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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비판에 자유롭자. Criticism-Free Nation

 언제부턴가 적고 싶었던 주제 '비판'에 대해서 글을 적을까 합니다. 오래전부터 적고 싶었던 주제지만 어떤 내요을 적을지, 또는 어느 수위로 글을 적을지에 대해서 전혀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또 생각나는대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듯합니다.

 오프라인에서 절 아는 사람들은 저에 대해서 좋게 표현하면 '과묵하다'라고 말해줄 거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제는 과연 말은 할 수 있기는 있나?'라고 생각할 거다. 그정도로 평소에 말이 없다. 매주 열리는 팀주간회의 때 말하는 것이 아마도 내가 일주일동안 하는 말의 90%는 될 듯하다. 이런 내가 그래도 나름 글은 자주 적는 것같다. 글을 적는만큼만 말을 해도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적는 글의 대부분은 격하게 표현하면 '독설'이고, 순화해서 표현하면 '비판'이다. 어릴적부터 그렇게 자라온 것은 아니지만, 좋은말보다는 나쁜말 (?)에 더 익숙해진 것같다. 그리고, 이상하게 사회/회사에 뿌리내린 '칭찬증후군'에 대해서 치를 떨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표현 및 대상에서 비판의 수위를 높이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모든 이들이 좋은 말을 해주기 때문에 내가 굳이 덧붙일 이유가 없는지도 모르겠고, 반대로 어느 누구도 사실/현상에 대해서 톡까놓고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희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독설/비판을 하면 그냥 '제는 왜 저래?'라고 말하지만, 그런 글을 적는 순간 나는 스스로가 '불이 켜진' 초가 된다.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감내한다. 진심이다.

 서론이 길었다. 왜 이렇게 길었냐구? 평소 글버릇이 그런 것도 있지만,.. 평소에 내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 아주 일부는 지극히 공감을 한다고 표현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는 '제는 또 설치고 있네'정도일 듯하고, 그리고 내 글에서 언급되는 일부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를 가지고 걸고 넘어지나? 기분나쁘다.'정도로 반응할 듯하다. 실제, 마지막의 경우에 대해서 간접 채널을 통해서 전달받곤 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글쓰는 것을 중단한 적도 여러번이고, 매번 다른 곳에 글을 적기를 반복했다. (아, 중요한 점 하나.. 내 글/비판은 사석에서 이뤄지는 경우보다는 '공개'적인 곳에서 많이 이뤄진다.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사내 게시판/야머 등에서 이뤄졌다.) 내 글에서 직간적적으로 언급된 이들이 내 글 그리고 나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것같다. 난 절대 누구도 비난한 적이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언제나 비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것같다. 은연중에 누군가를 비난했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난 언제나 비판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받아들이는 이의 입장에서는 비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비판을 하는데, 상대는 비난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제발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이다. 비판에서 자유롭자고 했던 것은 실제 비판의 내용을 비난으로 해석하지 말자는 의도다.

 한영사전에서 비판을 찾아보면, criticism (critique)이다. 비난을 찾아본다면 blame이 나올 거다. (그런데, 실제 찾아보면 비난에서 blame과 criticism이 같이 나오다.) 처음에 글을 적을 때는 나는 criticism을 하는 것이지, blame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criticism이라는 단어의 뜻에 blame이 포함되어있어서 잠시 당황스럽다. 내가 국어학자/언어학자는 아니지만, 나의 인식 속에서 비판과 비난을 구분한다면 이렇다. 

