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s&Op

저주를 받은 자.

MIT 미디어랩의 John Maeda 교수는 나에게 저주를 내렸다. 정확히, 그냥 그의 생각을 블로그에 올리고 트윗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트위은 나의 현재 저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나는 저주를 받은 사람이다. 억울해서 나도 당신들에게 같은 저주를 내린다.

평소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 적어도 다른 사람들 만큼은 -- 생각을 많이 하고 서비스나 기능 제안 등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다고 자평해왔다. 그냥 혼자 생각한 것에 머물지 않고, 사내 게시판/야머나 개인블로그 등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런 나 자신이 뿌듯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딱 여기까지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냥 말만 앞세우고 그냥 튈려고 하는 그런 부류로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은 많이 하고 말은 많이 했지만 정작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아이디어에 자만하면서 결국 실행에 옮긴 것은 하나도 없다. 스스로 많이 생각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많다고 자만하는 사이에 나는 실행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기술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지만, 쉽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하찮은 일이라는 이유 등으로 미뤄왔다. 마에다 교수가 올린 '아이디어의 선물은 실행하지 않음의 저주다'라는 말이 나에게 그대로 해당이 된다. 나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실행이 없는 저주에 걸린 사람이다.

세상에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나와 같이 저주에 걸린 이들… 스스로 변화시킬 능력은 퇴화되고, 그저 남을 움직여서 뭔가를 이룩하려는 그런 사람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지위가 오르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 짙어지기도 한다. 신입을 시키면 되지 굳이 내가 해야 해? 팀원한테 시키면 돼지 뭐. 내가 겨우 이거나 할려고 교수나 된 줄 알아? 그냥 학생한테 시켜서 내일까지 해오라고 할테다. 혹은 집에서도 '엄마/여보, 물 줘.' 생각은 내가 하고 행동은 네가 한다는 그런 저주에 걸려서 사지가 굳어지고 결국 사회에서도 도태되어 버리고 있다.

지난 2월 1일 금요일, 제주 다음스페이스.1에서는 제13회 DevDay 행사가 있었다. 외부의 10개팀이 모여서 밤을 새면서 다음에서 제공하거나 공개된 API나 오픈소스 등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서비스를 구현해보고 서로 발표하는 행사다. 짧은 시간, 날 밤을 새면서 나온 결과물이 퍽 좋을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를 통해서 평소에 해보고 싶었지만 업무에 밀려서 또는 나는 이런 거 못해 등으로 미뤄왔던 것들에 도전해보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행사였고 도전이었다. 사내에서도 3팀이 참석했는데, 어쩌다보니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냥 같이 밤을 새면서 개발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들의 아이디어가 완벽하지도, 유니크하지도 않았지만 -- 그래서 조금 재도 뿌렸지만 -- 그들의 도전과 실행이 자랑스러웠고, 또 부러웠다. 하루밤의 결과물이 별로 일 거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겼다. 도전에는 실패가 없다. 유일한 실패는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저자 생택쥐페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배를 만들고 싶다면 나무를 베어올 사람을 모으지 말고, 사람들에게 끝없이 넓은 바다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어라." 경영학이나 자기계발서 등에서 사람들의 동기유발에 대한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소위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꿈을 꾸는 자는 매일 꿈만 꾸고, 바다를 본 사람은 바다만 바라본다. 이것이 현실이다. 정글의 법칙에서 병만족이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뗏목을 만드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들의 머리 속에도 엄청난 크기의 범선이나 쾌속정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 범선이나 쾌속정을 만들어서 섬을 탈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들은 배를 만들 엄두도 못 냈을 것이고 실제 만든다고 해도 다 만들기 전에 아사했을 것이다. 현실 여건 속에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뗏목을 떠올리고 그것을 만들어서 탈출을 감행했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한 육지에 다다랐다. 우리는 꿈만 꾸다가 허송세월을 보내버리고 만다. 그런 저주에 걸렸다.

아이디어의 선물 혹은 저주. 아이디어가 참으로 선물이 되고 저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행에 옮기는 길밖에 없다. 일단 해보고 싶다가 아니라 해봐야겠다로 마음을 정하고, 그냥 작은 것부터 해보는 거다. '그래, 가는 거야.'

개인적으로 지금 빅데이터 기술들을 공부하고 R 문법책을 읽는 것이 내 커리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해보는 거다. 내게 내려진 저주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분석 플랫폼에 대한 생각만 있지, 전혀 실행계획이 없다. 그러나 그래도 관련된 뭐든 시도해보고 뭐든 공부해보기로 했다. 완성시키지 못하더라도 시도해보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뭐든지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진짜 뭔가 물건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글을 적고 있는 사이에 아래의 Paperman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디즈니에서 온라인에 공개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내의 페이퍼맨이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리는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저주를 끊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전에는 실패란 없다.


(2013.02.03 작성 / 2013.02.08 공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