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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구의 개인주의가 창의력의 원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사실인지 아니면 그냥 신화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Pixar 스튜디오에는 화장실이 건물 중앙에 한 곳에만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생리현상은 해결해야 하고, 그럴려면 중앙에 있는 화장실로 모여야 합니다. 그렇게 모이고 부딪히면서 서로 얘기를 하다보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갈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토로하는 경우도 있을테고, 때로는 최근에 자신이 했던 프로젝트나 잘 된 일을 뽐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과 대화하기도 하고, 또는 그런 이를 연결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연에 의한 창발을 기대하며 화장실은 하나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빌딩 숲 사이로 점심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수다를 떨면서 식당으로 향합니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픽사의 그것처럼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샘솟아날 것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음성지원이 될 것같다.) 이렇게 무리를 지은 사람들을 찬찬히 확인해보면 이미 평소에 친하게 지내거나 같이 일하고 있는, 그리고 많은 경우 같은 부서, 팀원들끼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구내 식당을 이용할 때도 보통 팀원들끼리 같이 내려와서 같이 식사를 합니다. 같이 내려와서 따로 앉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이유로 한두명이 따로 앉게 되면 괜히 미안해하는 듯합니다. 간혹 혼자 내려오면 가장 먼저 누구랑 같이 먹을지 친한 동료를 찾기에 바쁩니다. 식사나 다과 자리에서 업무 얘기보다는 우스개 소리만 하면서 식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초조히 기다립니다.

이 두 사례에서 어쩌면 서양의 개인주의 풍토가 오히려 그들에게 창의력의 원동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평소에는 각자 흐트져서 생활하다가도 또 모여서 일해야할 때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미국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 소수 그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 한국인 게스트연구자들끼리는 매번 식당에서 모여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늘 비슷한 일상을 얘기합니다. 물론 그런 관계가 나중에 중차대한 일에서 다른 창발성과 다양한 연결에 기여하겠지만, 얼핏 봐서는 이질성이 모여서 새로운 동질성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양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TV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냥 평소에는 각자 생활하다가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긴 대화가 이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영화적 설정일 수도 있지만…)

