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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Op

길 옆의 길 Invisible

 이번 겨울 들어서 세번째로 윗세오름을 다녀왔습니다. 이전과 같이 영실코스로 올라서 어리목코스로 내려왔습니다. 이번은 겨울산행에 대한 포스팅이 아닙니다. 그 길 위에 새겨둔 저의 다짐에 관한 글입니다. 다짐이란 언제든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기록해두면 언젠가는 다시 리마인드되고 또 새로운 다짐으로 저를 채찍질할 거라 믿기에 부끄럽지만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눈덮인 겨울 산행은 경치가 아름답지만 힘들고 위험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장비를 갖추고 이미 많은 이들이 다녀간 등산로를 걸으면 별로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산행도 그랬습니다. 1m가 넘는 눈이 내린 한라산이지만 수많은 이들의 흔적들이 모여서 멋진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등산로 옆에 쌓인 눈을 밟으면 발은 무릎보다도 더 깊게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심스럽게 이미 다져진 등산로를 따라서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눈 앞에는 눈밭이 더넓게 펼쳐져있는데, 나는 왜 이 좁은 등산로로만 걷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다져진 길 옆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같은 길을 걷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이게 저의 다짐입니다.

 그때 저는 다짐했습니다. 올해는 그리고 앞으로는 잘 만들어져서 안전한 등산로가 아닌 그 옆의 험난한 눈길을 걸어보겠노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걷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막연히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은 나만의 길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산로를 멀리 벗어난 길을 만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등산로 바로 옆으로 아무도 걷지 않은 나만의 길을 걸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무릎보다 더 깊이 빠지는 눈밭을 걷는 것은 참 힘듭니다. 눈덮인 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깊이까지 발이 빠질지 등의 모든 것이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여러 위험들이 숨어있기도 하고, 에너지도 많이 소모되고, 눈이 몸 속으로 들어오면 발이 얼 것같기도 하고, 또 어느만큼을 더 가야할지도 모릅니다. 안전하고 쉬운 길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힘들고 위험한 길을 걷노라고 옆에서는 조롱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게 저의 새로운 다짐이 되었습니다.


 지난 저의 35년, 특히 2011년을 되돌아보면 저는 너무 쉽고 안전한 길만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더라도 저의 발자취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밟았던 그 길에서 저의 발자국이 남아있을 리가 없습니다. 간혹 조금 남아있더라도 그것이 저의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누구의 것인지 도저히 분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개척한 새로운 길에서는 제가 디디는 모든 곳에 저의 발자국이 남아있습니다. 누군가 제 뒤를 따라오면 저의 발자국도 희석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뒤돌아보면 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위험하고 불확실한 그 길을 걸은 사람만이 그런 자신만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 여기 다녀감'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저 남들의 인생경로를 그대로 따라가고 싶지만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하산길에 길 옆의 (길 아닌)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역시나 힘들었습니다. 무릎보다 깊이 빠져드는 그 눈밭에서 몇 발자국을 걷자마자 힘이 들고, 바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정도였습니다. 50m정도만 눈밭을 걸었는데도 6km의 등산길보다 더 힘들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었습니다. 네, 재미있었습니다. 힘들고, 외롭고, 위험한 길/도전이었다 하더라도 그 길/도전이 재미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자랑질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걸었던 그 등산로에 수 백, 수 천의 다른 등산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다져진 길만을 걸으면서 설국의 경치에만 감탄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경험했던 그 희열은 그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 희열 밑에 있는 저의 다짐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희열을 얻었고, 용기도 얻었고, 다짐도 얻었습니다.
 
 아직은 훈련이 덜 되어있어서 먼길을 길이 아닌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등산로를 너무 벗어난 미지의 곳까지는 걸을 자신도, 힘과 에너지도,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도전에 익숙해지려고 합니다. 눈길은 힘들지만, 장비만 제대로 갖춘다면 덜 위험합니다. 오늘 제가 스패츠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눈밭을 걸어갈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스패츠와 같은 그런 준비물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함께 눈길을 걸어주지는 않았지만 함께 등산했던 동료 때문에 제가 도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저 혼자서 등산을 했다면 그 길을 걸어갈 용기를 못 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조금만 방향을 돌리면 다시 안전한 등산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그것도 저의 도전을 가능케했습니다. 2012년은 조금씩 일탈을 꿈꾸고,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훈련을 받으면 더 먼 길도 개척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겠죠.

 오늘은 짧은 눈밭에서의 일탈이었지만 그것이 제게 시사하는 바는 너무 큽니다. 저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저는 열정을 식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남과 같은 제가 아니길 바랍니다. 길 옆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겁니다. 아무도 걷지 않았다고 그곳에 길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곳에 길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 드라마 '다모'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관군의 수장이 묻습니다. '너는 왜 길이 아닌 길을 걷느냐?' 그러나 쫓기던 주인공 (김민준)이 말합니다. '길이 아닌 길이라...길이라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한사람이 다니고, 두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법...이 썩은 세상에 나또한 새로운 길을 내고자 달려왔을 뿐이오...' (아, 이 대사는 '다양성'과 '독창성' 그래서 '보편성'에 대한 정수를 보여줍니다.)

 길이 아닌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 저의 다짐입니다. 실생활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1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오늘을 회상하며 또 이렇게 글을 적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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