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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을 달리 해석하는 것은 읽는 이의 자유지만 그것이 내 의도는 아님을 미리 밝힙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야근을 권하지 않는다. 계약을 맺은대로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야근 또는 추가 근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비록 본인 (또는 상사나 동료)의 무능, 잘못 짜여진 계획, 부족한 리소스 (시간) 등의 이유로 인한 잔업을 해결하기 위한 야근도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합의와 공감대가 있었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지난 연말부터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됐고, 이것 때문에 서울에서 파견 오신 분도 계신다.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오신 분들은 잠만 숙소에서 자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2시 또는 그보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것이 다반사다. 평소에도 일찍 퇴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 늦게까지 야근하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퇴근하지는 못하더라도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게 된다. 물론, 사무실에 남아있는다고 일만 하는 것은 아니고 1~2시간정도는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괜히 남아서 게임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얄밉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먼저 사무실을 떠나는 것이 편하지 않다.

참고로, 기본적으로 나는 제주에 내려오면서 나인투나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가능하면 아침 9시 이전에 출근해서 밤에 8시나 9시정도까지는 사무실을 지키려고 한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것이 몸에 베어 그런 것도 있지만, 워크홀릭이라서 그렇게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8시간 동안 모든 능력과 집중력을 압축해서 소진해버리고, 일과 무관한 세상으로 도피하는 (그리고 다음날 또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일터로 나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저 8시간동안 집중할 것을 9~10시간으로 양적으로 완화, 분배해서 여유롭게 일을 하고 싶을 따름이다. 담배를 피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도 떨지 않기 때문에 잠시 머리 식히려고 퍼즐을 하는 것은 좀 용납해줘으면 한다. (사실 퍼즐을 하고 있을 때는 가장 많이/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쨋든 그렇게 조금 늦게 회사에 남아있다보니 이제 저녁 7시가 넘어서 야근하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가 없고, 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있다. (실은 한 두 사람 때문에 불필요하게 사무실 전체가 환희 불켜져있는 것이 맞다.) 내가 처음 제주로 내려왔던 6년 전과는 사뭇 다른 사무실 풍경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밤 늦게 일하던 대부분의 동료들이 이제 결혼해서 애를 낳고 가정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유이기는 하지만… 잠시 감정을 추스리고...

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새로 들어온 젊은 친구들이 야근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보는 것도 아니다. 간혹 급한 잔업을 처리하기 위해서 야근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야근이 사라진 사무실의 풍경이 이제 전혀 낯설지가 않다. 칼출근, 칼퇴근이 나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근태관리는 중요하다.)

잔업에 의한 야근은 분명 반대하지만, 지금은 열정에 의한 야근마저 사라졌다는 것에 답답하고 암울하다는 얘기다. 지금은 형식상 야근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열정과 의욕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업무의 연장선에서 더 나은 제품/서비스/성능을 위한 야근도 사라졌지만, 더 심각한 것은 새롭고 다른 것을 시도해보기 위한 야근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자발성에 의한 야근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직원들이 창조성과 생산성을 위해서 잉여력을 기꺼이/자발적으로 투자하지 않는다. 그냥 소비하고 소진할 뿐 창조하지 않는다. 다양한 원인과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열정이 사라졌고 그 현상으로 야근하는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몇 년 전 소셜 커머스가 이제 막 생겨나던 시절에 몇몇 직원들이 듀얼잡으로 소셜 커머스 서비스를 운영하다가 적발돼서 감봉 등의 징계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분명 이중취업을 금지한 회사 내규를 어겼기 때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 또는 실수 또는 잘못을 단순히 감봉하고 징계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기회로 삼아서 사내 벤처 형식으로 도전의 기회/장으로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확신컨대 해당 소셜 커머스 서비스는 별로 빛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통해서 사내의 다른 직원들도 도전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고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벌써 2~3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그런 기회를 통해서 그 사이에 제도권 내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었던 다양한 서비스나 제품이 만들어져서, 회사 전체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하고 수익이 되는 사업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실패했을 수도 있다.)

낮에는 맡은 회사일에 충실하고 그리고 퇴근 후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저녁이 있는 삶은 중요하다) 또 다른 기회를 위한 도전이 이뤄지는 삶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벅차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야근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욕과 열정이 사라졌다.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부속품이 되어 회사를 힘겹게 다니는 동료들의 모습만 보인다. 새로운 도전, 무한한 꿈, 넘치는 열정… 여유가 없으니 문화도 없고 시스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회사에 경쟁력있는 서비스가 없는 것도, 주가가 시원치 않은 것도 문제겠지만, 그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런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다. 단, 열정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직원들이 존재할 때의 얘기다. 지금은 직원들에게서 그런 열정과 도전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회사의 전망이 어둡다는 거다. 캐시카우는 만들어서 키우면 되고 그러면 자연스레 주가는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캐시카우는 만들고 키우는 직원이 없다면… 그들의 열정과 상상력과 도전이 없다면….?

야근이 사라진 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함께, 아니 먼저 사라져버린 열정과 도전이 아쉽다. 나는 아직도 가슴이 뛰고 있는데… (몸도 지쳤고 마음에 상처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직은 버틸 수 있지만… 힘든 건 힘들다.) 로켓에 빈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이젠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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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innyland.tistory.com BlogIcon 바람이 머무는 하늘 2014.05.13 10:5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잘 보고 갑니다. ^^;
    추천 시스템에 대해서 열심히 보다가 가벼운 글까지 함께 읽게 되었네요.