끼리끼리만 모이다보니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레 배타적이 될 수 밖에 없고, 또 그 그룹 내에서 생각과 시각의 동질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룹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은 가능하지만, 외부의 생각이나 현상을 접할 기회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곳에서는 평소에는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각자가 다양한 경험과 견해를 가지고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새로운 팀을 바로 구성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끼리 문화에서 누군가를 새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또 한명이 다른 그룹에 내보내게 되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개인으로 활동했으면 필요에 따라서 뭉치고 흩어지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다양한 연결에 의한 우연한 아이디어의 창발이 곧 창의성입니다. 빛과 그림자는 늘 상존합니다. 공동체 문화가 공동체 내에서는 좋지만, 또 제주의 괴당과 비슷하게 공동체 외부와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면역학/유전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비슷해지면 예측치 못한 돌연변이의 발생이 잦아지고, 특정 유전병으로 인해서 그 유전자 그룹 모두가 괴멸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 생물책에서 읽은 유전적으로 비슷해진 치타 무리에 대한 우려의 글이 여전히 머리에 생생합니다. 동질감 때문에 평소에는 공동체를 이루지만, 그 동질감을 파괴하는 새로운 병이 발생하면 모두가 파멸의 길에 이릅니다. 한 때 화려했던 문명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의 이유 중에 유전적 동질성이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유럽인들에 의해서 정복되었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원주민이 멸종된 것도 면역/유전병에 이유를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깨끗하면 병에 더 잘 걸린다는 말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창조경제라는 정체불명의 말을 만들어낼만큼 '창조성' '창의성'은 중요합니다. 순수한 한 사람의 노력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창조성도 있지만, 요즘에는 다양한 연결을 통한 창발적 창의성이 큰 힘을 발휩합니다. 다양한 생각, 다양한 견해, 다양한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서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끼리는 처음에는 뭉치기는 쉽겠지만, 새로운 진보를 예상하기는 힘듭니다. 적어도 IT분야에서 미국 또는 실리콘밸리가 왜 앞서갈까?를 생각해보면서 어쩌면 개인주의가 오히려 창조성을 자극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여담은 하면 나중에 꼬투리 잡히는데…) 지금 창조경제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모든 국민들을 하나의 틀에 맞도록 컨트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절대 창조성이 발현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그냥 '종북' 딱지를 붙이는 세상에서 다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며, 그 상상된 것을 겉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다름이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말살시키는 것은… 그리고 이중잣대로 사회를 판단하는 것도 창조성에는 별로 좋지 않은 듯합니다. 자유를 외치면서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자유만을 감싸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규제를 철폐하겠다고는 하지만, 1%의 이득에 관련된 것만 해당되고 나머지 대다수가 불편해하는 것은 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민영화된 포스코의 회장으로 정권의 사람이 내정되(었다)는 소문/현상을 후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민영화가 결국 이득의 사유화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민영화 및 경쟁체계가 좋다면, 대통령 등의 권한도 민영화하고 두명 이상을 뽑아서 경쟁시키면 우리 나라가 더 좋아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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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업무시간에 딴짓을 많이 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새글도 확인하고,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떨어지는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 블로그에 올릴 글도 적고 (보통은 저녁시간에 적지만 급하게 떠오른 생각이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충만할 때는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글을 적을 때도 백그라운드에서 분석프로그램이 실행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가끔 불필요하게 돌리는 경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퍼즐게임도 즐겨한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은 내게 업무시간에 딴짓 좀 그만하라는 소리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정해진 업무 시간에 딴짓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나를 변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가 딴짓하는 것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보통 직장인들은 하루 8시간의 업무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서 맡은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나는 업무시간이 8시간보다는 긴 10~12시간정도다. 외부에서 강제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그렇게 생활해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일을 느슨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하루 2시간 정도의 딴짓을 하면서도 맡은 일은 충실히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오전 10시 출근이지만 가급적 9시에 출근하려는 것도, 오후 7시 정시퇴근이 아닌 8시나 9시가 되어서 퇴근하는 것도 그만큼의 딴짓을 하면서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퇴근 후에도 침대에 누워서 업무와 관련된 많은 생각을 하고, 책도 본다. 급한 일이 있으면 더 늦게 야근하거나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기도 한다. 8시간을 사는 사람과 10시간을 사는 사람의 생활패턴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야근이나 주말 등의 초과 근무에 대해서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서 업무 시간에 잠깐의 딴짓을 무조건 불허하는 것도 형평성에 맞지 않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하기 위해서 쉬엄쉬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베스트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일하는 것뿐이다.)

단순히 남들이 활동하는 시간에 내가 딴짓을 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딴짓을 했으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업무에 투자하고 있다. 나에게 딴짓하지 말라는 그들의 생활을 관찰해보면 하루에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카페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다. 대부분의 대화가 업무 외적인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은 직장 내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이고, 내가 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퍼즐을 하거나 글을 적고 있는 것은 딴짓이 된다.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면서 하루 1~2시간을 커피나 수다에 보내는 사람들이 내가 자리에서 잠시 딴짓하는 것을 나무라면 어쩌자는 건지... 물론 업무 분위기가 나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즐겁게 딴짓하는 그네들의 승리다.

업무의 특성상, 데이터분석을 돌려놓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려야할 때가 많다. 그 시간을 멍시간으로 만들 이유는 없다. 그러니 인터넷 서핑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퍼즐도 하고 또 글을 적기도 한다. 특히 주변에서는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은 별로 딴짓이란 인상을 갖지 않는 것같다. 그런데 그 시간에 글을 적는 것은 딴짓이 된다. 보통 인터넷 서핑을 하면 트렌드와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그렇듯이 글을 적는 시간은 내게 트렌드를 분석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인터넷 서핑 이상의 창의적인 시간이고 향후의 업무 수행을 위한 기초 작업이다. 그러나 남들에게 그 시간동안 나는 딴짓을 한 사람이 된다.

