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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미국 유럽 그리고 기독교 Written Christianity and Living Christianity

 지금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고 있다. (삼천포: 제러미 리프킨의 모든 도서들을 강력추천한다. 현재까지는 <소유의 종말>과 <공감의 시대>만 읽은 상태지만...) <유러피언 드림> 중에 유럽과 미국에서의 사형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기술한 부분이 있다. (pp. 366-372)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권을 중요시해야하는 세계인의 시각에서도 생각할 것이 많지만, 기도교인으로써 생각해봐야할 부분이 있어서 짧게나마 글을 적으려고 한다.

 책에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사형제도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유럽인들은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미국인들은 사형제도를 찬성한다고 한다. 물론, 많은 미국인들도 사형제를 반대하고, 일부 유럽인들도 사형제를 찬성하겠지만, 전반적으로 유럽은 반대, 미국은 찬성 쪽이라는 얘기다. 유럽은 중세 이후에, 그리고 특히 20세기의 제 1차, 2차 세계대전/전쟁을 경험하면서 국가권력에 의해서 희생되는 개인들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도 대표적인 사례지만, 그 이전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국가 또는 집단에 의해서 개인들의 삶과 생명이 짓밟힌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또는 사법기관에 의해서 한 사람 (범죄자)의 생명이 앗아지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서부개척시대를 거치면서 개인의 사유재산과 안전이 중시되는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사생활을 침해당하거나 개인적인 손해를 받는 경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다고 한다. 헐리우드의 서부영화를 보더라도, 강도떼 등의 범죄자들을 총으로 쏴죽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어떤 경우는 사법기관에 의해서 사형이 집행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한다. 개척시대의 전통이나 그를 흉내낸 영화/스토리에 노출된 미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는 사형에 대해서 더욱 가혹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그리고, <유러피언 드림>을 전체를 읽어보면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겠지만, 유럽인들은 인종이나 복지 등의 전체주의 쪽에 대한 생각이 더 많지만, 미국인들은 사유재산과 사생활 등의 개인주의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것 등의 여러 이유에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의 사형에 대한 생각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내가 더 흥미롭게 발견한 것은 단순히 사형제에 대한 유럽인과 미국인들의 인식의 차이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친 이후에 사실상 '기독교'의 신성이나 윤리는 폐기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물론 현재 유럽의 각 도시에 가면 오래된 카톨릭 성당이나 교회건축물들을 많이 접한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쪽에서는 카톨릭의 종교성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유럽인들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기독교의 전통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는 종교성이 많이 희석되었다. 대표적으로 주일/일요일에 교회를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구비율이 매우 낮다는 통계도 있다. 반면에, 미국의 경우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현재는 전체 인구 중에서 기독교 인구가 50%미만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국가는 아니다. 그러나, 카톨릭을 포함하면 여전히 미국 인구의 50%이상이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유럽보다 (기독교) 종교성이 높은 나라라는 점이다. 책에서 나오지만, 구약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함무라비법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런 구시대적인 적대감의 폐기처분되었다. 즉, 신약시대에는 원수도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불르짓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이 지금 무슨 잘못을 하지는지 모르나이다.'라는 마지막 매니페스토에서 보이듯이, 원수도 내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깔끔하게 설명을 하지 못했지만, 위의 두 문단에서 느끼는 괴리감을 느끼셨나요? 기독교의 윤리가 일상의 삶에서 희박해진 유럽인들은 지금 가장 기독교의 전통인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사형제 반대), 가장 기독교적이라는 미국에서는 신약에서 가르치는 그런 사랑과 관용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응징의 논리에 더 끌려서 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제가 마음이 아픈 것은 지금 이 땅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도 미국인들의 시각에 물들어있는 것같다는 점입니다. 물론, 일신론의 종교에서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인정해줘야 합니다. (저 역시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땅에서는 '나'가 아니면 모두 '원수'로 보는 현상이 강한 듯합니다. 그런데, 그 '원수'가 단순한 원수가 아니라 '악/악마'로 보는 것같은 이상한 현상이 많이 벌어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나 뿐만 아니라,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돌아가셨는데,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나/우리 아니면 모두 '악'으로 규정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원수도 사랑하는 그런 가르침은 그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고, 그저 일요일마다 설교에서만 언급되는 구시대적인 유물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의 삶에서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을까요?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저부터 많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반성을 한다지만, 또 내일 어떤 미움이 제 마음 속에서 자라나게될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 더욱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성경이 아닌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베푸는 그런 크리스챤을 꿈꿉니다. 한손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리고 또 다른 손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전에 스스로 회개합시다. 복음이 없는 사랑을 강조하는 세계을 질타하기 전에, 사랑이 없는 복음만을 강조하는 크리스챤들이 먼저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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