    야근에 대해서 읽고 있으니 문득 프랑스로 건너간 어떤 개발자가 겪은 야근에 대한 SNS가 생각나네요. 근면한 한국 개발자로서 프랑스에서 일하면서 8시, 9시까지 남아 일을 하다보니 매니저가 와서 화를 내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열심히 하고 싶어서 그런거다. 성과가 나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느냐' 라고 응수했다지요. 매니저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한 사람으로 인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일의 성과보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저녁시간이 훨씬 소중하다. 우리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문화를 제발 망가트리지 말아달라' 라고요. 역시 나라마다 문화가 틀리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단순히 생겨난 문화가 아닌, 개발자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어간 근무 문화가 정착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 역시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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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신사 Bloomburg에서 2014년도에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대한민국을 꼽았다. R&D 투자, 제조능력, 생산성, 하이테크 밀집도, 고등교육 효율성, 연구원 분포도, 특허 등록 등 7개 부분으로 나눠서 평가했는데, 생산성 부분만 33위로 다소 낮을 뿐 다른 항목들은 2~6위로 골고루 상위권을 차지했다. 개별 항목에서 (특출나게) 1위를 한 것은 없다. 실제가 그렇든 아니면 그냥 자조든 대한민국하면 창조성이나 혁신이 뒤떨어진 나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이런 평가가 나왔는지 의아하다. (이미 국내 언론사들을 호들갑을 떨었다.) ** 참고. Bloomberg: Most Innovative in the World 2014

(어제) 낮에 우연히 TED 동영상을 하나 시청했다. Andreas Schleicher가 2012년에 발표한 “Use data to build better schools”이라는 동영상인데, 제목과 같이 교육 시스템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고 발표 내용 중에 아래와 같은 자료를 젯했다. 뒤쪽에 하이라이트된 곳이 대한민국이다. 즉 대한민국은 현재 학업 성취도가 매우 높다는 얘기다.

"TED: 더 좋은 학교를 구축하기 위한 데이터 사용하기" 동영상에서 캡쳐함


문득 떠오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종종 공개연설에서 우리 나라의 교육 수준 및 학구열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호들갑을 뜬 참고 기사들은 그냥 다음에서 검색해서 보기 바란다.)

그래서 페이스북이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아침에 블룸버그의 가장 혁신적인 국가를 랭킹한 것도 그렇고, TED 동영상이나 오바마의 연설에서 한국의 교육 수준이 높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수치로 보여지는 대한민국은 참 환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상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그냥 겉으로 드러난 수치만으로 대한민국을 칭송하는 것을 보면 참 기가 막힌다.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즉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낙후되어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거다. 교육비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공교육은 무너지고 대부분 사교육, 즉 학원과 과외로 채워져있다. 체육이나 음악/악기, 미술 등의 다양한 인성교육보다는 국영수에 대부분 치중되어있다.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으로 대변되는 닭장에 가둬서 사육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다. 창의성이나 다양성, 자율성과는 전혀 먼 주입식 교육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수치로만 보여지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참 환상적인가 보다.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하루에 12~14시간 이상을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고, 공부만이 살길이라며 가계소득의 상당액을 교육에 투자하고 있는 모습에서 학구열을 느끼는 것같다. 물론 단기적으로 그런 노력의 결실로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부에서도 스스로 비판하는 비정상적인 교육 현실이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같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인 미국에 사는 중국인 부모의 Tiger Mom도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비정상화를 논하기에 앞서, 이런 인식의 부조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간 및 투자액 등) 수치에 함몰되어 숨겨져버린 학생들의 인권, 개성, 다양성, 자율성 등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가?

갑자기 며칠 전에 본 글이 생각난다. 리가르드 IMF 총재가 김용 세계은행 총재에게 한국은 스웨덴과 함께 학업성취도가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는데, 김용 총재는 8시부터 11시까지 공부한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리가르도 총재가 하루에 3시간만 공부하고도 이런 성과를 내는 것에 놀라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해했을 거다. 위의 11시는 밤 11시라는 것을...

앨빈 토플러가 말했던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라는 말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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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구의 개인주의가 창의력의 원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사실인지 아니면 그냥 신화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Pixar 스튜디오에는 화장실이 건물 중앙에 한 곳에만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생리현상은 해결해야 하고, 그럴려면 중앙에 있는 화장실로 모여야 합니다. 그렇게 모이고 부딪히면서 서로 얘기를 하다보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갈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토로하는 경우도 있을테고, 때로는 최근에 자신이 했던 프로젝트나 잘 된 일을 뽐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과 대화하기도 하고, 또는 그런 이를 연결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연에 의한 창발을 기대하며 화장실은 하나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빌딩 숲 사이로 점심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수다를 떨면서 식당으로 향합니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픽사의 그것처럼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샘솟아날 것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음성지원이 될 것같다.) 이렇게 무리를 지은 사람들을 찬찬히 확인해보면 이미 평소에 친하게 지내거나 같이 일하고 있는, 그리고 많은 경우 같은 부서, 팀원들끼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구내 식당을 이용할 때도 보통 팀원들끼리 같이 내려와서 같이 식사를 합니다. 같이 내려와서 따로 앉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이유로 한두명이 따로 앉게 되면 괜히 미안해하는 듯합니다. 간혹 혼자 내려오면 가장 먼저 누구랑 같이 먹을지 친한 동료를 찾기에 바쁩니다. 식사나 다과 자리에서 업무 얘기보다는 우스개 소리만 하면서 식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초조히 기다립니다.