유정식님의 글 중에 '사무실에서 딴짓할 시간을 허하라'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무실 또는 업무 시간에 딴짓을 불허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생산성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그리고 외부 인터넷을 막아놨다하더라도 요즘은 그냥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마음대로할 수 있으니 강제로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도 없다.) 나는 저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딴짓할 시간 time to이 아니라 딴짓할 용기 dare to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또는 업무 시간에 방종을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된 딴짓은 필요하다.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듯이 자유로울 때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특히 지식노동자들에게 딴짓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다. 창의력의 시대, 융합의 시대에 딴짓은 창의와 창발성의 일으키는 한 가지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무분별한 딴짓을 허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딴짓의 정의가 뭘까? 그냥 업무가 아닌 모든 일이 딴짓일까? 인생은 정해진 트랙을 도는 육상경기가 아니다. 그냥 시작과 끝만 있을 뿐이다. 직진한다고 해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장 빨리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삶의 트랙에는 매 순간 다른 목적과 이유가 있다. 딴짓을 그저 업무의 방해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딴짓을 통해서 더 창의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그런 문화와 지원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

(2013.04.03 작성 / 2013.04.12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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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편두통 때문에 회사 탕비실에 비치된 약을 먹으러 갔습니다. 탕비실의 약상자는 아래와 같은 작은 서랍장입니다. 약이 섞이지 않기 위해서 각 서랍장마다 각기 다른 약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상자에 어떤 종류의 약이 들어있는지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서랍을 열어서 내부를 보더라도 약품이 캡슐별로 개별 포장되어있기 때문에 약품 뒷면을 자세히 보기 전에는 각각의 캡슐/약품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약품 뒷면에 약품명이 적혀있기는 하지만 효능을 설명한 부분이 잘려나간 경우도 있고, 또 약품명만으로는 어떤 효능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의 경우 잘 알려진 감기약이지만, 구체적으로 두통에 효능이 있는지 아니면 몸살에 효능이 있는지 목감기나 코감기에 효능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약상자/서랍의 겉면에 '감기약' '두통약' '설사약' '소화제' '진통제'와 같이 효능을 알려주는 라벨을 붙여놓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약품상자를 갖다놓은 직원은 분명히 사내의 다른 직원들의 생활편의를 지원하는 것을 업무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즉, 그 직원은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서비스를 담당하시는 분이 사용자들을 좀 더 잘 파악하고 배려를 해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햇습니다. 약을 종류별로 분리해서 넣어주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것을 더 쉽게 찾고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는 것도 담당 직원의 업무였을 것입니다. (처음에 서랍을 열어보기 전에는 약상자였는지도 몰랐음.) 그런데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만인을 위한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들은 과연 외부 고객들을 만족시켜주고 있는가? 또는 그들의 작은 편의도 배려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좀 과격한 표현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과연 우리는 고객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큰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작은 필요까지도 파악해서 해결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가끔 내외부의 서비스들을 사용해보면서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서비스의 결과물이 엉망인 것을 자주 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가 만들었기 때문에 서비스를 꾸역꾸역 사용하지만 말고, 자신이 직접 사용할 서비스를 기획/개발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많은 내부 직원들이 자기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 ('애용'이 아님)해줍니다. 그런데 진짜 그 서비스가 마음에 들어서 이용하는 걸까요? 그저 자신이 그 서비스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고 홍보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런데 고객의 마음으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서비스를 기획/개발한다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 서비스를 애용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PV나 UV 등의 가시적인 성과지표를 높이기 위한 불필요한 서비스나 기능을 추가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결국 스파게티가 된 서비스말입니다.

