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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02 이렇게 살다간 죽는다
  2. 2013.04.26 상실수업

이렇게 살다간 죽는다

TSP 2014.05.02 1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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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해서 조식을 먹고 양치를 하러 가는 중에 문득 '이렇게 살다간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났다 (했다가 아니라 났다). 최근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몇 주를 계속 달려오고 있다. 눈이 충혈돼서 이물감을 느끼면서 인공눈물에 의지하면서 지낸지가 한달이 넘었고, 입술 주위가 부릅 트서 피가 계속 난지도 수일이 지났다. 어느날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는데 꿈에서 맵리듀스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깨버린 적도 있다.

전체로 봐서는 중요할 수도 있으나, 나의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은 계속 발생하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다. 그럴 거면 대안이나 바른 방법을 제시해주든가... 그러지도 못하면서 스트레스만 주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작년에 친하던 후배가 변을 당한 이후로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안 하고서 잠든 날이 거의 없는 것같다.

그외에 다른 많은 상황들이 겹쳐서 나름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이 났던 거였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역사에서 죽음을 피해간 인물을 찾을 수가 없다. 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만 죽음을 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예수님의 경우, 죽음을 피한 것이 아니라, 죽음 후의 부활이다.) 뱀파이어류의 만들어진 이야기도 있지만 그들도 결국 죽음 이후의 모습일 뿐 죽음을 피한 것은 아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불로장생을 꿈꾸면서 불로초를 찾아다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만약 불로초가 실제 존재했고 시황제가 그걸 시음해서 불로장생했다면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권력의 최정점에 서서히 내려와서 밑바닥에 내려왔을 때도 불로장생이 그에게 유익했을까? 최근에 불로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 이로 레이 커즈와일을 들 수 있다. 나름 똑똑하고 많은 일을 한 사람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알지 못하는 연민을 느꼈던 적이 있다. (여기까진 아침에 한 생각)

최근 발생한 사건을 보면서 만약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위해서 슬퍼하고 눈물 흘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참 잘못된 삶을 살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반대로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바람이 있다. 정해진 운명의 길로 가는 사람을 위해서 너무 미안해하고 슬퍼한다면 그 운명의 사람도 마음편히 떠나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 

육체적으로 피로가 풀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나약해지니 많은 생각의 늪으로 빠져든다. 며칠 전 "열심히 사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더라"라고 적었던 페이스북의 그 말도 어쩌면 이런 컨텍스트에서 나왔는 것같다.

나는 일에서는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는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면서 보낸 젊은 날이 후회된다. 어쩌면 무생의 일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맞다. 그러나 사람에게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미 스스로 나름의 판단을 내린 사람이지만 (그래서 그에게서 연민이나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줄임) ... (여기까진 며칠 전 생각)

어제 내도동 보리밭길을 걸으면서 했던 생각을 페이스북에 짧게 적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자연 경치를 해치는 전신주와 전선이다. 그런데 어제는 자연은 이미 전신주와 전선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렸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만들어졌지만 이미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제거할 수가 없다면 그냥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포용력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여기까진 어제 생각)

이런 글을 적는 것이 나는 힘든데 왜 못 알아주냐라는 볼멘소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의 흐름을 그냥 그대로 적을 뿐이다. 내 생각에는 자유가 있다. 내 행동에는 책임이 있다. 행동하기 전까지는 내 생각에 자유를 허하라. (이건 방금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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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unexperien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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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수업

TSP 2013.04.26 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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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이 있다면 수강해 보고 싶다.

예전에 <인생수업>과 <상실수업>을 읽은 적이 있다.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 어떤 내용이 포함되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어쨌든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의 글이었는데 나는 지나치게 가볍게 읽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죽음은 너무 먼 얘기로 치부해버리고 마치 자신은 죽음을 피해갈 것같이 우리는 살아간다.

상실은 아무리 연습해도, 수없이 경험을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늘 가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있지만, 주변 지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다. 특히 부모님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는 그 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등과 같은 생각이 머리 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부모님이나 친지분들과의 작별에 대한 나와 비슷한 생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껏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많았다.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을 만났고, 또 주변에 수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인생의 반을 살면서 이별보다는 만남이 더 가까웠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반 언저리에 다다르면서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별은 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현실이 되고 내 삶이 되어버렸다.

큰어머니를 보내드리는 지금도 그렇고, 재작년 작은아버지를 보내드릴 때도 그랬듯이 여전히 상실은 익숙치가 않다. 그리고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더 큰 짐으로 다가온다. 보통 주초에 집에 전화한다. 말주변이 없어서 긴 통화가 이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일주일에 한번은 통화한다. 때를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전화하는 이유는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무섭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하늘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매번 무섭다. 설마 지금이 그때인가?라는 무서운 생각이 늘 엄습한다.

상실에 대한 수업은 없다. 그저 직접 겪고 대처해날 수 밖에 없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겠지만 -- 또 익숙해져서도 안 된다 --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게 상실수업이다.

(2013.04.22 작성 / 2013.04.26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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