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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이 전제인 사회

Gos&Op 2014.01.06 1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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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도 짧게 적었던 어제 있었던 글입니다.

모처럼 날씨가 화창해서 사진을 찍으러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주도의 서쪽 끝인 신창해안도로까지 갔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자동차로 3~40분이면 갈 수 있는 그곳은 여행객이 아닌 제주시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은 1년에 한두번도 가기 힘든 먼 곳입니다. 그래서 날씨도 좋으니 일몰까지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느 주말처럼 조금 늦게 일어나서 침대에 누워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저녁에 라면을 끓여먹을 것같아서 늦은 점심은 밥 위주로 하고 싶어서 해장국집을 찾았습니다. 천천히 운전하고 가다가 한 곳에 정차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에 게스트하우스겸 셀프카페를 겸한 '오로섬'이라는 식당이 보였습니다. 시내로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같아서 여기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볶음밥을 시켜서 한참 먹고 있는데 분위기가 조금 심상치 않았습니다. 음식이 전시된 곳이나 계산하는 곳 등에 아래 사진처럼 "현금이 없다고 당황하지 마세요!^^ 인터넷 뱅킹 계좌 이체 농형XX"라는 문구가 붙어있었습니다. 무인카페처럼 (셀프카페지만 완전한 무인카페는 아님) 주인이 상주할 수 없으니 먹은만큼 현금을 내놓고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카드 계산이 불가능할 것같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든 당황하지 마시라는 문구...


그런데 때마침 며칠 전부터 수중에 현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1,000원마저도 전날 어묵을 사먹는데 사용했습니다. 지난 연말부터 회사에 갈 때마다 현금을 찾아둔다고 마음먹었는데 열흘이 넘도록 신용카드만 들고 다녔습니다. 이제 밥을 먹는 동안 계속 불편했습니다. 진짜 카드를 안 받으면 어떡하지? 요즘은 놀러다닐 때는 노트북 가방 (OTP와 인증서USB를 넣고 다님)도 들고 다니지 않아서 바로 이체도 불가능한데...? 시내에 나가서 현금을 찾아서 바로 주겠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냥 나가도 될까? 지금 들고 있는 카메라를 맡겨놓아야 하나? 그런데 카메라는 고가인데 괜히 맡겨놨다가 다른 데 나중에 시치미를 떼는 건 아닐까? 그러면 적당히 핸드폰을 맡겨놓고 갔다가 올까? 그냥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내일 이체해주겠다고 말하면 받아줄까? 등의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식사를 마쳤습니다.

이제 더디어 결전의 시간이 왔습니다. '저기, 혹시 카드는 안 받나요?'라고 물었고, 당연히 '네, 안 받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상황을 설명하며 현금도 없고 보안카드 등이 없어서 이체도 못해주고, 지금 시내에 나가서 현금을 찾아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주인분께서 순순히 그러라고 하셨지만, 그런데 (앞의 상상들에서 유추되듯이) 영 깨름칙했습니다. 뭔가 보증물을 맡겨놔야할 듯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라도 적어놓겠다고 말했는데,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돈을 갚을 거라면 굳이 그런 걸 남겨서 뭐하게요'라고 당연하다는/늘상 그랬다는 듯이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CCTV에 내 얼굴이 찍혀서 그냥 도망가면 신고할 거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1만원정도는 떼먹어도 우리는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그렇게 신뢰를 보여줬으니 너는 감동해서 이렇게 글을 적어서 우리 식당을 사람들에게 알릴 거야"라고 미리 계산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저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식당을 나와서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농협에서 수수료 900원을 물어가면서 돈을 찾아서 바로 갚았습니다. (바로 갚았다는 걸 알림으로써 내가 믿을 놈이라는 걸 알립니다.)

그렇게 돈을 찾으러 운전하며 가는 동안 잠시 신뢰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평소에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금전적이나 특수 이득이 중간에 끼면 신뢰에 금이 가기가 쉬운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인터넷의 많은 서비스들, 특히 상거래 서비스는 신뢰 또는 평판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이베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적된 판매자/구매자의 신뢰점수 때문이고, 인터넷에 물건을 구입하기 전에 어느 정도 이상의 가격이라면 가격이 얼마나 싼가를 따지기 전에 최근 댓글이 몇 개 달려있는가를 확인하고 이 사이트가 믿을 수 있는지부터 확인합니다. SLR 클럽에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사용자 등급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당연하다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신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용카드조차도 신용불량자 또는 신용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체크 (수표)가 지금은 돈이 없으니 이걸 은행에 갖다주면 현금으로 돌려준다는 일종의 신용 거래고 이것이 발전해서 신용카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른 많은 것들도 그렇지만 그저 신용카드라는 결과물만 받아들려져서, 오랜 기간 쌓인 신뢰 프로세스가 아닌 가시적 보증에의해서 카드 발급/결제가 이뤄집니다.

나는 분명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보증물이 필요합니다. 허투루 한 약속이 아니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데 이걸 모르는 사람에게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제도 나는 놓아주면 바로 돈을 찾아서 갚을 건데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식당 주인에게 증명할 방법이 뭘까를 고민했습니다. 카메라를 맡겨놓고 갔다올까? 아니면 핸드폰정도로 타협할까? 적어도 이름과 전화번호만이라도 남겨줘야할 것같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신용과 신뢰를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결국의 모든 신용/신뢰의 증명은 보증물이 아닌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핸드폰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찾아서 바로 갚는 것이 신뢰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사회는 신용 또는 신뢰를 전제로한 사회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에서 불신이 전제가 됩니다. '너를 믿으니 너를 도와주겠어'가 아니라, '너의 믿음을 먼저 보여, 그러면 나도 도와주겠어'가 전제가 된 사회입니다. 뉴스의 특성상 믿음/훈훈함보다는 불신과 사기, 기만 등의 행위가 더 회자됩니다. 어쩌면 그런 미디어의 노출에 따른 악순환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미디어는 또 불신에 따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끊거나 멈출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 한가운데 있습니다.

오래 전의 두레나 품앗이 등의 풍습도 어쩌면 같은 마을, 공동체 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소액대출로 잘 알려진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의 성공도 (실제로는 외부의 지원 때문에 지속가능하지만) 사회적/이웃의 모욕 (평판)이 전제가 되어서 성공한 모델입니다. 어쩌면 오로섬의 주인분도 오랜 운영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게 돈을 갚더라라는 나름의 신뢰 모델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신용, 신뢰라는 말을 쉽게하지만 그걸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같습니다.

불신이 아닌 믿음이 기본/전제인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매일매일 숙제가 쌓여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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