최근에 다음의 본사가 제주로 완전 이전했고, 사옥도 기존의 GMC에서 첨담과학기술단지 내의 다음스페이스.1로 옮겼습니다. (참고. 다음 제주 신사옥 (다음 스페이스.1) 소개 Daum's Next Jeju Challenge) 신사옥의 문에는 아래와 같은 '당기시오 Pull' '미시오 Push'를 알려주는 라벨이 붙어있습니다. 이 표식을 보면 바로 밀어야할지 당겨야할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이 버튼을 붙여놓으신 분의 작은 배려에 감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볼까요? 그런데 문마다 Pull/Push가 적혀있어서 좋은데, 두가지 다른 색상이라는 점이 이상합니다. 붉은색의 Pull/Push가 있고, 푸른색의 Pull/Push가 있습니다. 만약 푸른색은 Push 라벨에만 사용하고, 붉은색은 Pull 라벨 (또는 반대)에만 사용했다면 어땠을까요? 멀리서 걸어오더라도 푸른색이 보이면 자동으로 문을 당길 것이고, 붉은색이 보이면 밀어재칠 것이 분명합니다. 친절하게 Pull/Push 라벨을 붙여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더 직관적으로 일관성있게 적용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치 서두에 언급했던 약상자와 약상자의 라벨과 같이... 서비스나 표식에 일관성이 없으면 고객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사용자들은 이제 익숙해져서 큰 불편이 없을 수도 있으나, 새로 온 고객들은 일관성이 없으면 불편해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들도 UI/UX 측면에서 너무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서비스별로 버튼의 위치가 다르고, 폰트의 크기나 색상이 제각각입니다. 각각의 위치나 색상 등에 따라서 고유의 의미를 부여하고 일관되게 전체 서비스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용자들에게 기대감을 주고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서비스이의 역할입니다.

물론 당연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곳에 새로운 것을 배치하거나 변화를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창의성에서 창발성 Emergent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의 갇혀진 사고의 틀이 아닌 열린 사고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개념이나 패턴의) 일관성 Consistency은 획일성과 다릅니다. 위의 Pull/Push 버튼에서 색상과 문자/명령체계를 통일시키는 것은 획일성이 아닌 일관성입니다. 하나의 통일된 서비스 경험을 제공해줘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명시/암묵적으로) 합의된 그런 컨벤션 Agreed Convention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런 것은 일관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예시를 보면서 나는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에서 그런 일관된 경험을 고객들에게 제공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지게 됩니다. 신사옥으로 이주하면서 좋았던 점도 많지만, 신사옥이 갖고 있는 몇 가지 부주의/불편한 것들을 목격하면서 (위의 약상자나 푸쉬/풀버튼 이외의 것들...) 고객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비스를 만든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분명 이 사옥을 설계건축하신 분은 건축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건축의 외양이나 공법의 전문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전문가가 아닌 듯합니다. 고객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작은 불편들을 조금만 더 고민하고 이해하려고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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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의 실종