이 두 사례에서 어쩌면 서양의 개인주의 풍토가 오히려 그들에게 창의력의 원동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평소에는 각자 흐트져서 생활하다가도 또 모여서 일해야할 때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미국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 소수 그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 한국인 게스트연구자들끼리는 매번 식당에서 모여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늘 비슷한 일상을 얘기합니다. 물론 그런 관계가 나중에 중차대한 일에서 다른 창발성과 다양한 연결에 기여하겠지만, 얼핏 봐서는 이질성이 모여서 새로운 동질성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양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TV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냥 평소에는 각자 생활하다가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긴 대화가 이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영화적 설정일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만 모이다보니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레 배타적이 될 수 밖에 없고, 또 그 그룹 내에서 생각과 시각의 동질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룹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은 가능하지만, 외부의 생각이나 현상을 접할 기회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곳에서는 평소에는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각자가 다양한 경험과 견해를 가지고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새로운 팀을 바로 구성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끼리 문화에서 누군가를 새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또 한명이 다른 그룹에 내보내게 되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개인으로 활동했으면 필요에 따라서 뭉치고 흩어지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다양한 연결에 의한 우연한 아이디어의 창발이 곧 창의성입니다. 빛과 그림자는 늘 상존합니다. 공동체 문화가 공동체 내에서는 좋지만, 또 제주의 괴당과 비슷하게 공동체 외부와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면역학/유전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비슷해지면 예측치 못한 돌연변이의 발생이 잦아지고, 특정 유전병으로 인해서 그 유전자 그룹 모두가 괴멸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 생물책에서 읽은 유전적으로 비슷해진 치타 무리에 대한 우려의 글이 여전히 머리에 생생합니다. 동질감 때문에 평소에는 공동체를 이루지만, 그 동질감을 파괴하는 새로운 병이 발생하면 모두가 파멸의 길에 이릅니다. 한 때 화려했던 문명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의 이유 중에 유전적 동질성이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유럽인들에 의해서 정복되었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원주민이 멸종된 것도 면역/유전병에 이유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깨끗하면 병에 더 잘 걸린다는 말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창조경제라는 정체불명의 말을 만들어낼만큼 '창조성' '창의성'은 중요합니다. 순수한 한 사람의 노력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창조성도 있지만, 요즘에는 다양한 연결을 통한 창발적 창의성이 큰 힘을 발휩합니다. 다양한 생각, 다양한 견해, 다양한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서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끼리는 처음에는 뭉치기는 쉽겠지만, 새로운 진보를 예상하기는 힘듭니다. 적어도 IT분야에서 미국 또는 실리콘밸리가 왜 앞서갈까?를 생각해보면서 어쩌면 개인주의가 오히려 창조성을 자극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여담은 하면 나중에 꼬투리 잡히는데…) 지금 창조경제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모든 국민들을 하나의 틀에 맞도록 컨트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절대 창조성이 발현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그냥 '종북' 딱지를 붙이는 세상에서 다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며, 그 상상된 것을 겉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다름이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말살시키는 것은… 그리고 이중잣대로 사회를 판단하는 것도 창조성에는 별로 좋지 않은 듯합니다. 자유를 외치면서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자유만을 감싸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규제를 철폐하겠다고는 하지만, 1%의 이득에 관련된 것만 해당되고 나머지 대다수가 불편해하는 것은 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민영화된 포스코의 회장으로 정권의 사람이 내정되(었다)는 소문/현상을 후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민영화가 결국 이득의 사유화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민영화 및 경쟁체계가 좋다면, 대통령 등의 권한도 민영화하고 두명 이상을 뽑아서 경쟁시키면 우리 나라가 더 좋아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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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ard Business Review에 올라온 David Burkus의 'Innovation isn's an idea problem'을 의역,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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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혁신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외부의 시각으로 생각하기 또는 blue sky 사고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조직에서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아이디어의 부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혁신은 아이디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의 문제다.

대표적으로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가장 먼저 연구개발했음에도 그것을 상업화시키지 못했고, 제록스는 다양한 PC 기술을 개발했지만 그것들은 스티브 잡스 또는 애플에 의해서 빛을 발했고, 윌리엄 심스가 루저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어필하기 전까지는 US Navy에서 그의 혁신적인 제안들을 모두 거부했었다. 똑똑한 사람들이나 견고한 회사들이 적은 불확실성에 노출되었을 때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편견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Wharton의 제니퍼 뮬러의 연구에서 불확실성과 혁신/창의성의 관계를 보여준다. (너무 간략히 설명되어 실험 설계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움) 연구/실험에서는 두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한쪽 그룹 (실험군)에는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면 임의로 추가 수고비가 주어진다고 알려줬다. (임의의 추가 수고비가 불확실성을 제공함) 실험은 창의성과 실용성의 암묵적 인식을 측정하는 것이다. 창의성이나 실용성을 표시하는 단어들이 긍정적 또는 부정적 형용사들과 함께 주어졌을 때, 실험자들은 더 선호하는 단어구를 선별하도록 했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대해서 그들의 느낌을 명시적으로 7점 스케일로 레이팅하도록 했다.

이 실험에서 실험군 (임의성/불확실성이 가해진 그룹)들이 창의성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실제 창의적인 단어군보다는 실용적인 단어군을 더 선호하는 것을 발견했고, 후속 연구에서 불확실성에 노출된 그룹에서 대조군보다 새로운 혁신적인 제품에 (통게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서) 더 낮은 점수를 부여했다 (즉,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혁신적이어서 모험적인 것보다 더 실용적이고 확실한 대안을 선택함). 불확실한 상황에서 창의성에 대한 부정적인 바이어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주목할만한 혁신들이 초기에 거절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불확실한 상황은 경영자들은 혁신에 대한 강의 욕구를 느끼지만 경쟁적 이점을 줄 수 있는 혁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문단 마지막에 재미있는 표현이 쓰여져있네요. 'the ideas that could keep company alive are being killed too quickly')

이런 아이디어가 사장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이디어의 채택을 오직 경영자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전사의 모든 직원들에 의해서 채택되도록 해야 한다. 로더 아일랜드의 Rite-Solutions에서 10년 넘도록 Mutual Fun이라는 '아이디어 마켓'을 사내에 설치해두고, 모든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주식시장과 같이 직원들이 개별 아이디어에 (가상 화폐로) 투자하고 또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충분한 지지를 얻은 아이디어는 실제 프로젝트화되고 참여/지지한 모든 직원들이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서 얻은 수익을 공유하도록 했다. 몇 년 안에 그런 프로젝트를 통해서 점진적 개선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산업의 제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품을 만들어냈다. 첫 해에만 뮤츄얼펀을 통해서 회사의 신산업의 성장의 50%를 담당했다. 그런 즉각적인 수익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회사 전반에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 인지의 민주화 -- 문화를 형성했다. (주, 대중의 지혜에서처럼 집단사고에서 벗어나야지 가능한 시나리오임)

