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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압축된 세상

일전에 올렸던 숨은제주라는 이름으로 ‘제주+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겨우 킥오프 미팅만 한번 가졌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할지도 정하지 않았고 첫 출사도 다녀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곳으로 사진 여행을 다닐지도 준비할 겸 여느 때처럼 오늘도 혼자서 길을 나섰습니다. 평소에 즐기던 곳이나 새로운 곳을 한 곳씩 방문하면서 갑자기 우리의 삶은 여러 측면에서 압축되어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압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저는 컴퓨터에서 파일을 압축하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요즘 세대들은 몇 (십) 기가나 되는 USB 메모리나 클라우드 서비스를 바로 사용하기 때문에 파일 압축에 대한 니즈가 별로 없겠지만, 제 또래만 하더라도 몇 메가짜리 파일을 압축해서 플로피 디스크에 담고, 한장에 모두 담을 수 없으면 분할 압축했던 기억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ARJ나 RAR 파일을 압축해제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서 설치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요즘은 단순히 여러 개의 파일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압축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용량을 줄이기 위해서 압축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제주+사진’ 프로젝트는 제주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를 발굴해서 소개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둡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제주로 여행을 오지만, 2박3일 또는 3박4일 동안 짧은 시간동안 유명한 관광지나 리조트만 쭉 둘러보고 제주를 떠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요즘은 인터넷/블로그이 발달로 다양한 광광지나 맛집 등이 소개되어 다양성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요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기념품을 구입합니다. 그래서 그런 관광객들을 위해서 유명한 관광지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곳들을 소개시켜주고 알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한 목적입니다.

제주에 여행을 와서 차를 타고 주요 관광지만을 돌아다니고 나서 제주 여행을 다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간적으로 압축된 여행을 하고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의 전체, 일상, 다양성 등이 아니라, 그저 잘 알려진 몇몇 곳들만 점프하면서 찍고 찍고 찍고하는 형태를 보입니다. 이제 제주 정도는 쉽게 여행다니는 시대가 되어서, 제주를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도 특별히 다른 곳들을 둘러보는 것같지는 않습니다. 겨우 지난 번에 미처 가지 못했던 다른 유명한 곳을 방문하면 여행 목적을 달성한 듯합니다. 올레가 개발되면서 그나마 느리게 걷기 열풍이 생겼지만, 여전히 빠르게 주요 포인트만 공략합니다. 이것은 공간적으로 압축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상에서도 집과 회사를 왕복하고, 간혹 여가가 생겨도 평소에 즐기던 장소/카페/식당만 주로 이용합니다. 느리게 일상을 즐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간적으로 압축되어있습니다.

시간 측면에서도 압축되어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효율성이나 계획성을 따지면서 모든 것을 정해진 시간에 처리하고, 정해진 루틴대로 생활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밥먹고 출근하고 8~9시간 회사에서 보내고 다시 퇴근하고 자고… 매일의 일상입니다. 단 하루도 조금의 변형이 없이 틀에 박혀있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한 집중해서 일을 끝내고, 또 일을 하고… 어쩌다 여유 시간이 발생하더라도 새로운 놀이거리를 찾지 못하고 할 일이 없나 안절부절합니다. 여행이나 휴가를 와서도 짧은 시간 내에 처음에 목표했던 모든 곳들을 다 둘러보고 다 먹어봐야지 직성이 풀리고, 그래야지만이 성공적인 여행이었다고 자평합니다. 시간의 느림이 없이 항상 바쁘게 생활하는 것은 시간적인 압축의 삶입니다.

공간과 시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즉 사람 사이에서도 압축 현상이 있습니다. 요즘은 SNS나 인터넷 포털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대화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화의 많은 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입니다. 서로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닌 경우에는, 대부분 유명인들의 이야기만을 듣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현대인의 삶은 너무 바쁩니다. 그리고 정보과다에 따른 필터링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영향도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또 그런 사람들만 찾아 나섭니다. 오프라인 미팅에서도 다야한 사람들을 만나기 보다는 게 중에서 가장 유명하거나 알아두면 좋을 것같은 사람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집중인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효율성을 위해서 다양성을 포기합니다.

공간적으로도 압축되어있고 시간적으로도 압축되어있고 인간적으로도 압축되어있습니다. 많은 문제나 상황에서는 그런 압축이 최대의 효율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다양성이 부재하고 여유가 없고 전체를 (대강이라도) 살피지 못하면 결국 불확실한,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탈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길게 보면 다양성이 이깁니다. 아무리 압축 기술이 좋아지더라도 원본보다는 좋을 수 없습니다. MP3나 이미지 포맷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여유와 느림, 그리고 다양성으로 조금이라도 덜 압축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될 것입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좋다의 정의는 생략합니다.) 당연히 좋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좋은 발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가고 주변을 느리게 관찰하면서 걷지 않으면 새로운 곳, 새로운 것을 사진에 담을 수 없습니다. 알려진 곳에서 좋은 눈으로 예쁜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덜 알려진 곳에서 새로운 사진을 찍는 것도 필요합니다. 압축이 해제된 삶이란 그렇게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떠나고 천천히 주변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효율성이라는 좋은 눈도 좋지만, 다양성이라는 근면한 발이 미래에는 더 필요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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