Gos&Op 2012.03.08 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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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다양성 Diversity이다. 건전한 생태계의 특징으로 다양성을 들 수가 있고, 창발적 창의력의 기저에도 다양성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다양성이 공격받고 있다. 제목과 같이 우리는 다양성이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봐도 그렇고 개인의 삶을 봐도 그렇다. 점점 우리의 삶이 단조로워지고 있다. 잠시 자신의 하루 일과를 떠올려봐라. 우리가 얼마나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는가? 아침에 일이나서 싣고 출근해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을 하고 그러고 나서 TV를 좀 보거나 독서를 한 후에 잠이 든다. 매일의 삶이 이렇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가? 가족, 회사동료, 그리고 몇몇 어릴 적 친구나 동기동창들. 그외에 더 만나는 사람도 없다. 우리의 온라인 생활은 어떤가? 적어도 10년 전에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에는 주요 인터넷 신문 홈페이지를 방문하던 것이 하루의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뉴스는 그냥 다음에 접속해서 보고, 그 외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글을 좀 올리는 정도가 전부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약 10개 정도의 사이트를 매일 접속했는데, 이제는 다음, 트위터, 페이스북정도만 매일 접속한다. 다른 사이트는 가끔 생각이 날 때나 이벤트가 있을 때만 접속한다. 하루의 일과, 만나는 사람, 온라인 접속패턴 등등의 우리/나의 일상을 살펴보면 진짜 단조로워졌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 또는 소셜미디어를 소위 소통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그곳에서 제대로된 소통을 했던가? 트위터에서는 헛소리를 하는 부류의 글은 읽지 않는다. 처음부터 팔로잉도 하지 않는다. 나와 정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 본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트위터보다 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좀 무거운 주제의 글을 올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짧은 글로 남길 뿐이지,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다양한 글들을 모두 보지는 않는다. 물론 페이스북은 친구가 300명 미만이라서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는 대강 훑어보기는 한다. 그래도 모든 글을 자세히 읽고, 링크의 글을 모두 확인해보고, 또 친구의 글이나 사진에 모두 라이크하거나 댓글을 달지 않는다. 소통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정작 나와 정치색이 비슷하거나 관심사가 같은 이들의 글만 보게 되고,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올려놓고 그저 라이크나 댓글을 기다리고 있다. 나만 그런가? (나의 온라인에서의 행동패턴에 대해서는 일전에 더 자세한 글을 올렸다. 참고: 온라인 활동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다.)

다양성을 뜻하는 단어인 Variety는 TV에서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뜻하기도 한다. 뉴스나 드라마처럼 주어진 장르가 아니라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인 듯하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대화도 하고 게임도 하고.. 참 다양한 활동을 한 프로그램에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능프로그램을 버라이어티쇼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의 예능프로그램이 다양한가? 무한도전을 시발로한 리얼버라이어티가 한동안 방송을 장악하더니, 이제는 슈스케를 시발로한 온갖 공개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넘쳐난다. 다양함에서 시작했던 버라이어티도 다양함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것들은 어떨까?

단조로운 삶을 심플라이프 Simple Life라 부르기도 한다. 보통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전원에서의 삶을 묘사할 때 심플라이프라고 표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전원에서의 삶이 도시에서의 삶보다 더 복잡하다. 우리가 도시의 삶을 복잡하다고 말하지만,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도시는 영화 <모던 타임스>의 표현대로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단조롭다. 자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쉬다가 자는 삶이 전부다.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도 정해져있고, 자주 가는 곳도 정해져있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할 것같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매일매일이 다르다. 크게는 춘하추동의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파종하고 물주고 비료주고 그러다가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는 긴밤을 방에서 쉴 것만같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오늘의 행동패턴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패턴은 분명 오늘과 다르다. 날씨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시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앞서 말한 삶의 패턴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다르다. 매일매일의 내외부 상태에 따라서 삶의 패턴이 다르다. 만나는 사람도 오늘 만났던 사람을 (가족이 아닌 이상에는) 내일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왜 시골에서의 삶을 심플라이프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귀농하는 이들은 심플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거다. 그냥 자연의 순리와 흐름에 따라 살겠다는 것은 심플라이프가 되겠지만, 자연의 흐름이 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어쨌던 인간이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삶이 더 단조로워졌다. 도시에서의 삶에서 다양성을 찾기가 어렵다. 다양성... 어디 갔어?