이미 주변에 좋은 아이디어는 편재하고 있으며 그런 것들을 적절히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혁신은 아이디어 솔루션이 아니라 인지 솔루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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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논리/흐름은 좀 이상하지만 (불확실성이 생뚱맞게 끼어듬) 전체적인 내용은 수긍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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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에 주제 넘게 '교육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도발적인 글을 적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우민화, 즉 생산적인 근로자 양성을 목적으로 했던 근대 교육체계가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미래의 사회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가 창의적인 인재를 요한다면 그런 인재를 키워내는, 아니 학생들이 그런 인재로 자라나게 하는 환경을 준비하면 됩니다. 근대 우민화 교육의 종말을 선언했을 뿐, 교육 그 자체의 효용성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학생들이 실생활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지식을 흡수하도록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경험을 스스로 창조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버려둔다는 말의 함의는 그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창의적 자유를 허용하고, 또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호기심과 도전을 가로막는 교육은 이제 시효를 종료해야 합니다. 미래의 교육은 분명 뇌를 사용하는 것 (암기)이 아니라 뇌를 활용하는 것 (사고/창의)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제러미 리프킨의 신간 <3차 산업혁명>을 읽고 있습니다. 책의 말미에 교육에 대한 챕터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느끼고 있는 근대 교육의 문제와 그리고 해결책에 대해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전개해놓은 것을 읽고 놀랬습니다. 리프킨도 근대 교육이 단순히 이미 죽은 그래서 더 이상 효용가치도 없는 지식을 흡수하는 것에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리프킨이 분명히 밝히는 대안은 학생들에게 공감의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작 <공감의 시대>를 읽어보면 더 도움이 될 듯합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은 자연과의 교감을 의미하고, 또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인간/동료와의 교감을 의미합니다. 물론 직접적인 교감에 더해서, IT기술 등의 현대의 이기를 이용해서 전 세계와의 교감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시야를 세계의 수준으로 넓히고 지구 반대편의 인류들과도 소통하라는 것임)

리프킨이 말하는 공감 또는 교감 또는 소통은 결국 interaction을 의미합니다. 자연과의 interaction, 그리고 사람과의 interaction입니다. Interaction이란 달리 표현하면 곧 '경험 Experience'입니다. 자연을 경험하고, 사람을 경험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연을 경험하고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달리 말해서 -- 저의 표현대로라면 -- 주어진 자연 환경 하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풍습, 즉 문화를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책에 적혀있는 문자로 된 지식을 읽고 흡수하는 20세기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서, 주변의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또 더 나아가 다양한 문화를 직접 만들도록 허용해주는 것이 21세기의 교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학생들에게 풀이법을 던져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문제를 던져줘야 합니다. 그 문제를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새로운 가정 assumptions을 더 하거나 제약조건 constraints을 설정해서 문제를 단순화시킬 수도 있고, 더 발전하면 그런 가정이나 제약사항 중에 일부를 제거하면서 문제를 일반화시킬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면서,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을 스스로 사고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배워야 합니다. (경험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리프킨도 강조한 '토론'을 통해서 공동으로 사고하는 것도 필요하고, 또 인터넷 등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세계의 학생들의 생각을 가미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일전에 다음 제주에서 <인사이드 애플>에 대한 임정욱님의 강연 후에 적었던 <기업의 문화와 철학과 가치는 소중하다>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그 글에서는 쿨선언 The Cook Doctrine으로 알려진 'We believe in...'이라는 글을 소개했습니다. 그 글에 바로 정욱님께서 답글을 달아주셨습니다. 팀쿡이 즉석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팀쿡의 모교인 Auburn University의 신조인 Auburn Creed를 평소에 외우고 다녔고, 이 Auburn Creed이 'we believe in..'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는 미래 교육 (적어도 한국에서는)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바로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또 생각의 틀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쿡이 평소에 Auburn Creed를 암송하면서 수백 수천번 'we believe in...'을 반복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자신이 재직하는 회사의 신조는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도록 해줬을 것이라 유추가 가능합니다. Auburn Creed의 내용을 통해서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신념, 또는 정심을 심어주었고, 그 형식을 통해서는 생각의 틀을 만들어줬습니다. 추측하건데 팀쿡이 언젠가는 'we believe in...'로 시작하는 멋진 말을 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총회의에서 우발적으로 쿡선언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결국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되어야 하고, 좋은 생각의 틀/템플릿을 제공해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경험하고, 교감하고, 생각하고, 창조하고... 교육의 미래는 결국 미래 인재들의 창의성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체계를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이 직접 만들어가야할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금 더 쉽게 만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지원해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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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estima.tistory.com BlogIcon estima 2012.05.25 12: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환님은 참 생각이 깊군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bahnsville.tistory.com BlogIcon Bahniesta 2012.05.26 01:14 신고 Address Modify/Delete

      그냥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정리도 못하고 적는 것입니다. 요즘은 업무 외의 문화프로젝트 때문에 여러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또 중요한 단어나 개념들을 자주 듣게되고 그러면 또 그것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들과 엮어서 글을 적고 싶어집니다.

다양성의 실종

Gos&Op 2012.03.08 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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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다양성 Diversity이다. 건전한 생태계의 특징으로 다양성을 들 수가 있고, 창발적 창의력의 기저에도 다양성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다양성이 공격받고 있다. 제목과 같이 우리는 다양성이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봐도 그렇고 개인의 삶을 봐도 그렇다. 점점 우리의 삶이 단조로워지고 있다. 잠시 자신의 하루 일과를 떠올려봐라. 우리가 얼마나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아침에 일이나서 싣고 출근해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을 하고 그러고 나서 TV를 좀 보거나 독서를 한 후에 잠이 든다. 매일의 삶이 이렇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가? 가족, 회사동료, 그리고 몇몇 어릴 적 친구나 동기동창들. 그외에 더 만나는 사람도 없다. 우리의 온라인 생활은 어떤가? 적어도 10년 전에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에는 주요 인터넷 신문 홈페이지를 방문하던 것이 하루의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뉴스는 그냥 다음에 접속해서 보고, 그 외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글을 좀 올리는 정도가 전부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약 10개 정도의 사이트를 매일 접속했는데, 이제는 다음, 트위터, 페이스북정도만 매일 접속한다. 다른 사이트는 가끔 생각이 날 때나 이벤트가 있을 때만 접속한다. 하루의 일과, 만나는 사람, 온라인 접속패턴 등등의 우리/나의 일상을 살펴보면 진짜 단조로워졌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 또는 소셜미디어를 소위 소통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그곳에서 제대로된 소통을 했던가? 트위터에서는 헛소리를 하는 부류의 글은 읽지 않는다. 처음부터 팔로잉도 하지 않는다. 나와 정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 본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트위터보다 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좀 무거운 주제의 글을 올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짧은 글로 남길 뿐이지,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다양한 글들을 모두 보지는 않는다. 물론 페이스북은 친구가 300명 미만이라서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는 대강 훑어보기는 한다. 그래도 모든 글을 자세히 읽고, 링크의 글을 모두 확인해보고, 또 친구의 글이나 사진에 모두 라이크하거나 댓글을 달지 않는다. 소통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정작 나와 정치색이 비슷하거나 관심사가 같은 이들의 글만 보게 되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올려놓고 그저 라이크나 댓글을 기다리고 있다. 나만 그런가? (나의 온라인에서의 행동패턴에 대해서는 일전에 더 자세한 글을 올렸다. 참고: 온라인 활동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다.)

