔히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 그리고 적응. 이것을 진화라고 부른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이 이거 아닌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객체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객체는 멸종한다는 것이 진화론 아닌가? 그래서 '진화 = 적응'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같다. 그런데 이 적응이라는 것이 단조롭게 되는 과정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더욱더 능숙해지고 효육적이 되다는 의미다. 새로운 도시로 이주했을 때 처음에는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헤매고 다녔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 가장 빠른 길을 알고 누굴 만날지 정해진다. 그렇게 적응을 하고 나면 굳이 새로운 길로 가지 않는다.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기 전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다. 관념적으로 '진화 = 발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적응 = 진화 = 발전', 즉 '적응 = 발전'의 등식도 성립할 것같다. 그런데 적응이 발전일까? 적응은 발전이 멈춘 상태가 아닐까? 더 이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고, 한두가지 일에만 최적화된 사람에게서 새로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산업화와 도시화의 절정기에는 스스로 효율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그렇게 주어진 트랙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물론 가장 빨리 달리 사람은 1등을 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저 주어진 길을 가장 빠르게 또는 가장 짧게 가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면 안 되는 때가 온 것같다. 목표는 주어졌어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하나의 해답을 얻고 나서는 그 해답이 전부인양 그것만을 바라보며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로만 다녀서는 새로움을 얻을 수 없다. 때로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새로운 곳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진 목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에 해답으로 알았던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참 재미는 없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방법을 시도할 때 재미도 있고 같은 일이라도 또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배운 것, 얻은 것을 포기하는 것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삶이 더 단조로워진다.

다양성은 비효율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언어가 다양해서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 문화가 달라서 서로 오해하기도 한다. 종교가 달라서 때론 전쟁도 한다. (물론 나도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모두가 같은 종교를 가졌으면 하는 선교적 마인드가 있다.) 그러나 그런 다양성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 생태계에서 다양성이 없어진 이후에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자주 본다. 단지 한두 종류의 동/식물을 제거했을 뿐인데, 전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진 경우도 자주 본다. 그리고 동물들이 우성유전자를 가진 종으로 진화해서 한두종류의 동물종만 남게 되면, 그런 종들은 특정 질병 등의 면역체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대대로 동성동본 등의 근친과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단지 도덕윤리 때문이 아니라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자연의 순리에 따른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던 다양성이 무너지면 전체 생태계가 함께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 계속 말했듯이 우리의 삶과 문화에서 다양성이 실종되고 있다. 하나의 이념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방식이 최고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최고의 방법도 처음에는 다양한 방법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은 하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최고의 옵션을 찾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최고의 옵션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다양한 종류의 씨를 뿌려야 한다. 다양한 시도로 나무를 가꿔봐야 한다. 그래야지 최고의 품질을 제공하는 품종이 어떤 것인지? 최고로 잘 자라게 하는 육종방식이 뭔지를 찾을 수가 있다. (물론 이제까지의 역사경험으로 이런 종류는 다 알고 있겠지만... 수사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새로운 문제는 만났을 때, 단지 처음에 그 문제를 해결했던 그 방법을 일방적으로 최고의 방법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해보고 그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면 된다. 처음부터 다양성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한다. 창발적 창의의 근원은 다양성에 있다. Emergent creativity comes from diversity.

좀 간단하게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좀 길어졌다. 처음부터 글에서 하나의 결론을 보여줄 의도는 없었다. 그저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 결국에는 더 큰 문제에 봉착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 ... 네, 그냥 그렇다구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