흔히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 그리고 적응. 이것을 진화라고 부른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이 이거 아닌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객체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객체는 멸종한다는 것이 진화론 아닌가? 그래서 '진화 = 적응'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같다. 그런데 이 적응이라는 것이 단조롭게 되는 과정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더욱더 능숙해지고 효육적이 되다는 의미다. 새로운 도시로 이주했을 때 처음에는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헤매고 다녔지만,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 가장 빠른 길을 알고 누굴 만날지 정해진다. 그렇게 적응을 하고 나면 굳이 새로운 길로 가지 않는다.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기 전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다. 관념적으로 '진화 = 발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적응 = 진화 = 발전', 즉 '적응 = 발전'의 등식도 성립할 것같다. 그런데 적응이 발전일까? 적응은 발전이 멈춘 상태가 아닐까? 더 이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고, 한두가지 일에만 최적화된 사람에게서 새로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산업화와 도시화의 절정기에는 스스로 효율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그렇게 주어진 트랙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물론 가장 빨리 달리 사람은 1등을 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저 주어진 길을 가장 빠르게 또는 가장 짧게 가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면 안 되는 때가 온 것같다. 목표는 주어졌어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하나의 해답을 얻고 나서는 그 해답이 전부인양 그것만을 바라보며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로만 다녀서는 새로움을 얻을 수 없다. 때로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새로운 곳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보게 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진 목표를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에 해답으로 알았던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참 재미는 없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방법을 시도할 때 재미도 있고 같은 일이라도 또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 배운 것, 얻은 것을 포기하는 것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삶이 더 단조로워진다.

다양성은 비효율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언어가 다양해서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 문화가 달라서 서로 오해하기도 한다. 종교가 달라서 때론 전쟁도 한다. (물론 나도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모두가 같은 종교를 가졌으면 하는 선교적 마인드가 있다.) 그러나 그런 다양성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 생태계에서 다양성이 없어진 이후에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자주 본다. 단지 한두 종류의 동/식물을 제거했을 뿐인데, 전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진 경우도 자주 본다. 그리고 동물들이 우성유전자를 가진 종으로 진화해서 한두종류의 동물종만 남게 되면, 그런 종들은 특정 질병 등의 면역체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대대로 동성동본 등의 근친과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단지 도덕윤리 때문이 아니라 종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자연의 순리에 따른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던 다양성이 무너지면 전체 생태계가 함께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 계속 말했듯이 우리의 삶과 문화에서 다양성이 실종되고 있다. 하나의 이념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방식이 최고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최고의 방법도 처음에는 다양한 방법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은 하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최고의 옵션을 찾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최고의 옵션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다양한 종류의 씨를 뿌려야 한다. 다양한 시도로 나무를 가꿔봐야 한다. 그래야지 최고의 품질을 제공하는 품종이 어떤 것인지? 최고로 잘 자라게 하는 육종방식이 뭔지를 찾을 수가 있다. (물론 이제까지의 역사경험으로 이런 종류는 다 알고 있겠지만... 수사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새로운 문제는 만났을 때, 단지 처음에 그 문제를 해결했던 그 방법을 일방적으로 최고의 방법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해보고 그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면 된다. 처음부터 다양성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한다. 창발적 창의의 근원은 다양성에 있다. Emergent creativity comes from diversity.

좀 간단하게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좀 길어졌다. 처음부터 글에서 하나의 결론을 보여줄 의도는 없었다. 그저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 결국에는 더 큰 문제에 봉착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 ... 네, 그냥 그렇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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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제주도 북동쪽 내륙의 곶자왈지대에 위치한 동백동산에 다녀왔습니다. (참고. 제주 선흘 동백동산과 김녕해안도로) 링크한 포스팅에서도 밝혔듯이 동백동산에 가기 위해서 길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김녕성세기해변에서 월정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트래킹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다니던 길이 아닌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따라서 김녕으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동백동산 표지판을 보고 트래킹을 시작했습니다. 동백동산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전에 TV 뉴스에 보았고, 나중에 가볍게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어제의 목표는 동백동산이 아니라 김녕성세기해변이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참고로.. 동백동산은 제주도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해있습니다. 곶자왈 (화산활동에서 아아용암류가 분출된 지역에 형성된 숲) 지역이면서 내부에 습지/연못 (먼물깍)이 있고, 전체 트래킹코스는 약 5km입니다. 숲속길과 도로길이 각각 2.5km정도이고,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코스이라서 온가족이 함께 트래킹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중간중간에 벤치도 많이 놓여있고, 자연학습자료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생태학습장으로도 적당합니다. 제주도 북동쪽 내륙은 아직 덜 발달된 지역이라서 주변에 편의시설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변에는 함덕해수욕장, 김녕성세기해변, 동굴의 다원 다희연, 크라운골프장, 선녀와 나무꾼, 거문오름과 만장굴 등의 관광/휴양지도 있기 때문에 여행코스를 잘 만들면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동백동산을 트래킹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김녕성세기해변으로 가기 위해서 평소에 자주 다니던 짧고 빠른 길을 택했다면 지금 동백동산에 왔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목표는 분명 김념이었지만 저는 동백동산에 있었습니다. 그때 동백동산은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우연이 선물한 멋진 중간 경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동백동산이 더 길고 멋졌다면 그곳을 최종목적지로 여기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동백동산이 관광지로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고 아직 계절적 영향으로 산림욕을 즐기기에는 미흡했고, 트래킹코스가 짧아서 충분한 산책/운동이 될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숲길의 특성상 처음에 계획했던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최종목적지가 될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애초에 김녕으로 떠났던 이유가 바로 멋진 사진을 찍기위해서였기에...) 