다양성을 뜻하는 단어인 Variety는 TV에서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뜻하기도 한다. 뉴스나 드라마처럼 주어진 장르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인 듯하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대화도 하고 게임도 하고.. 참 다양한 활동을 한 프로그램에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능프로그램을 버라이어티쇼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의 예능프로그램이 다양한가? 무한도전을 시발로한 리얼버라이어티가 한동안 방송을 장악하더니, 이제는 슈스케를 시발로한 온갖 공개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넘쳐난다. 다양함에서 시작했던 버라이어티도 다양함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것들은 어떨까?

단조로운 삶을 심플라이프 Simple Life라 부르기도 한다. 보통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전원에서의 삶을 묘사할 때 심플라이프라고 표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전원에서의 삶이 도시에서의 삶보다 더 복잡하다. 우리가 도시의 삶을 복잡하다고 말하지만,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도시는 영화 <모던 타임스>의 표현대로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단조롭다. 자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쉬다가 자는 삶이 전부다.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도 정해져있고, 자주 가는 곳도 정해져있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할 것같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크게는 춘하추동의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파종하고 물주고 비료주고 그러다가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는 긴밤을 방에서 쉴 것만같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오늘의 행동패턴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패턴은 분명 오늘과 다르다. 날씨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앞서 말한 삶의 패턴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다르다. 매일매일의 내외부 상태에 따라서 삶의 패턴이 다르다. 만나는 사람도 오늘 만났던 사람을 (가족이 아닌 이상에는) 내일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왜 시골에서의 삶을 심플라이프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귀농하는 이들은 심플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거다. 그냥 자연의 순리와 흐름에 따라 살겠다는 것은 심플라이프가 되겠지만, 자연의 흐름이 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어쨌던 인간이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삶이 더 단조로워졌다. 도시에서의 삶에서 다양성을 찾기가 어렵다. 다양성... 어디 갔어?

흔히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 그리고 적응. 이것을 진화라고 부른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이 이거 아닌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객체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객체는 멸종한다는 것이 진화론 아닌가? 그래서 '진화 = 적응'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같다. 그런데 이 적응이라는 것이 단조롭게 되는 과정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더욱더 능숙해지고 효육적이 되다는 의미다. 새로운 도시로 이주했을 때 처음에는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헤매고 다녔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 가장 빠른 길을 알고 누굴 만날지 정해진다. 그렇게 적응을 하고 나면 굳이 새로운 길로 가지 않는다.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기 전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다. 관념적으로 '진화 = 발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적응 = 진화 = 발전', 즉 '적응 = 발전'의 등식도 성립할 것같다. 그런데 적응이 발전일까? 적응은 발전이 멈춘 상태가 아닐까? 더 이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고, 한두가지 일에만 최적화된 사람에게서 새로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산업화와 도시화의 절정기에는 스스로 효율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그렇게 주어진 트랙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물론 가장 빨리 달리 사람은 1등을 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저 주어진 길을 가장 빠르게 또는 가장 짧게 가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면 안 되는 때가 온 것같다. 목표는 주어졌어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하나의 해답을 얻고 나서는 그 해답이 전부인양 그것만을 바라보며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로만 다녀서는 새로움을 얻을 수 없다. 때로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새로운 곳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진 목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에 해답으로 알았던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참 재미는 없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방법을 시도할 때 재미도 있고 같은 일이라도 또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배운 것, 얻은 것을 포기하는 것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삶이 더 단조로워진다.

다양성은 비효율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언어가 다양해서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 문화가 달라서 서로 오해하기도 한다. 종교가 달라서 때론 전쟁도 한다. (물론 나도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모두가 같은 종교를 가졌으면 하는 선교적 마인드가 있다.) 그러나 그런 다양성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 생태계에서 다양성이 없어진 이후에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자주 본다. 단지 한두 종류의 동/식물을 제거했을 뿐인데, 전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진 경우도 자주 본다. 그리고 동물들이 우성유전자를 가진 종으로 진화해서 한두종류의 동물종만 남게 되면, 그런 종들은 특정 질병 등의 면역체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대대로 동성동본 등의 근친과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단지 도덕윤리 때문이 아니라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자연의 순리에 따른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던 다양성이 무너지면 전체 생태계가 함께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 계속 말했듯이 우리의 삶과 문화에서 다양성이 실종되고 있다. 하나의 이념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방식이 최고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최고의 방법도 처음에는 다양한 방법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은 하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최고의 옵션을 찾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최고의 옵션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다양한 종류의 씨를 뿌려야 한다. 다양한 시도로 나무를 가꿔봐야 한다. 그래야지 최고의 품질을 제공하는 품종이 어떤 것인지? 최고로 잘 자라게 하는 육종방식이 뭔지를 찾을 수가 있다. (물론 이제까지의 역사경험으로 이런 종류는 다 알고 있겠지만... 수사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새로운 문제는 만났을 때, 단지 처음에 그 문제를 해결했던 그 방법을 일방적으로 최고의 방법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해보고 그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면 된다. 처음부터 다양성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한다. 창발적 창의의 근원은 다양성에 있다. Emergent creativity comes from diversity.

