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s&Op

의식화된 나태함

다음 웹툰에 윤태호 작가님의 미생 두번째 시즌이 연재되기 시작한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습니다. 시즌2는 착수부터 꾸준히 찾아보고 있는데,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시즌1보다 쫄깃함이 덜 하고 뭔가 힘이 빠진 것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즌1에서는 장그래라는 진짜 미생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린 직장 생활의 애환에 공감했는데, 시즌2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주인공이 아닌 (물론 미생에서 딱 한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긴 어렵다. 직장 생활이 그렇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잡담만 늘어놓는 것같기도 하고,... 적당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시즌2지만 오히려 시즌1의 프리퀄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8수의 다음 장면을 보고 내가 알던 미생이 돌아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OECD 회원국 중에서 멕시코와 그리스와 함께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은 ... 그렇습니다. 일이 쌓여서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해야 하면 -- 일이 없어도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화됐지만 -- 지치고 스트레스가 쌓이지만, 진짜 불안은 업무 중에 생기는 한두시간의 공백 그리고 그런 공백이 늘어가면서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잠시 쉬거나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눌 수 있어서 좋지만, 그런 시간이 길어지고 잦아질수록 한 회사에 속한 직장인으로서 존재감을 상실해 갑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은 뭘 해야하지?'를 고민하고 퇴근하면서 '내일은 또 뭘 하지?'를 고민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내가 맡은 업무나 서비스에 대한 고민보다 나를 정신없게 만들 거리를 찾는 것에 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사내 게시판에 '코딩을 하고 있지 않으면 시간이 참 안 가요. 마치 예비군 훈련가서 멍 때리고 있는 기분.'이라고 넋두리를 적기도 했고, 최근 사람들을 만나서 요즘 뭐 하냐는 질문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냥 놀고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회사나 부서라는 큰 조직의 비젼과 미션에서 잠시 벗어나 있으면 내가 이러다가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시류에서 밀려나버리는 건 아닐까라고 또 걱정을 보탭니다.

그런데 한달에 하루나 이틀, 또는 길게 잡으면 일년에 1~2주에서 한달정도는 그런 방황의 시간을 갖는 것이 여러 모로 좋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에 익숙해지고 그 시간을 잘 보내는 (버텨내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바쁘게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을 살아가면 자신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또는 자기가 어떤 곳을 지나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를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긴 터널을 지날 때 문득 속도계를 보면 평소보다 1~20km/h는 더 빨리 달리고 있는 걸 자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 터널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1~2년은 참 바쁘게 흐릅니다. 새로운 업무도 파악해야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내가 이 회사에서 정확히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에서 던져주는 일들만 처리해도 시간 참 잘 갑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현재 업무에도 익숙해지고 주변 사람들도 파악하고 나면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2년을 더 보내면 일종의 (직장)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주변을 살펴봐도 전혀 새로운 것은 없고 주변 동료들은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나는 그냥 아무 것도 안하면서 시간만 죽치고 있는 것같고... (그래서 요즘은 3~4년마다 안식 휴가를 주는 것이 제도화된 곳들이 많음) 그 시간이 길어지면 참 죽을 맛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퇴사나 이직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런 방황이 처음에는 3~4년 후에 찾아오지만 시간이 흐르면 1년마다 또는 6개월마다 찾아옵니다. (만성화되서 다른 도전을 찾는 이들도 있고...) 그런데 중2병이나 사춘기를 보내듯이 그냥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면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달리는 차를 잠시 세워서 찬 공기도 쐬고 창밖도 좀 구경하며 주위를 살피고 앞길을 준비/대비해야 합니다. 귀찮아서 미뤄놨던 잡다한 것도 좀 처리하고, 업계의 동향도 좀 파악하고,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도 좀 공부하고... 개발자라면 미뤄놨던 스파게티 코드를 리팩토링하거나 주석 및 다큐먼테이션도 좀 하고, 지금 당장이 아닌 몇 개월 또는 1~2년 후에 사용할 기술 프레임워크도 좀 간을 보고... 10년을 정신없이 일만해왔던 사람보다는 1년에 한번씩 방황했던 사람의 10년 뒤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요?(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리고 일이 없을 때 느끼는 불안감은 결국 일이 없을 때가 없었기 때문에, 즉 학습과 경험의 미비에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바쁜 중에 잠시라도 짬을 내서 아이들idle함을 즐기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이들함이 만성화되는 것은 우려되는 일이지만 아이들함에 적당히 내성이 생기는 것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모토가 이슈가 됐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는 경우가 많기도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저녁이 있어도 누리지 못하는 삶'이었던 것같습니다. 나태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나태함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걸 즐길 수가 없습니다. 의도된 또는 의식화된 나태함은 좋은 겁니다. 물론, 그걸 잘 컨트롤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임.

나태함 (표현이 좀 나빠보이니, 한가함)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성장과 도태의 갈림에 놓입니다.

그런 나태함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불확실과 그에 따른 불안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 어떻게가 발생하기 전에 할 수 있는 한의 최대치의 안정망을 스스로 확보해놓겠다는 욕심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특히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명이 무너지면 여럿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점도 또 다른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치열한 경쟁에 따른 실패/도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패 후에 재기를 돕는 사회 안정망의 미비... 현대인의 많은 어려움은 개인이 할 수 없는 것과 사회가 해주지 못하는 것이 겹쳐져서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합니다.

위의 미생2 짤을 보고 반가움에 글 하나 적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적기 시작했는데, 너무 먼 곳까지 와버린 듯합니다. 너무 바쁜 것도 싫고 너무 한적한 것도 싫고 그래서 피곤하지도 않고 불안하거나 괴롭지도 않은 그런 직장 생활이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하겠죠? 언젠가는...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