목적지 (김녕성세기해변)에 가기 위한 방법/길은 많이 있습니다. 평소에 다니던 곧게 뻣은 대로를 택했을 수도 있고, 어제처럼 516 산악도로를 거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완전히 엉뚱하고 더 먼 길을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가장 짧고 편하고 빠른 길을 택했다면 동백동산을 볼 수 있었을까요? 이 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편한 방법도 있고, 가장 빠른 방법도 있고, 또는 그냥 정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정답에 가까운 방법을 통해서는 처음에 의도했던 목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이룰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늘 다니던 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늘 다니던 길이더라도 자전거를 타거나 도보로 걸었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그러나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을 택했다면 새로운 길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집중하고 또/반대로 새로운 풍경에 정신이 팔려서 평소에 보지 못했던 풍광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의도/목표와는 다른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우연성 Serendipity 이고 창발성 Emergent입니다. 우연성/창발성이 혁신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혁신은 주어진 모범답안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된 "또 다른" 답입니다.

곧게 뻣은 길을 택했다면 분면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기름을 아끼는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트래픽을 덜 받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면서 운전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고로는 기존 방법을 더 효과/효율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개선혁신 또는 운영혁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에 이르기에는 어렵습니다. 옛것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혁신은 창발성에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창발설은 평소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평소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볼 때 우연히 일어납니다. 목표/목적을 빨리 이루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평소에 많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서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처음에 의도했던 김녕해안도로를 트래킹했다면 분명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백동산이라는 새로운 곳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생각은... 혁신 또는 새로움이란 늘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타나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혁신이란 가끔 우리가 찾아나선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연히 나타난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가 TV에서 동백동산에 관한 뉴스를 보지 못했다면 저는 어제 동백동산을 거저 지나쳤을 것입니다. 평소에 많은 공부를 해두고, 견문을 넓혀두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법을 (질문하기나 관찰하기 등) 연습해야지 우연히 마주친 혁신을 바로 알아채고 잡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새로운 길로 가보겠다는 의지와 새로움을 바로 알아보는 관록이 우리를 새로운 곳 (혁신)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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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5, 세상은 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창의력도 창발적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런 창발성에도 법칙이 있다. 조건이 잘 맞으면 더 큰 창의력으로 승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위대한 아이디어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스마트 월드
카테고리 자기계발
지은이 리처드 오글 (리더스북, 2008년)
상세보기