좀 간단하게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좀 길어졌다. 처음부터 글에서 하나의 결론을 보여줄 의도는 없었다. 그저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 결국에는 더 큰 문제에 봉착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 ... 네, 그냥 그렇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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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이다. 제주 생활의 아쉬운 점 하나를 들라면 겨울에 스키장에 쉽게 갈 수 없다는 거다. 제주의 겨울도 나름 낭만이 있지만, 봄 여름 가을에 비해서 야외활동이 극히 제한되어있다. 스키는 탈 수가 없지만 눈 (대설)이 자주 오는 제주의 특성 때문에 눈 온 다음날이면 인근의 오름에서 눈썰매를 자주 탄다. 아이가 있는 집이면 눈썰매 한두개는 이미 다 가지고 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집과 회사 사이의 왕복/반복이지만, 겨울에는 적당한 야외운동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무료할 수가 있다. 어제는 눈이 와서 점심식사 시간에 사람들끼리 회사 옆의 비스듬한 공터에서 눈썰매를 타기로 급히 결정했다. 그런데 경사도 생각보다 얕고 눈도 많이 쌓이지 않아서 눈썰매가 잘 나가지 않아서 몇 번만 더 시도해보고 그만 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때 (경영지원쪽) 직원 한분이 나와서 잔디가 상할 수 있으니 눈썰매는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뭐 그 직원의 입장에서는 잔디도 회사의 기물/시설이니 보호할 의무가 있고,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별로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다. 이 회사는 직원의 즐거움/행복보다는 잔디보호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문명인으로써 잔디 (넓게는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설령 잔디가 상하면 다시 심거나 하면 되는 일일텐데),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하루의 일탈에 대해서도 그렇게 재제를 했어야 했을까?

Canon | Canon EOS 20D | Aperture priority | Partial | 1/80sec | 0.00 EV | 24.0mm | ISO-200 | Off Compulsory | 2010:12:26 16:09:50
 회사의 슬로건이 '세상을 즐겁게 변화시키는 다음'이다. 지금은 '생활이 바뀐다 Life On Daum'이라는 조금 이상한 슬로건이 홈피에 적혀있지만, 여전히 '세상을 즐겁게 변화시키는 다음'이 회사의 모토로 생각한다. 더우기 어제 눈썰매를 탄 장소가 '세상을 즐겁게 변화시키는 다음'이라는 슬로건이 적혀있는 제주 GMC 사옥의 벽면 바로 밑이였다. '세상을 즐겁게 변화시킨다'라는 의미는 '즐거운 세상을 만든다'라는 의미와 '즐겁게 (즐거운 마음/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즐거운 세상은 즐거운 마음으로 만든 서비스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 즐겁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직원들에 의해서 기획되고 개발된 서비스가 과연 고객들에게 즐겁게 다가갈 수 있을까? 굳이 직원들이 일탈의 즐거움을 잔디보호라는 이유로 막았어야 했을까?

 입사한지 만 4년을 다 채워가는 지금,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다음이라는 회사는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적으로 만나서 얘기해보면 나만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작은 불만들이 한가득 담고 회사를 다니는 동료들을 자주 보게 된다. 회사는 왜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일까? 조직이 커지다보면 (보통은) 자연스레 생동감이 떨어진다. 중견기업, 대기업이 되어서도 초기 스타트업 때의 생동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조직이 급격하게 팽창하던 시점에 팀/직원들 간의 물리적 연결은 계속 유지했지만, 화학적 연결까지 유지하지 못했던 것같다. 물리적 연결로는 겉으로 보이는 (조직의) 형태는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화학적 결합이 없다면 언제든지 조직은 와해되어 버린다. 다음이라는 회사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기업들이 성장기에 흔히 겪는 부침이다. 조직이 관료화되어지고, 없던 매뉴얼이 새로 생겨나고, 팀간/직원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빈도와 질이 줄어들고, 주어진 목표 외에는 서로 신경을 쓰지도 않게 되고... 이런 것들이 다 조직 내의 화학적 결합이 끊어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최근 많은 기업들을 관찰해보면 그들이 직원들에게 사용하는 돈 (급여 및 각종 복지예산)을 (미래에/직원에 대한) 투자가 아닌 그냥 낭비 (회계상의 지출)로 여기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단순히 물가인상률도 반영 못하는 연봉상승 (또는 삭감)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조정이나 경영 환경상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가장 먼저 직원들의 복지예산 및 부대시설 이용예산부터 삭감한다. 어차피 부수적인 돈이기 때문에 그런 돈을 최대한 아끼는 것이 회계상에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맞는 말다. 회계/장부상에서는 분명 지출감소로 예산균형을 맞출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결정 하나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직원들이 사기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잘 계산해보면 삭감한 복지예산이 전체 지출이나 매출에 비해서 큰 편도 아니다. 삭감으로 인해서 얻는 (장부상의 금전적/겉으로 보이는)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직원들의 사기나 (업무) 분위기 등의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그리고, 완전히 일반화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큰 조직을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잘 해야 한다. 보통 스타트업 시절에는 모두 한 팀으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라도 쉽게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직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분화가 시도된다. 보통 조직 분화가 서비스/제품 단위로 쪼개지기보다는 기능 단위로 쪼개지게 된다. 비슷한 업무를 하는 사람들끼리 묶어놓으면 더 큰 시너지가 발생할 것같고,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들을 여러 조직에 쪼개어 놓으면 부서/팀별로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어 불필요한 리소스낭비가 발생할 것같다. 그래서 보통 팀을 만들 때 서비스보다는 기능 단위로 쪼개게 된다. 기능단위 조직의 장점이 분명 있지만, 그에 맞먹는 단점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말한 화학적 결합이 깨어지는 경우가 많다. 거대 기업에서는 어쩔 수 없이 기능위주의 조직분화가 이뤄지지만, 적당한 중견기업이라면 그냥 서비스/제품단위의 조직분화가 더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머리에 떠오르는 혁심기업들은 대부분 서비스/제품단위의 조직분화가 이뤄지는 것같다. 말했지만, 서비스/제품단위로 쪼개지면 불필요하게 같은 작업이 여러 번 이뤄지는 부작용은 분명히 있다. 또 기능단위 조직에서의 조직 간 알력싸움이 제품/서비스간 조직 사이에서도 비슷한 알력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전사의 리소스를 어떻게 잘 분배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그런데 어렵다. 바보라서 어려움보다는 전략상의 선택 때문에 그렇다.)