 첫째,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다르다는 거다. '누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비판을 할 때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그녀의 행위나 결과를 비판하는 것이다. 반대로, 비난의 경우 사람의 행적보다는 그 사람 자체가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그것 (제품/서비스)을 만든 이를 질책/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완성도와 품질이 내 기대에 못 미친다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비판을 받는다면 절대로 그 비판이 '나'를 향한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내가 한 어떤 행동이나 그 결과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비판을 들으면 '내가 어쨌다고?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났는데?'라는 반응은 잘못된 거다. 절대 '네가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나의 어떤 행동이 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했을까?' 또는 '내가 만든 제품/서비스의 어떤 부분을 수정하면 더 많은이들이 만족을 느낄까?'를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비판'에 대처하는 반응이다. 비판은 '표면적인 네가티브 피드백'이다. 이어서 말하겠지만, 사랑/애정이 없으면 비판도 없다. 비판의 겉은 부정/네가티브지만, 그 속을 들려다보면 긍정/파지티브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비판을 받지 못하는 제품/서비스는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제품/서비스가 완벽한 것이 아닌 이상은... 그런데, 세상에 완벽은 없다. 그러니 모든 제품/서비스는 당연히 비판 (피드백)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무조건 '잘했다'라는 (겉보기 파지티브) 피드백이 '독'이다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두번째로, 비판과 비난은 그 의도가 다르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비판도 없다. 굳이 내 관심권 밖의 사항에 대해서 입아프고, 또 다른 이들의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나쁜 표현을 할 필요가 없다. 세상의 평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이 시대에 굳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태그를 달고 살 이유가 전혀 없다. 내가 평소에 애용하던 제품/서비스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거 잘못됬어요'라고 말하는 것이고,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또는 기다려왔던 제푼/서비스에 대해서 '왜 좀더 완성도가 높은 제품/서비스를 못 만든거죠?'라고 묻는 거다. 내가 이 회사 (다음)에 입사해서 3년 동안 무수히 비판했던 제품/서비스는 손에 꼽을 정도다. 왜냐하면 내가 평소에 사용하고 지켜보던 제품/서비스는 제한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3년동안 내가 전혀 비판하지 않았던 제품/서비스라면, 그것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전혀 사용하지도 않고 사용할 가치도 못 느낀 제품/서비스라는 반증이다. 비판이 없다고 좋아하다보면 어느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다. 그 제품/서비스는 그 순간 파국을 맞이할 거다. 반면에, 비난의 경우 사랑보다는 증오의 산물이다. '애증'의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이들도 '애정'은 '사물'에게, '증오'는 '사람'에게 향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번째로, 비판과 비난은 근거의 유무가 다른 것같다. (차마, '다르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 근거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대상'이 다르다에서 파생된 건지도 모르겠다. 행동이나 결과에는 판단할 잣대가 있지만, 사람은 딱히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없는 것같다. '증오'에서처럼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똑부러진 근거에 바탕을 두기 보다는 '그냥 싫다'의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더 그렇다. 어떤 이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고쳐라라고 말하면 될 것을, '난 제 싫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같다. '제 싫어'라는 말에서 근거를 찾기가 참 어렵다. '죄는 미워하데,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말에도 어쩌면 이런 논리가 깔린 것같다. '죄'는 법률이나 관습 등의 잣대레 비춰서 미워해야할 근거가 있지만, 사람은 딱히 그런 근거/규칙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근거라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고 많은 이들이 수긍할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좀 비정상/비규칙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간혹 잘못된 비판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나의 비판이 잘못된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잘못된 것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고 자기 변호도 해본다.) 그래서, 근거의 정형화 및 객관화가 중요하다. 주관성에 바탕을 두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바뀔 수도 또는 비칠 수도 있다. 객관적, 지능적 증거와 주관적, 감정적 증거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사물 (사람은 그 대상에서 빼야한다. 가능하면)을 평가해야할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정리해보자. 비판을 할 때 또는 받을 때는, '나'를 나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 또는 그로 인한 '결과'에 문제가 있다라는 피드백을 주는/받는 것이다. 그런 피드백은 사랑과 관심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비판'을 받을 때, 절대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리고 '비판'을 할 때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행위/결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직시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받아들일 충분한 근거가 있다. 지난 3년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을 회상해보면, 나는 분명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비판 (표면적 네가티브 피드백)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경우에 대해서 근거가 불충분한 '나무람'이 아니었나?라는 점에서 반성을 한다. 그래도, 저대 비난의 의도는 없었다. 앞으로 비판을 할 때는 감정적 표현보다는 지능적 표현 (근거/증거)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결론. 그래서 '비판에서 자유롭자'라는 제목은 절대 '바판받을 일을 하지 말자'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조심한다고 해서 절대 비판을 받지 않을 완벽/완전한 것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비판'을 '비난'이 아닌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비판 속에서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근전한 사회에서 '독설'이 발붙일 틈이 없을지는 모르나, 의도적으로 '독설'이 배데된 사회는 근전한 사회가 아니다. 자유롭게 비판을 하고 자유롭게 반론을 하자. 그리고, 합에 이르자. 이게 정반합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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