 더 똑똑한 세상을 위해서...
 책은 지식의 창의적인 도약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려 개념들이 소개되었다. 상상력이 네트워크 이론, 복잡계 원리 등의 여러 개념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창의력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이야 말로 그런 다양한 개념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창조성은 어느날 갑자기 창발하는 것같지만 책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분명히 말해준다. 적어도 다음의 9가지 요소나 조건들이 만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하고 있다. 몇몇 개념은 쉽게 이해했지만, 중반에 소개된 몇몇 개념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넘겨버린 감도 있지만 일견 그럴듯하기는 하다. 다음의 9가지 원리가 인간의 창조성을 가능케 한다.
  1. 이성과 상상력
  2. 티핑포인트의 법칙
  3. 적익부, 적익적 법칙
  4. 자연발생의 법칙
  5. 길찾기의 법칙
  6. 핫스팟의 법칙
  7. 좁은 세상 네트워크 법칙
  8. 통합의 법칙
  9. 최소 노력의 법칙
 모든 개념을 다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냥 책을 사서 볼 것을 권한다. 기본적으로 세상이 발전하는 것은 또는 미래는 이성보다는 상상력에 의해서 이뤄진다고 말한다. 특히 마지막 장에 경영학 구루 중에 한명인 게리 해멀의 말이 인상깊다. '많은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상하지 못해서이다.'라는 말은 너무 적절한 말같고, 또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전부인 것같다. 단순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창조성이 발휘되지는 않는다. 티핑포인트 법칙에서 말하듯이, 많은 양의 상상력들이 모여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시점을 넘어야 창조성이 발휘된다. 그리고 적익부, 적익적의 법칙에서는 더 적합한 생각이 더 부해지고, 또 더 적합해진다는 경제학의 부익부빈익빈 법칙이 상상력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자연발생의 법칙은 말 그대로 상상력의 창발성을 말해주고 있다. 논리와 이성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이 아니다. 길찾기는 그런 상상력의 네트워크에서 둘 이상의 개념을 찾아내서 바른 길을 연결해줘야 상상력이 충돌, 결합해서 더 큰 상상력으로 커감을 말해주고 있다. 핫스팟은 티핑포인트와 비슷하게 작은 에너지들이 모여드는 그런 지점이 있음을 말해준다. 마치 에네르기파들이 모여서 큰 충격파를 만들어내듯이 작고 약한 상상력들이 모이는 그 지점, 어쩌면 허브'에서 더 큰 상상력이 발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세상 네트워크는 알베르트 라즐로 바라바시가 제시한 scale-free 네트워크를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 스케일 프리 네트워크는 적익부, 적익적의 법칙에서도 선호연결의 개념과도 이어진다. 통합의 법칙은 말 그대로 몇몇 중심 사고들이 통합의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변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소 노력의 법칙은 ... 글쎄.. 갑자기 생각이... 어쨌던 최소한의 입력이 주어졌을 때 네트워크/세계 전체가 움직임을 말하는 것같다. 제대로 설명을 못 드렸습니다. 제 기억력의 한계와 함께, 여러분들이 직접 책을 읽어보실 것을 권하기 때문에 더 자세히 적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여러 상상력의 대가들의 업적들이 많이 나열되어있습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밝힌 패러다임 시프트, 이중나선구조의 발견과정, 피카소가 입체파를 완성시킨 이야기, 예술이 과학을 만나서 시작된 신낭만주의, 최근 버블이 생기기 전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경제관인 폴 로머의 신경제이야기, 쿠텐베르크의 인쇄술도 예시되었고,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을 설계한 게리의 이야기, 말콤 글래드웨의 <티핑포인트>도 당연히 논의되었고, 알베르트-라즐로 바라바시의 <Linked>는 어쩌면 책 전체의 기본 틀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아, 길찾기에서는 바비인형이 성공한 이유도 설명되고 있네요. 그 외에도 다양한 패러다임 시프트를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으니, 굳이 창의력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냥 이 세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애플 이야기도 좀 등장하기도 합니다. 최근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에서 애플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다라는 말을 했는데, 실제 책에서 통합의 법칙이 보여주는 것도 예술과 과학의 만남으로 새로운 사조가 생겨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목차를 살펴보니 제가 언급하지 못했던 더 많은 사례들이 보이네요.

 함께 읽으세요.
더 많은 읽을 책들이 있지만, 직접 책을 보시면 이런 책들은 꼭 읽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위에서 적은 모든 책들은 개인적으로 추천합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너무 유명한 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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