 적어도 그렇게 기능별로 조직이 분화되었다면 조직 간의 cross-functional 관계개선에 많이 투자를 해야 한다. 단순히 제품의 기획/개발을 위한 정식회의뿐만 아니라, 업무 이외의 동아리활동이나 팀간회식 등을 빌어서라도 조직간의 대화가 많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지 다른 조직에서 하는 업무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내가 하는 업무에 대한 설명을 다른 조직에 전달할 수가 있다. 그렇게 다양한 의견이나 생각들을 듣고 수렴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혁신이 발생한다. 어떤 회사에서는 큰 스튜디오에서 일부러 화장실을 건물의 한가운데 한 곳만 만들어뒀다는 일화도 있다. (픽사얘기다.) 각자 업무에 바쁘더라도 생리현상은 해결해야하고, 그렇게 화장실을 가다가 다른 팀/조직원들과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대화하다보면 서로의 문제를 듣기도 하고 또는 서로의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도 듣기도 한다. 그러면서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우도 있고, 역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결해줄 다른 팀/조직의 전문가를 초빙할 수가 있다. 전문화 다원화 복잡화된 지금은 Know-how보다 Know-where 또는 Know-who가 더 중요한 시대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이 회사에서는 동아리활동이나 팀간 회식 등에 소요되는 비용이 지출이 아닌 투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제대로된 물리적 결합은 화학적 결합이 보장되어야 이뤄진다.

 마지막으로 짧게 한마디를 더 하자면... 회사는 치사하게 돈과 시간으로 직원을 상대로 장난치면 안 된다. 골로 가는 첩경이다. (그리고 지극히 직원의 입장에서... 회사가 직원들에게 하지 말아야할 장난은 몇 가지 더 있다. 바로 여러분들이 분개하고 불만하는 바로 그 방식들...)
 
 하나더. 직원들로부터 최대한의 창의성을 끌어낼려면, '자유' '다양성' '재미'를 보장해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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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도 책을 읽으면서 적흥적으로 생각난 것을 적습니다. 몇 분이 끝까지 읽어주실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읽으셔도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현상만, 그리고 그런 현상에서 느꼈던 제 감정만 나열할 뿐입니다.

 '풍요'라는 말이 제 인식 속에 들어온 것은 앨빈 & 하이디 토플러 Alvin & Heidi Toffler의 <부의 미래 Revolutionary Wealth>를 읽으면서 였습니다. 책의 전반부에 현재 진행중인 세계의 트렌드로 3A, 즉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Asia의 부상, 식료품 등을 포함한 많은 제품들의 풍요 Abundance, 그리고 모든 산업 및 생활의 자동화 Automation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시아와 자동화에 대한 얘기는 자주 접했지만, 풍요에 대한 개념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저희가 배우는 모든 것들, 아니 인류가 이룩한 대부분의 것들이 풍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빈곤에 대한 것입니다. 즉, 빈곤을 바탕으로, 빈곤을 기본 가정으로 전제한 후에 이론이나 모델들이 정립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경제학'입니다. 경제학의 제1원칙은 '최소 비용에 최대 효과'가 바로 빈곤 문제 (제한된 리소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항상 식량의 부족, 노동력의 부족, 지식의 부족 등의 모든 면에서 부족, 부족,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한계 constraint에 가로막혀있었기 때문에, 이런 빈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에 따라서 경제학이 발전해왔습니다. 이는 스케일이 조금 다를뿐, 미시경제나 거시경제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또 빈곤을 전제로 발전된 것이 '최적화' (저는 산업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귀에 박히도록 들은 내용입니다.)입니다. 최적화라는 것도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대/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는 것이 최적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constraints가 없는 최적화 문제/해결은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이제껏 우리가 다루어왔던 대부분의 난제들은 바로 빈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달려있었던 것같습니다. 단순히 프로그래밍에서도 어떻게 하면 메모리를 조금 사용하면서 더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궁리했습니다. 메모리의 빈곤, 시간의 빈곤, 퍼포먼스의 빈곤,... 빈곤이 우리의 이웃/친구였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인류의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오랜 기본 가정을 깨어준 것이 <부의 미래>에서 지금은 그리고 미래는 '풍요의 시대'라고 말해줬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11월에 학교에 가서 (산공과) 후배들에게 'Exact Optimal is not Optimal'이라는 말도 해줄 예정입니다. 역석적인 위의 명제가 풍요의 시대에는 맞는 표현입니다.) 참고로, 구글에서 Scarcity (빈곤)을 검색하면 28,500,000 건의 검색결과가, Abundance (풍요)를 검색하면 28,100,00 건의 검색결과가 나오네요. 둘 사이에 검색건수가 많이 차이가 날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풍요' 문제를 접했는데, 그 이후에도 여러 책이나 기사들을 통해서 우리가 진짜 해결해야할 문제는 더이상 빈곤이 아니라, 풍요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디지털 시대/경제에서는 더이상 빈곤이 존재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Bit로 표현되는 정보는 거의 무제한으로 생산되고, 복재가 되고, 배포/유통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하드디스크나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10년 20년 전에 가졌던 그런 스토리지의 빈곤이 지금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글과 관련된 책들 (최근에 <구글노믹스>를 읽는 중)을 보면, 디지털 시대에는 정말로 빈곤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글이 성공한 것은 좋은 알고리즘 (페이지랭크)을 바탕으로한 최적화된 검색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빈곤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풍요의 세상을 봤기 때문에 성공한 것같습니다. 비슷하게, 아마존이나 이베이 등의 성공한 많은 인터넷 기업들이 '풍요'를 보았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고전이 되어버린 Wired의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 Chris Anderson의 <롱테일 경제학 The LongTail>도 바로 이 풍요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음, 여전히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이 '빈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니, 오해/곡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풍요' 현상에 대해서 최근에 읽은 몇 개의 기사가 생각납니다. The Economist에서 실린 <Data, data everywhere (현재 유료구독)>입니다. 해당 기사에서는 데이터의 풍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데이터를 분석하는데는 기존과 같이 최적화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별로 맞지가 않다라는 견해를 밝힙니다. 실제, 그런 대용량 데이터를 분석할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현상'만을 보고 현상만을 설명하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고, 그래서 회사의 많은 문제들을 복잡한 수식으로 풀기보다는 단순히 사칙연산 수준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정보만 뽑아내는데 비중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초)대용량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분석방법/기술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그런 데이터 (현상)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오늘날의 데이터마이너들에게 더 필요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다른 기사는 2008년도에 <Wired>에 실린 <The End of Theory: The data deluge makes the scientific method obsolete.>입니다. 아, 이실직고를 하자면 앞서 말한 '데이터를 (과학적/수리적 방법으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라'는 얘기는 이 Wired 기사에서 다루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더 덧붙이자면 2010년 2월의 <Wired>에 실린 <How Google's Algorithm Rules the Web>도 궁극적으로 풍요의 웹에서 구글이 살아남은/성공한 비결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구글의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이 더 적합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초)대용량 데이터를 구글이 다루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담이지만, Collective Intelligence가 지고 Social Intelligence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구글이 Collective Filtering을 이용했다면, 페이스북은 Social Filtering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Social은 Collective보다 규모가 엄청 작은 것을 다루는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Sociality를 뽑아내는 과정이 구글이 다루는 데이터의 규모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계산과정에서는 더 복잡합니다. 몇 가지 가정들이 더 들어갔기 때문에.)

