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일이다. 벌써 2026년도 1/3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잠정 은퇴자가 된 지 이미 반년이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은 속절없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아직 경기도의 아파트를 판매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게 길어질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일자리라도 알아봤어야 했나라는 약간의 미련이 남는다.
작년 여름에 퇴사를 결정할 때는 이직해서 최소 2~3년은 더 현업에서 머물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력서도 두 군데 제출했고 면접도 봤다. 면접을 기다리면서 과연 내가 그 회사에 필요한 인재인가?를 고민했다. 입사하면 어떻게라도 조금은 도움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필수불가결한 인재가 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가장 큰 장애는 40대 후반이라는 나이 때문이다. 나름 학위도 있고 거의 20년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 받을 연봉은 그냥 무시할 수준은 아닐 거고, 그러면 그에 따른 기대치도 높을 거다. 그렇기에 면접관에게 나를 어떻게 어필하면 좋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장점은 무엇일까? 과연 학위와 20년 경력이 이직이 도움이 될까? 나의 학위와 경력은 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전 같았으면 나는 기술에서 데이터 분석과 알고리즘 개발 (ML/AI)에, 그리고 도메인에서 검색, 쇼핑, 광고 등의 지식이 있다고 어필했을 거다. 그런데 90년대 이후로 인터넷 보급, 검색 기술, 모바일 기술로 인해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내가 갖고 있는 지식보다 더 많은 지식을 바로 얻을 수 있다. 접속의 시대 Age of Access에 개인의 명시적 지식 Explicit Knowledge은 무의미해졌다. 그렇지만 나는 20년이 넘는 데이터 분석 경험, 추천 등의 알고리즘을 개발한 경험, 그리고 그런 경험을 논문 작성하고 발표하는 경험을 갖고 있다. 즉 나만의 암묵지 Implicit Knowledge, 즉 노하우를 갖고 있다. 나만의 암묵지는 인터넷과 검색이 넘볼 수 없다. 그런데 ChatGPT의 등장과 함께 나만의 암묵지는 사라졌다. 나와 비슷한 또는 더 많은 경험이 AI 모델 파라미터에 녹아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새로운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나만의 과정이 짧은 프롬프트만으로 더 정형화된 과정을 AI는 알려준다. 타인에게 내세울 나만의 지식과 경험이 이젠 없다.
‘면접 망했구나’ 등에 한 줄기 땀이 흘렀다. 지식도 나의 것이 아니고 경험도 나의 것이 아니면 나는 수십 년 동안 뭘 배웠고 뭘 경험했던 걸까? 새로운 직장, 직업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인공지능 시대에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거다. 그냥 이직의 마음을 접고 지금 직장과 동료들에게 더 잘 지내보자라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있을 거다. 나도 퇴사가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면 비슷한 선택을 했을 거다. 지능의 시대 Age of Intelligence에 나의 장점은 없는 걸까? 그때 떠오른 것이 관심과 관점 Preference & Perspective였다. 오랜 시간 내 삶을 영위하면서 축적한 나만의 관심과 그에 따른 나만의 관점은 인터넷도 인공지능도 내게서 앗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약하더라도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고 현상에 의문을 품고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각 개인만의 다른 관심과 관점이 인공지능의 평균과 만나면 뻔하지 않은 미래로 갈 수 있다.
탈지식, 탈경험의 시대에 관심과 관점이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갖고 세상을 헤쳐나가길 바란다. 물론 나는 이직에 실피했지만…ㅎㅎㅎ
며칠 전에 회사 업무에 AI를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신입만이 AI를 제대로 활용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그 신입이 자신의 프롬프트 등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글이 회자됐다. 개인 시간에 AI를 공부해서 자신만의 노하우(해자 Moat)를 갖게 됐다는 신입의 입장도 이해되고,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끼리 너무 벽을 쌓는다는 불만을 토로한 글쓴이의 입장도 이해된다. 한편으론 (쉽게 터득할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고 그저 얻으려는 사람들도 이해되지 않고 그 알량한 작은 지식이 영원히 나만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신입도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현업에서 비슷한 사례가 많을 것 같다. 굳이 해결책을 주자면, 소정의 강사료를 제공하고 신입에게 자신이 공부한 프롬프팅 기술과 예시를 알려주는 세미나를 가지면 좋을 것 같다. 너무 작지 않은 회사라면 그 신입에게 그런 사내 교육 관련 직책 (+ 보상)을 주는 것도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AI한테 그 업무에 적합한 프롬프트를 만들어줘라는 간단한 명령으로 그 신입의 해자를 바로 부숴버릴 수도 있고, 또 어떤 회사라면 그냥 AI를 활용하는 모든 잡다한 업무가 그 신입한테만 몰려서 보상 없이 피곤만 해질 수도 있다. 나만의 관심과 관점이 아닌 나만의 지식과 노하우는 지능의 시대에는 없다. 쉽게 뚫리는 것은 해자가 아니다.
지능의 탄생과 함께 우리의 지식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남는 나만의 방법이 구시대의 그것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