 저는 그냥 이 글에서 '풍요'를 소개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풍요를 바탕으로 어떤 결과물을 도출할 것인가?는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저도 이 풍요의 문제를 다각도로 보고 저의 한계 내에서 풍요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중에 있습니다. 빈곤의 문제는 많은 것들을 해결해야지 성공할 수 있었지만, 풍요의 문제는 하나만 잘 해결해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서 말했던 구글, 아마존, 이베이,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등 입니다. 그리고, '풍요'의 문제에서 여전히 '빈곤'한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의 빈곤'입니다. 풍요의 시대에 가장 부족한/빈곤한 자원이 '상상력/창의성'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짜증나는 상황입니다. 제발 모두 '상상력/창의성의 풍요'를 이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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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밤에 사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 구글 버즈에 간략하게 적었던 내용입니다. 글을 적고 나서 모두에게 공유해도 좋을 것같아서 기본 내용을 중심으로 표현을 조금 바꾸고, 내용을 추가해서 블로깅을 합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당장 적을 3개의 블로깅 주제가 있는데, 전혀 엉뚱한 것부터 글을 적게 되네요.)

 어떤 인터넷 회사의 신입 CEO가 부임하고, 가장 먼저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의 내용 중에, 그 회사가 적어도 단기적으로 중점을 둘 부분으로 'Cost-Effective'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지극히 재무적이고 경영학적인 마인드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이 cost-effective인가?라는 질문에 저는 '맞을 수도 있지만, 더 근복적인 것이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제가 아래에 제시할 내용이 비단 그 회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업을 경영하는 수많은 경영인들과 또 그들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직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공유할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블로깅을 합니다.

   오늘날 기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간략하게 나열하겠습니다.
  1. Cost-Effective한 노력보다, Time-Effective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의 경영은 규모보다 속도가 앞서야 합니다. 특히, 중소기업이나 신생 Start-up의 경우에 규모의 경제에 들어가려 노력하기 보다는 속도의 경제에 들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중소/신생기업의 경우, 보통 덩치가 큰 경쟁자/라이벌들이 존재합니다. 큰 덩치의 경쟁자와 적절히 경쟁하기 위해서 같이 규모/몸집을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경쟁자의 전략 (또는 그들이 정의한 시장)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과 적절히 경쟁하기 위해서는 몸집이 아닌 민첩성을 키워야 합니다. Cost-Effective 방법으로 기업이 필요한 칼로리를 줄이고, 그런 저칼로리 상태에서 생명을 연명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해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경쟁자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Time-Effective입니다.
  2. Cost-Effective한 노력보다, Cost-Creative한 노력이 필요하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무조건 허리를 졸라맨다고 해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보다는 투입한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10의 비용에서 20의 효과를 내고 있다면, 여기서 비용을 최대한 1로 줄여서 여전히 20의 효과를 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비용 10을 유지하면서 30, 아니 50, 100의 효과를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비용을 줄이는 것은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보다 한계가 없는 수익극대화의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제란 '최소비용에 최대효과'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런 헤게모니는 빈곤의 시대에 통하던 철학입니다. 빈곤의 시대에는 최대한 아껴서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요의 시대에는 충분히 투입하고 (때론 자원을 남용하고) 그 이상의 효과를 얻어내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1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10을 얻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Cost-Creative입니다.
  3. 그래서, Cost-Effective한 노력보다, Time-Creative한 노력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얼마를 줄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얼마를 빨리 만들어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경영 환경이 변했다고 투입량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뀐 환경 또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얼마나 창의적으로 빨리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입력값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입력값이 출력값으로 변환되는 그 과정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Time-Creative입니다.

 실제, 얼마나 효과적으로 쓸 것인가?가 경영의 패러다임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얼마나 창의적으로 쓸 것인가, 나아가 얼마나 창의적으로 창조할 것인가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배운대로, 경험한대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만날 모든 상황들은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니 상상조차도 못했던 상황들이 닥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거의 Effective 모형은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 시점에 Creative가 필요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성경구절은 공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단지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했습니다. Effective에 굳어버린 자는 Creative 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Cost가 중요/부족한 자원이 아닙니다. 크리스 앤더스가 <FREE>에서도 밝혔듯이 오늘날은 풍요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풍요의 시대에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지금 가장 부족한, 그래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시간은 단순히 효과적으로 사용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간은 창의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보이는 물질 (자원)이 아닌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효과성보다는 창의성이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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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uly 2010.03.16 11:0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저에겐 이 블로그에서 보는 글들이 왜 그렇게 쏙쏙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ㅎㅎ

    Time-Creative, 개인적인 삶에도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